항목 ID | GC011022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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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碑石- |
영어의미역 | The Tale of Memorial Ston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 |
집필자 | 안상경 |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에 전해오는 비석돌에 관한 설화.
[내용]
「비석돌」이야기는 감곡면 오궁리 오갑의 신씨 문중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다. 인천 강화에 가면 돌들이 모두 별다르고 기이하다. 그 중에서도 물 속에 있는 해중석은 돌의 품질이 특이하고 비석을 새기는 데 우리나라에서 제일로 꼽으며, 풍화 작용에 강하여 수백 년이 지나도 변질되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러한 돌이 많이 나는 강화도에 판윤공이 강화유수로 갔을 때 신도비를 새길 수 있는 큰 비석돌 세 개를 잘 다듬어서 배에 싣고 강화에서 한강을 따라 여주에 도착하여 비석 한 개는 여주 강변에 내려놓고, 두 개는 샘깨강으로 가져와 인력을 동원하여 아홉사리에 내려놓고 끌어 옮겼다.
당시에는 육로보다 배로 운반하는 것이 더 쉬워 강을 따라 배로 왔으나 샘깨강까지 와서는 할 수 없이 인력으로 끌어오는 수밖에 없었다. 인력을 동원하여 아홉사리고개로 넘어 오는데 돌 한 개는 무사히 오갑까지 끌어왔으나, 두 개째 끌어오는데 꼬불꼬불 아홉사리고개가 워낙 가파르고 험한지라 조심하였으나 별안간 비석돌이 구르면서 사람을 후려치는 바람에 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상황이 그렇게 되고 보니 아무리 비석돌이 소중하고 강화에서 아홉사리고개까지 가져오느라고 고생은 하였지만 사람이 죽었는데 그 비석돌을 오갑까지 끌어오자고 할 형편이 못 되어서 사람이 죽은 그 자리에 땅을 파고 비석돌을 묻었다고 한다. 아마도 아홉사리 굽이굽이 돌아치는 그곳 어디엔가 묻혀 있을 것이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제천공이 별세하자 뱀산 모랭이에 산소를 모시고 강화에서 가지고 온 비석돌에 비석을 새겨 세웠다. 그 비석은 삼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석양 무렵에 먼 거리에서 보면 큰 거울을 세워 놓은 것처럼 환하게 빛을 내고 있다.
그러면 여주 강변에 내려놓은 비석돌 하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비석돌을 내려놓은 곳은 안동권씨와 제주고씨가 살고 있던 집성촌의 강변이었다. 그런데 이 비석돌은 갖다 놓은 지 몇 년 후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강물이 불면서 떠내려갔다. 그 후로 안동권씨와 제주고씨의 자손들 사이에 대를 이어 그 비석돌 이야기가 전해졌다.
이곳에 와 계시던 한성부판윤 신대감이 강화유수로 계실 때에 좋은 비석들을 강화에서 뱃길로 이곳 여주까지 가져와서 강가에 놓았다가 큰 홍수에 떠내려갔는데 워낙 돌이 커서 멀리 가지는 못하였을 것이라는 전설이다.
이렇게 구전되던 중 1944년에 엄청난 홍수로 여주 강물이 범람하여 그 일대가 물바다가 되었다. 장마가 끝나고 강물이 빠지고 난 뒤에 보니 큰 버드나무 둥치 밑에 크고 잘 다듬어진 비석돌이 반쯤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자 동네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웅성웅성 하면서 어째서 이런 좋은 돌이 여기에 있을까 하며 제각기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때에 권혁수라는 안동권씨의 후손이 달려오더니 “이것은 오갑 신씨네 비석돌이다”라고 말하자, 여러 사람들은 어떻게 오갑 신씨네 비석돌인 줄 아느냐고 다그쳤다. 그 사람은 “이곳 강천에 전해오는 전설이 있는데 몇 백 년 전에 한성부판윤을 지내신 분이 강화유수로 있을 적에 비석돌을 그곳에서 배에 싣고 여주 강천 우리가 사는 곳에 와서 강가에 내려놓았다가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떠내려갔다고 전해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 “이것은 틀림없이 오갑 신씨네 돌이다. 이 고장 신판윤 대감 말고 저런 좋은 돌을 강화에서 가져올 사람이 누가 있나”하고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말하자 젊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겠습니다”하였다. 그리고 난 후 즉시 고승배의 삼촌 고찬영과 권혁수가 오갑으로 달려왔다. 오갑에 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오갑 어른들도 역시 그러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과연 그 비석돌을 찾게 되었으니 고맙다 하고 두 사람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그러고는 서둘러 종중 회의를 하여 판윤공 산소에 신도비를 세울 것을 결의하고 우마차를 준비하여 여주 강천에 가서 비석돌을 찾아다가 유명한 석공을 불러 오랫동안 각자하여 1948년 2월에 신도비를 세웠다. 그리고 비석돌 하나는 아홉사리고개에서 언젠가 반드시 나올 것이라 믿고 있다.
[모티프 분석]
위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우는 일은 많다. 이 이야기 역시 돌에 얽힌 이야기로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다가 나머지 돌을 찾는 구조로 이루어진다. 돌은 세 개였으나 사연을 겪으면서 두 개가 없어지고, 하나를 가진 사람들이 찾아가게 되는데 돌 두 개가 없어지게 되는 사건이 물과 땅에 얽혀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세 돌이 하나로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