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23인 필묵」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558
한자 大韓民國 臨時政府 還國記念 二十三人 筆墨
영어공식명칭 Calligraphies by Cabinet Members of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이칭/별칭 재유기념첩(在諭記念帖)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원재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19년 6월 5일연표보기 -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23인 필묵」 국가등록문화재 제755호 지정
소장처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로 369[상도동 511]지도보기
발급처 대한민국 임시정부 - 중화인민공화국 중경시(重慶市)
수급처 한국기독교박물관 -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에 위치한 남산공원 내
성격 서화류|필묵
관련 인물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23인:김구, 김규식, 이시영, 조성환, 엄항섭, 이시영, 윤기섭, 조경한, 김성숙, 유림, 김상덕, 김약수
발급자 임시정부 주석 김구 등 23인
문화재 지정 번호 등록문화재 제755호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23인이 1945년 11월 4일 중국 중경에서 쓴 휘호들을 모은 서화첩.

[개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조직되어 26년 동안 중국 각지를 떠돌며 항일운동을 해왔다. 1932년 항주(抗州), 1937년 남경(南慶), 한구(漢口), 1938년 광주(廣州), 유주(柳州), 1939년 귀양(貴陽) 등을 차례로 거쳐서 1940년 9월부터는 중경(重慶)에서 해방될 때까지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계속된 자금난과 인력난, 독립군 양성의 어려움은 물론이고 일제의 온갖 침탈과 방해공작을 막아내며, 독립운동 세력 내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한 결과 1942년부터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세력인 민족혁명당 계열이 임시정부로 흡수되어 명실공히 좌우를 막라한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가 되었다. 그러나 1945년 9월 이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임시정부의 자격과 명칭으로 일시에 귀국하는 것을 불허했기 때문에 해방 후 3개월 이상이나 귀국이 지연되다가 교섭 끝에 마침내 개인 자격의 형식으로 2차례에 걸쳐 귀국하게 되었다.

임시정부 1진이 귀국하기 전날인 1945년 11월 4일 충칭에서 대기하던 임시정부의 모든 요인들은 한 자리에 모여 귀국의 감격과 해방의 기쁨을 다시 한번 자축하고 귀국 후에 건설할 독립국가의 미래를 설계하는 각자의 뜻과 의지, 결심 등을 3m가 넘는 한 장의 종이에 피력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23인 필묵」이 완성되었다. 필묵의 주된 내용 중에는 조국의 자주독립과 부강한 민주국가 건설을 위해서 대한 동포가 합심하고 협력하자고 설득하는 유세 내용이 많으므로 일명 ‘재유기념첩’이라고도 불린다.

주석 김구(金九)[1876~1949]는 “변하지 않는 자주독립의 의지와 신념으로 변화가 극심한 국내외 정세에 적극 대응하겠다.”고 썼으며, 부주석 김규식(金奎植)[1881~1950]은,“만리에 펼친 희망찬 여정에 독립운동의 위대한 공적을 여기 알리노라”라고 써서 독립투사의 자긍심을 표현했다. 또 ‘만호(晩湖)’라는 호를 쓴 글에서는 “둘째 아들 김진동과 함께 귀국하겠다.”고 써서 일찍 고아가 된 이후 중국과 러시아 등지를 다니면서 아내와 장남을 사별한 슬픔과 해방을 맞는 기쁨을 함께 표현했다.

임시정부의 군사 전문가였던 조성환(曺成煥)[1875~1948]은 을유년(乙酉年) 늦가을에야 조국으로 귀환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큰 지혜는 때로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고 위대한 용기는 겁장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하여 온갖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는 참다운 지혜와 용기를 가질 것을 촉구했다. 임시정부의 초창기 부통령이었고 해방 직전에는 국무위원이자 재무부장 등을 역임한 이시영(李始榮)[1869~1953]은 “오직 정성을 다해야만 하늘을 움직일 수 있고 지극한 정성으로만 하느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썼다. 김구의 비서이자 외교부장이었던 엄항섭(嚴恒燮)[1898~1962]은 자력갱생(自力更生)을 외쳤고,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던 민족혁명당계 김성숙(金星淑)[1898~1969]은 “자유롭고 행복한 신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분투하자”고 썼다.

만주에서 수 차례 항일 전투에 중국군과 함께 참여했고 중국 군관학교 낙양분교에서 한인특별반의 교관을 지냈던 조경한(趙擎韓)[1900~1993]은 “국가와 민족의 영광을 위하여 싸우자”고 했다. 민족혁명당 계열로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윤기섭(尹琦燮)[1887~1959]은 순한글로 “낡은 집을 허물고 새 집을 지을 때 가시덤불이 걱정되지만 날랜 연장을 가졌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하여 신국가 건설의 자신감과 의지를 피력했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모든 독립운동 세력의 단합을 촉구했던 유림(柳林)[1894~1961]은 “여러가지 좋은 방책과 여러 세력의 협력으로 자립하고 자강하자”고 역설했다. 임시정부의 학무부차장과 문화부장 등을 역임하고 해방 후에는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던 김상덕(金尙德)[1891~1956]은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기 위해서 공동으로 분발하고 투쟁하자”고 촉구했다.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는 “아직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더욱 노력하자”고 썼다. 일제 하에서 노동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김약수는 민족혁명당 김원봉의 친구로서 국한문을 혼용하여 쓴 필묵에서 “새로운 국가는 새로운 청년이 건립해야 하는데, 새로운 청년이란 새로운 사상을 확고하게 갖춘 사람을 말한다”고 역설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23인 필묵」에는 1940년대에 와서 임시정부에 합류한 사회주의 민족운동 세력인 민족혁명당 계열의 인사들의 글이 유독 많이 발견되는데, 한결같이 민족의 대단결과 협동을 부르짖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23인 필묵은 귀국 후 김구나 김규식 등 개신교 장로교회김양선 목사와 친교가 있었던 인사 중 하나가 한국 그리스도교 제파의 연합으로 건립한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기증했던 것으로 보인다. 2019년 6월 5일 대한민국 문화재청은 한국기독교박물관에 보관해오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23인 필묵」을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755호로 지정했다.

[제작 발급 경위]

1919년 이후 26년간 중국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을 벌이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8.15 해방으로 조국에 귀환하게 되었다. 중경에 머물던 11월 4일 저녁 임시정부의 국무위원들과 행정 각부의 주요인사들 23명이 귀국을 하루 앞두고 한 자리에 모여서, 해방의 감격과 독립의 기쁨을 만끽하고 자주독립국 건설의 의지와 결의를 다진 소회를 붓글씨로 써서 필묵으로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필묵을 누가 언제까지 보관하였다가 귀국 후 서울 남산에 자리잡은 한국기독교박물관에 기증했는지에 대한 구체적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아마도 23인 임정요인들의 대표로 주석이었던 김구나 부주석 김규식이 이 필묵을 보관하였다가 그들이 귀국한 후에 잦은 교류를 해오던 개신교회 측 김양선 목사에게 기증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형태]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23인 필묵」은 1축, 23.0㎝×311.5㎝의 크기이고, 각 22.3㎝×11.5 ㎝이다.

[구성/내용]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23인 필묵」의 전체적인 모습은 아직까지 언론에 공개된 적이 없다. 다만, 2020년 현재 보관 중인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소장 유물들을 도록으로 발간할 때 1~2차례 부분적인 사진을 공개했고 2019년 6월 문화재청에서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해 박물관장 황민호 교수가 언론과 인터뷰할 때 한 차례 더 부분적으로 공개되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밝혀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23인 필묵」에 참여한 인사들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국무위원 겸 통수부 주임 조성환, 국무위원 이시영, 조경한, 김성숙, 유림, 외교부장 엄항섭, 문화부장 김상덕, 내무부장 신익희, 생활위원회 위원장 윤기섭, 국무위원 김원봉의 친구였던 김약수 등이다. 이들 중 다수는 한문으로 글귀를 남겼으며, 일부는 한글 또는 국한문 혼용으로 쓴 것도 있다. 글씨체는 다양하여 해서(楷書), 행서(行書), 행초(行草) 등이며, 각자 문장의 마지막에 쓴 사람의 호 또는 이름을 명기하였고 일부는 날짜를 명기했는데 ‘귀국전야’로 표기하거나 11월 4일로 되어 있다. 다만 해방되던 1945년을 ‘을유년’이라고 간지식으로 표기한 것이 많고, 임시정부 기년을 사용하여 27년으로 표기한 것들도 있다. 또 이름 밑에 싸인을 하거나 인장을 찍은 경우도 다수 있다.

2019년 6월 한국기독교박물관의 황민호 관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조국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각자가 품고 있던 뜻과 의지를 피력하여 그들이 품고 있는 의식과 시대상까지 살펴볼 수 있다.”고 필묵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대동단결(大同團結), 자립(自立), 자유(自由), 신사상(新思想) 등의 용어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의의와 평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23인 필묵」은 한국 독립운동의 대표적 단체였던 임시정부의 주요인물들이 광복의 기쁨과 신국가 건설의 희망을 피력한 서화첩으로 1945년 11월 4일 중국 중경에서 기록된 것이다. 필묵에는 26년간 지속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사 속에 내포된 온갖 역정과 고난을 극복한 독립투사들의 정성과 노력, 애국적 희생, 자긍심 등이 배어 있고 일제 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에도 계속된 좌우합작 운동을 통한 자주적 통일민족정부 수립의 의지도 간접적으로 피력되어 있는 소중한 독립운동사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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