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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고보폭압정책반대동맹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196
한자 大邱高普暴壓政策反對同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8년 9월연표보기 - 대구고등보통학교 동맹휴교 투쟁
성격 학생운동

[정의]

1928년 4월에 대구의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벌인 학생운동.

[개설]

1928년 4월에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역사 교사의 이순신 폄하 발언을 계기로 학생자치, 언어와 집회, 비인간적 대우 철폐, 조선어 시간 연장과 조선 역사 시간 신설, 교장 실책 개선, 일본인 교장 및 일본인 국어·역사 교사 배척 등을 요구하며 동맹휴학 투쟁을 전개하였다. 대구고보폭압정책반대동맹3·1운동 이후 대구 최대의 학생운동 사건이었다.

[역사적 배경]

1928년 신학기 초에 대구고등보통학교 일본인 역사 교사가 일본 역사 시간에 임진왜란을 설명하던 중 이순신을 ‘적’이라고 폄훼한 것이 원인이 되어 동맹휴학 투쟁으로 번졌다. 학생들의 “이순신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충신인데, 어떻게 ‘적’이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하여 학교 측은 답을 하는 대신 1928년 3월에 질문한 학생과 ‘이순신 발언’에 반발하는 2학년, 3학년, 4학년 학생 14명을 사실상 퇴학시켜 사립학교로 전학시키는 처분을 내리며 탄압하였다.

[경과]

1928년 대구고등보통학교의 ‘이순신 발언’이 있었을 때, 학생들의 비밀결사 적우동맹(赤友同盟)은 ‘대구고보폭압정책반대동맹’을 결성하여 동맹휴교 투쟁을 벌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대구고보폭압정책반대동맹’ 결성을 놓고 재학생과 졸업생 사이에 논쟁이 벌어져 계획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구고보폭압정책반대동맹’의 결성을 주장하는 학생들은 다시 일우당(一友黨)[또는 일우동맹]을 결성하여 동맹휴학 투쟁을 벌이고자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대구고보폭압정책반대동맹’의 결성을 둘러싼 이견이 해소되지 않아 동맹의 결성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일우당은 1928년 여름방학 동안 동맹휴교 투쟁을 준비하고, 9월 26일에 ‘대구고보폭압정책반대동맹’을 결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학생들의 요구조건을 학교에 냈다. 학교 측은 학생들의 요구조건을 무시하고, 동맹휴교 투쟁에 참여한 학생들에 대하여 학칙을 내세워 퇴학, 정학 등의 처분을 내렸다. 1928년 10월 9월의 동맹휴교 투쟁에 참여하지 않은 4학년 학생들도 2학년, 3학년 학생들과 함께 ① 전(前) 진정서의 승인, ② 희생자의 복교(復校), ③ 교사 파면, ④ 교장 실책 인정 등을 내세우며 제2차 동맹휴교 투쟁을 벌였다.

[결과]

대구고보폭압정책반대동맹을 둘러싼 동맹휴교 투쟁은 1928년 11월 무렵 대구경찰서 고등계에 의하여 학생 비밀결사가 발각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대구고등보통학교, 대구공립중학교, 대구농림학교, 대구상업학교, 계성학교, 교남학교 등에서 105명의 학생이 검거될 정도로 파장이 컸다. 1929년 8월 7일에 동맹휴교 투쟁과 관련하여 105명의 학생 가운데 29명이 대구지방법원의 재판에 회부되어 24명이 「치안유지법」 위반 및 「폭력 행위에 관한 처벌」 위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의의와 평가]

대구고보폭압정책반대동맹은 1920년대 전반기의 불철저한 이념과 산발적 맹휴 투쟁에서 벗어나 민족운동을 한 단계 도약시키고, 학생운동 역량 강화에 이바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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