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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5221
한자 敎育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삼조

[정의]

근현대 시기 대구광역시 교육의 역사와 현황.

[개항기]

1. 대한제국기[1899~1904]

대구의 교육은 1894년 갑오개혁 후 1904년까지 발표된 교육 관련 법규에 따라 대구 지역도 소학교가 설립되었는데, 1896년에 경상북도 관찰부 공립소학교가 생겼다. 배우는 과목은 독서와 작문, 습자, 산술, 지리, 역사, 체조, 외국어 등으로 구성되었다. 1906년 학부령에 의해 대구공립보통학교로 변경되었다.

독립협회는 민중의 지식을 개발하고 민권을 성장시켜야 국가 경쟁과 민족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독립협회는 교육 보급, 『독립신문』 발간, 만민공동회와 같은 민회 운동을 전개하며 민중을 계몽시키는 한편 서울에 흥화학교를 세우고 각 지방에 흥화학교 지교를 설립하였다.

대구에는 1899년 6월 최처규의 주도로 흥화학교 대구지교가 설립되었다. 흥화학교 대구지교는 전 장교청(將校廳)을 수리하여 교사로 사용하였고, 학생 40여 명을 선발하여 영어·산술·지리·역사 등을 가르쳤으며 초등교육보다는 중등교육을 지향하였다. 1911년 서울 흥화학교가 폐지되어 흥화학교 대구지교도 이 무렵 폐교된 것으로 보인다.

1899년 4월 공포된「중학교 관제」에 따라 1899년 7월 경상감영 안 관아 터에 사립 달성학교가 개교하였다. 윤필오·장규원·추교정 등 10인이 발기를 하였고, 초대 교장은 경상북도관찰사 김직현, 부교장은 장규현[1900년 10월부터 윤필오]이었다. 달성학교의 학제는 심상과(尋常科)와 고등과(高等科)로 편성되었고 산술·화학·만국지리·동양사·서양사·지리·체조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달성학교 심상과는 1905년 8월 27일 대구공립소학교[현 대구초등학교]로 인계되었고, 달성학교 고등과는 1909년 3월 8일 협성학교로 흡수되었다. 협성학교는 1916년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 전신]에 병합되었다.

한편 대구 지역에 정착한 개신교 선교사들도 일찍부터 중등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1900년 설립된 대남소학교[현 대구종로초등학교]와 1902년 설립된 신명여자소학교[현 신명여자중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졸업을 하면서 중등 교육기관의 설립이 대두되었다. 1906년 5월 제임스 에드워드 아담스[안의와] 목사는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내에 중등 교육기관인 계성학교[현 계성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신입생 27명을 받았다. 1907년 10월 헨리 먼로 브루엔[한국명 부해리(傅海利)] 선교사의 부인 부마태(傅馬太)[Mrs Martha, S, Bruen]는 동산 선교 기지에 중등 교육기관인 신명학교[현 신명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2. 애국계몽운동기[1905~1910]

대구의 교육 운동과 계몽운동은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대구광학회(大邱廣學會)와 같은 애국계몽운동 단체가 설립되면서 본격화되었다. 대구 지역 애국계몽운동 단체와 회원들은 교육을 보급하여 민지(民智)를 개발하고, 민기(民氣)를 진작시켜 국권 회복을 이루고자 하였다.

대구 지역 전현직 관리, 거대 상인, 지주층, 개화 유교 지식인 등 대구 지역 유명 인사들이 1906년 1월 대구광문사를 설립하였다. 대구광문사는 ‘흥학설교(興學設校)’를 목표로 교육 진흥을 펼쳤다. 당시 경상북도관찰사 이근호대구광문사가 설립되자 교과서 및 잡지 인쇄를 후원하였다. 1906년 2월 유생 김호규 등 대구광문사 회원들은 경상감영낙육재와 양육재 두 서재에 사립 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교장은 김광제, 교사는 외국의 고등 학문을 배운 사람으로 채용하고자 하였다.

이근호에 이어 경상북도관찰사로 부임한 신태휴(申泰休)대구광문사와 함께 학교 설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06년 3월 고종의 ‘흥학조칙(興學詔勅)’과 신태휴의 ‘흥학훈령(興學訓令)’이 반포되면서 대구를 비롯한 경상북도 지역에 본격적으로 학교 설립이 이루어졌다. 대구광문사는 1906년 4월 총회를 열어 보다 적극적인 교육 진흥을 위하여 대구광문사 내 부속기관으로 대구광문사 문회를 설치하였다. 1907년 대구광문사는 대구광문사 문회를 대동광문회로 개편하여 계몽운동과 교육 운동을 더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대동광문회대구광문사의 교육 운동을 지원하고, 대한자강회가 주장한 의무 교육제의 시행을 정부에 건의하기도 하였다.

1906년 8월 설립된 대구광학회 역시 흥학설교를 내세웠다. 대구광학회의 사무소는 이일우가 운영하던 우현서루(友弦書樓)였다. 이일우우현서루시무학당을 설립하여 학문이 뛰어난 사람을 학당장으로 초빙하고, 국내외의 서적·신문·잡지 등을 비치하였다. 우현서루는 도서관인 동시에 학교였다.

1911년 일제가 우현서루를 폐쇄하자 이일우는 강의원과 부인친목회[애국부인회]를 설립하였다. 강의원은 홍주일이 운영하였고, 부인친목회는 이상화의 어머니 김신자(金愼子)가 회장을 맡아 운영하였다. 1921년 9월 15일 홍주일(洪宙一)·김영서(金永瑞)·정운기(鄭雲騎) 등이 우현서루 건물에 정운기의 명의로 교남학원(嶠南學院)을 설립하였다. 1924년 5월 21일 교명을 대구 교남학교[현 대륜중고등학교]로 변경하면서 4년제 중등 교육기관으로 승격되었다.

계명 단체가 주도한 교육 운동에 동참하였던 인사들이 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는데 1906년 4월 낙육재와 연계재 소속 전토(田土)를 합쳐 달명의숙(達明義塾)을 세우고 이현주가 교장, 김광제 부교장 겸 강사, 장상철·윤영섭이 교감으로 역임하였다.

대한협회 대구지회 교육부장이었던 현경운은 1908년 5월 노동야학[노동야학교]을 세우고 교장을 맡았다. 1907년 서흥균과 오유창 등이 구학(舊學)은 신학(新學)의 근본이라 주장하면서 수창학교(壽昌學校)[현 대구수창초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08년 문성봉과 곽재헌은 나라의 개명(開明)과 보존을 위하여 영재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인수학교(仁壽學校)를 설립하였다.

1908년 대구 지역에서는 여성 교육을 위한 대구사립달서여학교가 세워졌다. 대구사립달서여학교는 설립한 지 1년 만에 학생이 50여 명으로 늘어나면서 교실이 부족하였다. 대구 지역 부인들은 여성 교육의 발전을 위하여 교육부인회를 조직하고 대구사립달서여학교의 학교 수리비를 보조하였다. 또한 달성친목회 역시 달성친목회 회관을 대구사립달서여학교에 빌려주기도 하였다. 달성친목회는 회관에 법률야학강습소를 설치하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의 강의록 수백 부를 가져와 교육하기도 하였다.

3. 대구 지역 근대 교육기관

1899년부터 1910년까지 대구 지역에 설립된 근대 교육기관은 흥화학교 대구지교, 달성학교, 시무학당, 교남학교, 양성학교, 일신학교, 양성여학교, 수창학교, 협성학교, 인수학교, 대구사립달서여학교 등의 사립학교와 농림학교·실업학교 등의 공립학교가 설립되었다. 1899년부터 1910년까지 대구 지역에서 세워진 사립학교는 자료의 한계로 학제가 초등교육인지 중등교육인지 불명확한 경우가 많이 있다.

[일제시대]

1. 초등 교육기관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 초등 교육기관은 공립국민학교 6개 교[대구덕산공립국민학교·대구수창공립국민학교·대구서부공립국민학교[현 대구서부초등학교]·대구달성공립국민학교[현 대구달성초등학교]·대구남산정공립국민학교[현 대구남산초등학교]·대구삼립정공립국민학교[현 대구삼덕초등학교]], 사립국민학교 5개 교[대구희도국민학교[구 희도보통학교]·대구효성국민학교[현 효성초등학교]·대구해성국민학교·대구복면국민학교[현 대구복명초등학교]·남명국민학교], 간이학교 4개 교[대구덕산공립국민학교 부설 봉산정간이학교·대구사창공립국민학교 부설 팔운정 간이학교·대구서부공립국민학교 부설 서부간이학교·대구남산공립국민학교 부설 남산정 간이학교]였다.

2. 중등 교육기관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의 중등 교육기관은 공립은 대구중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대구고등여자보통학교·대구상업학교·대구사범학교·대구농림학교가 있었으며, 사립에는 계성학교·교남학교·협성학교 등이 있었다.

[현대]

1. 초등 교육기관

1) 해방공간기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대구 초등학교 수는 20개 교였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초등학생이 다닌 1급 공립국민학교 5개 교가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학교와 학급 수는 일제강점기와 같은 반면 취학아동의 증가로 학교와 교사 수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2) 1950년대

1952년 6월 4일 교육자치제가 시행되면서 교육의 자주성·독립성·전문성을 가져와 교육의 발전이 가속화되었다. 또한 6개년 의무교육 추진 계획에 따라 취학률도 높아졌다. 1959년 대구광역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의 현황을 보면 국립 2개 교, 공립 42개 교, 사립 1개 교이며 총 44개 교였다. 1945년 광복 당시 20개 교와 비교하면, 15년 만에 두 배 정도 증가하였다.

3) 1960년대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부가 조국 근대화의 슬로건을 내걸고 ‘인간 개조 운동’을 교육에서도 강조하면서 1963년 2월 15일 교육과정의 전면 개편을 가져왔다. 또한 1964년 도 단위 교육자치제가 부활하면서 민족중흥과 국가 발전을 위한 교육이 강조되었다. 특히 1968년에는 ‘국민교육헌장’의 선포,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 등이 실시되면서 초등교육의 방향과 질적 변화가 크게 일어났다.

1960년대 후반기 초등교육은 양적으로 성장한 시기이다. 1960년대 대구광역시 국민학교의 현황을 보면, 1963년에는 39개 교, 1965년에는 40개 교, 1967년에는 46개 교, 1969년에는 55개 교로 증가하였다. 학교 수가 증가하였음에도 교실 수 부족 현상은 줄어들지 않았다. 특히 경상북도 인근 지역에서는 중등 교육기관 부족 현상으로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워지자 초등학교 때부터 전학을 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또한 이촌향도 현상이 본격화하면서 대구 지역의 초등학교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대안으로 3부제나 2부제 수업을 실시하여 학급 과밀화 현상과 학교 수 부족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4) 1970년대

1970년대에는 학교 수와 학생 수, 취학아동수 가 반비례하였다. 급속한 산업화로 도시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대구 지역의 학교 수와 학생 수는 증가하였다. 1970년에는 국립 2개 교, 공립 50개 교, 사립 4개 교 등 총 59개 교였고 학급 수는 2,024급이었다. 1979년에는 국립 2개 교, 공립 57개 교, 사립 4개 교 등 총 63개 교였으며 학급 수는 3,097급이었다. 10여 년간 학교는 4개 증가하였는데 학급 수는 1,073개가 증가함에 따라 학급 과밀화 현상이 해소되었다. 반면 가족계획의 홍보, 새마을운동과 경제성장에 따른 의식 변화에서 오는 출산 감소 등으로 취학아동 수는 줄어들었다.

5) 1980년대

1980년대는 7·30교육개혁 조치를 실시하여 교육 정상화와 과열 과외 해소에 역점을 두면서 초등교육의 질적 향상을 가져왔다. 1985년 교육개혁심의회는 교육의 당면 문제 해결과 교육의 선진화 구현을 위하여 교육 전반에 걸친 기본 정책과 장단기 교육 발전 계획을 수립하였다. 1982년을 기점으로 학급 과밀화 현상은 해소되고 있었지만 아직도 과밀학급이 많았다.

2부제수업 학교가 1981년에는 63개 교에서 1989년에는 75개 학교로 증가하였다. 학교 설립이 증가하였음에도 과밀화 현상이 해결되지 않은 배경에는 1960년대 이후 대도시 인구 증가로 인한 아동 수 증가, 학교 설립용 부지 확보의 어려움, 재정 부족 등으로 교육에 대한 투자가 미흡하였기 때문이다.

2. 중등 교육기관

1) 1940년대 중후반[1945년 8월 15일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대구 지역의 중등 교육기관은 총 13개 교였다. 공립은 대구공립농림학교, 대구여자중학교, 경북공립중학교, 대구공립중학교, 대구공립상업학교, 대구사범학교, 대구공립공업중학교, 경북여자중학교, 대구여자상업학교 등 9개 교, 사립은 계성중학교, 대륜중학교, 오산농림실수학교(五山農林實修學校), 대성중학교 등 총 4개 교가 있었다.

해방공간기에는 주로 일제강점기 일본인 중등 교육기관의 명칭을 변경하여 한국인 교육기관으로 편제하였다. 학제 역시 6-4-2~4-4제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중등학교 내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분리는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1946년 대구사범학교 심상과가 개편되어 경북대학교 부속중학교, 1946년 대구공립고등여학교는 대구여자중학교[현 대구일중학교], 1946년 대구공립중학교대구중학교, 1946년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는 경북여자중학교[현 경북여자고등학교], 1946년 오산불교학교는 능인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46년에는 영신중학교대건중학교, 1947년에는 영남중학교, 1949년에는 효성여자중학교, 1949년에는 효성여자고등학교가 신설되었다. 1940년 후반 대구 지역에는 모두 19개의 중등학교가 설립되었다. 한편 대구 지역에서는 전국 최초로 이영식 목사가 특수교육기관인 대구광명학교대구영화학교를 1946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49년까지 총 학교 수는 19개 교, 학생 수는 3만 2000여 명, 교원 수는 600여 명이었다.

2) 1950년대

1949년 12월 31일 「교육법」[법령 제86호]이 개정되어 1950년 3월 공포됨에 따라 교육제도가 6-3-3-4제로 확립되었다. 따라서 중등학교는 바뀐 교육제도에 맞는 교과과정으로 제정되어야 하였다. 이에 따라 1950년 28개 교였던 중등학교가 1959년에는 63개 교로 늘어났다. 중학교가 33개 교였고 학생 수 2만 3431명, 교원수 676명이었다. 고등학교는 30개 교였고 학생 수 2만 3,292명, 교원 수 746명이었다.

3) 1960년대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부가 조국 근대화의 슬로건을 내걸고 ‘인간 개조 운동’을 교육에서도 강조하면서 1963년 2월 15일 교육과정의 전면 개편을 가져왔다. 또한 1964년 도 단위 교육자치제가 부활하면서 민족중흥과 국가 발전을 위한 교육이 강조되었다. 특히 1968년에는 ‘국민교육헌장’의 선포, 1969년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 등이 실시되면서 중등교육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바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분리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1969년 말 대구 지역 중학교 현황을 보면 중학교는 36개 교, 교원 수는 1,198명, 학급 수 902명, 학생 수 5만 32명이었다. 고등학교 현황을 보면 인문 고등학교 20개 교, 교원 수 703명, 학급 수 389학급, 학생 수 2만 3519명이었다. 실업고등학교 수는 14개 교, 교원 수 602명, 학급 수 273학급, 학생 수는 1만 5961명이었다.

4) 1970년대

1970년대는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으로 교육에 대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시기였다. 특히 중등교육 평준화가 시작되면서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중학생이 급증하여 1972학년도에는 고등학교 입시가 더욱 심각해졌다. 일류 고등학교 입학 경쟁으로 과열 과외와 재수생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결국 1973년 2월 인문 고등학교는 학군제, 과정별 지원, 추첨 배정으로 선발한다는 고교 입시제도 개선 방안이 발표되었다. 대구는 인천·광주와 함께 1975년부터 적용되었다. 1970년 대구 역시 중학교 무시험제가 실시되면서 중학교 지원 학생을 고등학교가 전원 수용하여야 하였다. 신설 학교 부족으로 학급당 수용 인원이 평균 61~70명이었고, 고등학생을 전원 수용하지 못하여 1979년에는 고등학교 재수생이 약 4,000명에 이르렀다.

1979년 대구의 중학교 현황을 보면 중학교 43개 교, 교원 수 1,809명, 학급 수 1,290명, 학생 수 8만 8269명이었다. 1969년과 비교하면 중학생 수는 3만 3237명이 증가하였다. 대구광역시 인구가 100만에서 160만으로 증가한 것과 비교하면 중학교 진학률이 크게 높아졌다. 1979년 대구의 고등학교 현황을 보면 인문 고등학교 23개 교, 교원 수 1,312명, 학급 수 755학급, 학생 수 4만 6808명이었다. 실업고등학교는 17개 교, 교원 수 1,147명, 학급 수 674학급, 학생 수 4만 859명이었다. 대구 지역의 인구가 100만에서 160만으로 증가한 것과 비교하면 고등학교 진학률 역시 크게 높아졌다.

5) 1980년대~1990년대

1980년 7월 30일 학교교육 정상화 및 과열 과외 해소 법안 등을 포함한 7·30교육개혁 조치가 시행되면서 유치원,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에 대한 전면 개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1980년대 대구 지역 교육 현황을 보면 중학교 49개 교, 교원 수 2,127명, 학급 수 1,519학급, 학생 수 10만 4784명이었다. 1991년에는 중학교 75개 교, 교원 수 4,178명, 학급 수 2,333학급, 학생 수 12만 2518명이었다.

대구직할시교육위원회 발족 이래 교육여건 개선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한 결과 학급당 교원 수는 1.79명이었고, 학급당 수용 인원은 50.6명이었다. 한편 1980년대 대구 지역 고등학교 교육 현황을 보면 인문 고등학교 28개 교, 학급 수 905학급, 학생 수 5만 5218명이었다. 실업고등학교는 18개 교, 학급 수 763학급, 학생 수 4만 5,502명, 교원 수 2,798명이었다. 이외 특수학교가 모두 6개 교[공립 2, 사립 4]로 늘어났다.

[현황]

1. 학제별 분포

2021년 기준 대구 지역의 초등학교는 국립 2개 교, 공립 229개 교, 사립 4개 교이며 총 235개 교가 있다. 중학교는 국립 1개 교, 공립 100개 교, 사립 35개 교이며 총 136개 교가 있다. 고등학교는 국립고등학교 1개 교, 공립고등학교 43개 교, 사립고등학교 48개 교이며 총 92개 교가 있다.

지역별 초등학교는 중구 10개 교[국립 1, 공립 8, 사립 1], 동구 33개 교[공립 32, 사립 1], 서구 17개 교[공립 17], 남구 11개 교[공립 11], 북구 41개 교[공립 41], 수성구 34개 교[공립 33, 사립 1], 달서구 56개 교[국립 1, 공립 54, 사립 1], 달성군 33개 교[공립 33]가 있다.

지역별 중학교는 남구 7개 교[공립 4, 사립 3], 달서구 34개 교[공립 26, 사립 8], 동구 15개 교[공립 12, 사립 3], 북구 24개 교[공립 21, 사립 3], 서구 10개 교[공립 9, 사립 1], 수성구 23개 교[공립 14, 사립 9], 중구 5개 교[국립 1, 공립 1, 사립 3], 달성군 18개 교[공립 13, 사립 5]가 있다.

지역별 고등학교는 남구 7개 교[사립 6, 공립 1], 달서구 23개 교[공립 14, 사립 9], 동구 11개 교[공립 4, 사립 7], 북구 16개 교[공립 7, 사립 9], 서구 6개 교[공립 4, 사립 2], 수성구 17개 교[공립 7, 사립10], 중구 4개 교[국립 1, 공립 1, 사립 2], 달성군 8개 교[공립 5, 사립 3]가 있다.

2. 지역별 분포

2021년 기준 대구 지역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역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남구

공립초등학교 11개 교, 사립중학교 3개 교, 공립중학교 4개 교, 사립고등학교 6개 교, 공립고등학교 1개 교, 사립 특수학교 5개 교, 기타 학교 2개 교가 있다.

2) 달서구

국립초등학교 1개 교, 공립초등학교 54개 교, 사립초등학교 1개 교, 공립중학교 26개 교, 사립중학교 8개 교, 공립고등학교 14개 교, 사립고등학교 9개 교, 공립 특수학교 1개 교, 각종 학교 3개 교가 있다.

3) 동구

공립초등학교 31개 교, 사립초등학교 1개 교, 공립중학교 12개 교, 사립중학교 3개 교, 공립고등학교 4개 교, 사립고등학교 7개 교, 사립 특수학교 1개 교가 있다.

4) 북구

공립초등학교 41개 교, 공립중학교 21개 교, 사립중학교 3개 교, 공립고등학교 7개 교, 사립고등학교 9개 교, 공립 특수학교 1개 교가 있다.

5) 서구

공립초등학교 17개 교, 공립중학교 9개 교, 사립중학교 1개 교, 공립고등학교 4개 교, 사립고등학교 2개 교가 있다.

6) 수성구

공립초등학교 33개 교, 사립초등학교 1개 교, 공립중학교 14개 교, 사립중학교 9개 교, 공립고등학교 7개 교, 사립고등학교 10개 교, 공립 특수학교 1개 교, 기타 학교 1개 교가 있다.

7) 중구

국립초등학교 1개 교, 공립초등학교 8개 교, 사립초등학교 1개 교, 국립중학교 1개 교, 공립중학교 1개 교, 사립중학교 3개 교, 국립고등학교 1개 교, 공립고등학교 1개 교, 사립고등학교 2개 교가 있다.

8) 달성군

공립초등학교 33개 교, 공립중학교 13개 교, 사립중학교 5개 교, 공립고등학교 5개 교, 사립고등학교 3개 교, 공립 특수학교 1개 교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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