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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453
한자 書堂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충희

[정의]

대구 지역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사립 교육기관.

[개설]

서당은 향촌 사회에 생활 근거를 둔 사족(士族)과 백성이 주체가 되어 마을 기본단위로 설립한 초중등 단계의 사설 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에는 사족이 사는 마을이면 대부분 서당이 있었다.

대구의 경우에도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전경창(全慶昌)[1532~1585], 채응린(蔡應麟)[1529~1584], 정사철(鄭師哲)[1530~1593], 정구(鄭逑)[1543~1620], 곽재겸(郭再謙)[1547~1615], 서사원(徐思遠)[1550~1615), 손처눌(孫處訥)[1553~1634], 이주(李輈)[1556~1604], 유요신[1550~1618], 채몽연(蔡夢硯)[1561~1638], 손린(孫遴)[1566~1628], 류시번(柳時藩)[1569~1640], 도성유(都聖兪)[1571~1649], 최동집(崔東㠍)[1586~1661], 서사선(徐思選)[1579~1650] 등의 이름난 학자들이 대구의 여러 지역에 거주하며 유학(儒學)을 강론하여,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이 점차 많아지게 되었다. 그 결과 초학자들이 글자를 익히고 기본 경전을 배우는 서당이 점차 늘어났다.

조선시대에 대구 지역에 있었던 서당의 자취는 지금도 몇몇 지역에서 확인되는데, 산격동에는 ‘서당골’이라 불리는 지역이 있고, 동구 미대동에는 성재서당(盛才書堂)이 남아 있으며, 수성구 성동에도 고산서당(孤山書堂)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성재서당고산서당은 모두 대구광역시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산격동 서당골 마을]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지역에는 조선시대에 ‘서당골’이라고 불린 곳이 있었다. 서당골에는 조선시대에 달성서씨(達城徐氏) 집안이 세거하였는데, 마을에 어린이에게 글을 가르치는 서당이 많다고 하여 ‘서당골’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서당골은 지금의 구암서원(龜巖書院)이 있는 연암공원 산자락에서 신천이 있는 곳까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서당골 지역을 상하로 나누어 윗서당골이라 불리는 곳과 아랫서당골이라 불리는 지역으로 나누어 호칭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지역에는 지금도 달성서씨 집안의 후손이 살고 있고, 달성서씨가 관리하는 유서 깊은 건물들이 있다.

서당골마을 언덕 부분에는 1995년에 조선시대에 동산동에 있던 구암서원이 옮겨 와 있고, 아랫서당골 지역에는 체화당(棣華堂), 일신재(一新齋) 등의 건물이 있는데, 서당골마을에 세거하던 달성서씨와 관련된 건물들이다. 현재 대구광역시 북구청에서는 ‘연암서당골’이라 명명하고 안내도와 마을을 설명하는 안내판, 벽화 등을 설치하여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동구 미대동에 있는 성재서당]

성재서당팔공산 가는 길에 있는 공산터널을 지나자마자 왼쪽에 있는 미대동마을에 있다. 성재서당은 조선 인조 때의 선비인 채선견(蔡先見)[1574~1644]이 지은 성재정(成才亭)에서 비롯된 건물이다. 세월이 흘러 성재정이 퇴락하자 채선견의 증손인 채상정(蔡尙鼎)[1703~1782]이 1770년경에 중수하여 ‘성재서당’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동구 미대동성재서당이 생기게 되는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미대동마을이 조선 초부터 인천채씨(仁川蔡氏)들이 세거하는 집성촌이었는데 젊은 세대를 위한 강학소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성재서당의 출발점이 되는 성재정을 지은 채선견금호강 변에 소유정(小有亭)을 지은 채응린(蔡應麟)[1529~1584]의 아들인데, 미대동인천채씨 집안은 성재서당뿐만 아니라 검단동 왕옥산 산자락에 있던 소유정압로정도 소유하였던 가문이다.

성재서당은 1984년 7월 25일 대구광역시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건물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현판도 그대로 붙어 있다.

[수성구 성동의 고산서당]

고산서당수성구 성동의 성산(城山) 산자락에 있다. 고산서당은 서당이라는 존재가 모두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생겨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1570년 무렵에 생긴 고산서재(孤山書齋)가 1690년 무렵에 서원으로 승격하였다가, 1868년에 서원이 훼철되자 1879년에 고산서당을 건립하였다. 그러므로 고산서당에 모여 공부한 사람은 고산서원에 모이던 유림들이었다. 고산서당에 대한 기록을 모아 둔 『고산서당지(孤山書堂誌)』를 보면 경산 지역의 유림들은 고산서당강하계(孤山書堂講學稧)를 만들어 고산서당을 운영하였는데, 고산서당이 건립된 1879년부터 1965년까지 고산서당강학계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600여 명이나 된다.

고산서당은 1984년 7월 25일에 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었다. 고산서당 건물은 잘 보존되고 있으며, 2015년에 고상서당유림회는 고산서원(孤山書院)을 복원하기 위한 양해각서를 수성구와 체결하여 서원으로 복원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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