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40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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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技士 罷業 |
영어공식명칭 | Daegu Taxi Driver Strike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노광 |
[정의]
대구광역시 택시기사들이 사납금 인하, 부제 완화, 노조 결성 허용 등을 요구하며 벌인 파업.
[개설]
대구 지역 택시기사 파업은 불안정한 수입과 열악한 근로조건이 원인이라 할 수 있다. 통금이 해제되면서 사납금 인상으로 새벽 4시까지 운행해야 하고, 일정한 급료나 상여금 없이 사납금을 채운 나머지 돈으로 생계를 해결하므로 택시기사들은 생활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또한 제5공화국 출범으로 산별노조에서 단위 기업 노조로 전환하였으며, 택시회사의 방해로 노조가 어용화되면서 대화 통로가 차단되었다. 택시회사는 경영의 어려움을 택시기사들에게 전가하고, 농번기 철에는 수입 감소 보완책으로 사납금 3,000원을 인하시켰으나 1984년에는 그런 조치가 없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평소 택시기사들이 가지고 있던 불만이 폭발하면서 대구 택시기사 파업이 일어났다.
[역사적 배경]
1980년대 초 노동운동은 저임금과 불평등의 심화라는 구조적 모순 속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공권력의 폭압적인 탄압, 어용노조, 회사의 일방적인 억압에 대응하는 폭력적인 노동운동이 특징이었다. 1983년 말부터 정부의 유화적인 조치로 노동운동이 살아났으며, 개헌 투쟁을 통하여 노동자는 정치적 관심을 갖기도 하였다. 노사분규를 원인별로 보면 임금인상과 단체협약 문제가 대부분을 이루는데, 특히 1989년 이후 근로자 복지 문제가 크게 대두되어 주택문제, 학자금, 복지시설 등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
[경과]
1984년 5월 25일 새벽 1시 대구시청 앞에서 택시기사 5명이 사납금 인하와 부제 완화를 관계 기관에 요구하자며 지나가던 다른 택시기사를 설득하자, 불과 3시간 만에 대구시청, 중앙 주유소, 대구역 등 중심가에 500여 명이 모였다. 오전 8시에는 900여 명이 운집하여 집단 농성하며 대구시청으로 몰려가 시장 면담을 요구하였다. 부재 중인 시장을 대신하여 부시장이 중재하면서 택시기사들이 면담을 요구한 대구택시운송사업조합 이사장 최용찬을 불렀다. 흥분한 기사들이 최용찬에게 폭언을 하자 피신하였다.
중부경찰서장의 설득과 12개 단위의 노조위원장 노력으로 택시기사 대표들과 부시장이 대화를 갖고 기사들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기로 약속하였다. 그때까지의 모든 문제[설득 과정에서 불응한 다른 기사의 택시를 파괴]는 불문에 부치기로 하고 오후 3시경 애국가와 만세를 부른 뒤 해산하였다.
택시운송사업조합 긴급이사회에서 사납금 4,000원 인하 등을 결의하자, 택시기사 60여 명이 최용찬 이사장에게 확답을 받기 위하여 제일택시 주차장에 모여 농성을 시작하였다. 전경대의 만류에 흥분한 기사들이 비번 택시 19대를 파괴하고, 이사장 집에까지 들어가 가재도구를 파괴함에 따라 모두 연행하여 구속되었고 2명 입건, 47명이 구류 처분을 받았다. 이후 동대구역 및 대구역 등지에서 구속 운전자 서명운동 및 석방 요구 농성을 벌였으나 경찰에 의하여 강제해산되었다.
[결과]
대구광역시청 상황실에서 대구택시운송사업조합 긴급 이사회를 열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결의하였다. 사납금 4,000원 인하, 토·일요일·공휴일 추가 사납금 2,000원 폐지, 10부제를 6부제로 완화, 예비군 훈련 시 기본급 지급, 차량 수리 시 운송 수입금 공제는 해당 차량의 운행 시간과 운송 수입금을 기초로 공제, 한시 사업자의 의료보험조합은 중앙에 건의, 한시 택시 종사원에도 퇴직금 지급, LPG 충전의 자율화는 택시 조합 총회 개최 시 결정하기로 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구 택시기사 파업의 여파로 서울 및 부산에서 대규모 택시 시위가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확산 일로에 있었다. 이에 택시 사업주들이 자진하여 노사협의회를 열어 사납금 인하와 노동조건의 부분적인 개선에 협의하기 시작하였으며, 노동조합 설립도 급증하였다. 이후 택시기사 월급제의 계기가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