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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총파업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029
한자 三月 總罷業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노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7년 3월 22일연표보기 - 3월 총파업 시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7년 3월 22일 - 24시간 시한부 파업
성격 노동운동|노동쟁의
관련 인물/단체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민주주의민족전선

[정의]

1947년 3월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주도한 24시간 시한부 총파업.

[개설]

1947년에 접어든 후에도 남한의 사회경제 정세는 호전되지 않아 쌀 부족으로 인한 기근과 실업문제 등이 전년도 못지 않게 심각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는 농민, 노동자에 의한 관청, 경찰서 습격과 같은 폭동을 수반한 3월 총파업을 시작하였다. 1947년 3월 22일 10시를 기하여 서울을 비롯한 남한 주요 도시에 있던 철도 기관구, 체신기관, 기타 많은 공장과 기업체들이 일제히 24시간 시한부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의 요구 조건은 생활 확보, 구금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간부 석방, 테러 박멸, 국대안 반대 등이다. 대구 지역에서는 남조선 전기회사, 수도시설, 철도 기관구, 우편국의 일부, 방직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안동에서도 철도 등 몇몇 기관이 파업에 참가하였다. 대구에서 철도 기관구의 승무원은 대부분 결근하여 열차 운행에 지장을 초래하였으며, 안동에서는 붉은 삐라를 역에 살포하였다.

[역사적 배경]

1947년 2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는 제2차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신임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미군정 당국은 집행위원과 지방 대표 등 51명을 검거하여 군정 재판에 회부하였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는 미군정의 조치에 항의하여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상임위원회와 산하 각 산업별 노조 대표들의 연명으로 미군정 당국에 노동운동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3월 초순에 미군정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집행위원장인 허성택, 부집행위원장 박세영을 비롯한 간부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또한 3·1절에 평화시위를 하던 제주 도민에 대한 미군정의 발포로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 산하 각 정당, 사회단체는 ‘테러폭압반대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서울 시민 대표 1,567명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참여한 ‘테러방지인권옹호시민대회’를 개최하였다.

[경과]

1947년 3월 10일 미국 국무부 차관보 존 힐드링이 미국의 남한 독립 정부수립 계획을 시사하였다. 3월 12일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이 트루먼독트린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그리스와 터키 등 공산주의 세력이 넘보는 국가에 미국의 군사적·경제적 원조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1947년 3월 22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중심으로 결성된 ‘남조선해고폭압반대투쟁위원회’의 주도 하에 남한 전 지역에서 24시간 동안 ‘3·22총파업’이 벌어졌다. 3월 23일 경찰은 3·22총파업을 계기로 좌익 인사 대규모 검거에 돌입하여 김원봉, 김문수, 박문봉, 전영규 등의 좌익 인사들이 검거되거나 수배되었다. 1947년 3월 30일 세계노동조합연맹[WFTU] 대표단이 한국 노동운동 현장을 시찰하였다. 세계노동조합연맹 대표단은 한국에 노동운동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간주하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한국의 노동운동 중심 단체로 인정하였다.

[의의와 평가]

3월 총파업9월 총파업보다 더 조직적이며 정치적이었으나, 규모 면에서는 미약하였다. 3월 총파업은 해방 이후 국내정세가 미군정의 장기화와 단독정부 수립이 전망되는 상황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등 좌익 세력이 미군정에 반대하는 방침에 따라 노동조합에서도 본격적으로 정치투쟁을 함으로써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3월 총파업의 결과 약 2,000여 명에 달하는 관계자들이 검거되는 조직의 손실이 있었고, 이로 인하여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조직력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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