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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953
한자 張炳天
영어공식명칭 Jang Byeongcheo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3년연표보기 - 장병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2년 1월 - 장병천 『신생활사』에 투자
활동 시기/일시 1922년 2월 - 장병천 신인동맹회 결성
몰년 시기/일시 1923년연표보기 - 장병천 사망
출생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사회운동가
성별 남성
본관 인동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사회운동가.

[개설]

장병천(張炳天)[1903~1923]은 1903년 대구에서 장길상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이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사회주의를 접하고 사상단체인 신인동맹회를 결성하였다. 소설 『강명화실기』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활동 사항]

장병천은 1922년 1월 박희도·이승준 등의 발기로 간행된 잡지 『신생활사』에 자금을 투자하였다. 1922년 2월 이영·심상완·신일용 등과 함께 “인류 생활의 공존 공영적 진리를 파악하여 민중문화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단체 신인동맹회를 결성하였다. 신인동맹회는 1922년 3월 말 사상 단체 무산자동지회와 합병하여 무산자동맹회가 되었다. 특히 장병천은 서울회계 사회주의자 이영과 친밀하게 지냈다.

장병천은 소설 『강명화실기』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강명화실기』에 따르면 평양 기생 강명화와 연인 사이였다. 그러나 전통적 신분을 고려할 때, 장병천과 강명화의 사랑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당시 봉건적 신분관과 사회적 처지의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장병천의 강명화에 대한 사랑은 깊어 갔다. 장씨 집안의 강한 반대, 사회적 질시는 장병천과 강명화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 주었다. 결국 강명화가 자살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강명화를 잊지 못한 장병천 또한 1923년 10월에 아픔을 이기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고 한다. 장병천의 나이는 20세에 불과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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