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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892
한자 李元式
영어공식명칭 Lee Wonsi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3년 2월 15일연표보기 - 이원식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8년 - 이원식 대구사범대학 특과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49년 12월 - 이원식 국민보도연맹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60년 - 이원식 경북피학살자유족회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62년 2월 9일 - 이원식 특수 반국가행위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활동 시기/일시 1970년 3월 11일 - 이원식 출소
활동 시기/일시 1975년 8월 9일 - 이원식 사회안전법 보안감호처분으로 재수감
활동 시기/일시 1977년 8월 9일 - 이원식 출감
몰년 시기/일시 1978년연표보기 - 이원식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1년 3월 10일 - 이원식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 판결
출생지 성내동 - 경상북도 김천시 성내동
학교|수학지 영천공립보통학교 - 경상북도
학교|수학지 수창공립보통학교 - 대구광역시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대구사범대학 - 대구광역시 지도보기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사회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경북피학살자유족회 대구피학살자유족회 대표위원

[정의]

4·19혁명 시기 대구에서 활동한 사회운동가.

[개설]

이원식(李元式)[1913~1978]은 1913년 2월 15일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성내동에서 태어났다. 한의사, 의사, 서지학자, 문화평론가 겸 저술가, 수학자, 에스페란토어 학자 등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이원식은 1922년 4월 1일 영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25년 대구 수창공립보통학교[현 대구수창초등학교] 4학년으로 전입하여 1928년 3월 18일 졸업하였다. 이후 1928년 대구사범학교 특과에 입학하여 1931년 4월 졸업하였다.

[활동 사항]

이원식대구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0년 8월 현준혁의 지도로 한글보급운동을 펼쳤다. 졸업 후 영덕 병곡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 1932년 면직되었다. 1943년 의원을 개설하는 한편 조선서물동호회(朝鮮書物同好會) 회원, 일본장서표협회(日本藏書票協會) 회원 등을 지냈다.

이원식은 광복 후 경북치안유지회 운동부장, 경북치안유지대 특별위원, 조선문화사학동맹 위원장, 사회민주당 집행위원, 대구시인민위원회 문교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7년 2월 『민성일보』에 정부 비판 논문을 발표한 관계로 약 2개월 동안, 1948년 11월 무렵 전시 의무노조 사건으로 약 3개월 동안 경북경찰국에 각각 구속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49년 12월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고, 한의업을 개업하면서 경북문협조사부장 등에 근무하였다. 이 밖에도 대구박물관 설립 대표위원, 조선문화연구소 설립 등의 활동을 펼쳤다. 이원식한국전쟁 직후 대구형무소 수감자에 대한 학살이 자행될 때, 부인이 가창골에서 희생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원식은 1960년 6월 15일 이삼근·이복영·이효철 등과 함께 대구역 앞 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유족 및 일반 시민 약 500명이 집합한 가운데 경북유족회결성대회에서 사회를 진행하였으며, 조사위원 겸 대구유족회 대표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삼근·이복영·이효철·김현구 등과 함께 경북지구피학살자합동위령제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1960년 7월 28일 대구역 광장에서 유족 및 일반 시민 약 2,000명이 운집한 가운데 경북피학살자유족회 합동위령제를 개최하였다. 위령제는 이원식의 사회로 제문 낭독 및 분향, 이삼근의 선언문 낭독, 김현구의 위령제 발기 취지문, 이복영의 추도사 낭독으로 진행되었다. 이원식권중락·이복영·이삼근 등과 함께 1960년 8월 20일 경북피학살자유족회 사무실에서 ‘합동묘패건립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여기에서 이원식의 제안으로 성문된 ‘민족의 원수 밑에서 조국과 민족의 자주독립을 염원하다가 무참히 희생된 동포들을 위하여 묘패를 건립한다’는 취지문을 채택하였다. 1960년 9월부터 대구 수창동·지묘동·송현동·본리동·만촌동 등지를 답사하고, 인명 조사 및 사인 불상의 유골을 발굴하는 활동을 벌였다. 아울러 합동묘패건립취지서를 신문에 광고하거나 정부 각 기관, 지방 유지를 찾아 묘패 건립 기금을 모집하였다. 이원식은 1960년 10월 20일 서울 종로 견지동 전 자유당 중앙당 부회의실에서 경상남북도 각 시군유족회 대표 50여 명과 함께 전국피학살자유족회 결성대회를 개최하였다. 이원식은 사정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원식은 1960년 10월 말 경주지구유족회가 군경유가족회와 충돌하자 권중락·이복영·김현구·이효철 등과 함께 경북유족회원 60명을 버스로 인솔하여 경주 군경유가족회원과 경찰에 항의하고 돌아왔다. 이원식권중락과 함께 ‘이 독재의 앞잡이 살인마들을 처단하려는 유족회의 활동을 방해하는 자 누구냐’는 취지의 성명서를 작성하여 언론기관과 각 혁신정당 사회단체에 배포하였다. 이원식은 1960년 11월 4일 대구시 사일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사일동] 자신의 집에서 대구유족회간부회의를 개최하고, 유족회 회보 『돌꽃』을 발행하여 유족들에게 보급할 것을 제의 결정하였다. 1960년 11월 13일 이삼근·이효철·김현구 등과 함께 경주시 월성국민학교에서 경주지구유족회 주최로 거행된 합동위령제에 경북유족회원 50명을 인솔하여 참가하고, ‘처형된 영령을 한없이 추도한다’는 취지의 애도사를 낭독하였다.

이원식은 5·16군사쿠데타 이후 군사 정권에 의하여 피학살자유족회 운동을 전개한 것이 빌미가 되어 1962년 2월 9일 혁명재판부에 의하여 특별법 제6조 특수 반국가행위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후 감형되어 무기수로 복역하다 1970년 3월 11일 출소하였다. 1975년 8월 9일 사회안전법 보안감호처분으로 재수감되어 1977년 8월 9일 출감하였고 1978년 사망하였다.

이원식은 2011년 3월 10일 대법원의 재심 판결에서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에 대하여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아 명예를 회복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원식은 「광명은 빈민촌에서-우리는 여기에 힘을 다하자-」[『조선일보』, 1930], 『한방의학어해설』[대구동양이학전문학원, 1954], 『세계과학문화사연표』[현대출판사, 1955], 『씨뿌린 사람들』[사호사, 1959], 『역주 신교주해상한론』[범호사편집부, 1962]를 지었고 미간행본으로 1964년부터 1965년에 지은 『조국이 부르는 벽밑에서-나는 사형수였다-』를 비롯하여 『세계수학혁명선언』[연도 미상, 미간행] 등의 저술을 남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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