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4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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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信用 |
영어공식명칭 | Kang Siny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수학 시기/일시 | 1927년 - 강신용 일본 간사이대학 상과 1년 중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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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45년 - 강신용 서울 중앙신문사 인천지사장, 조선일보사 인천지사장, 국도신문 대구지사장 등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10월 - 강신용 대구일일통신사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12월 - 강신용 경북민족통일연맹 가입, 외무위원회 교섭부장 선임 |
거주|이주지 | 강신용 거주지 - 대구광역시 수성구 삼덕동 476 |
학교|수학지 | 간사이대학 - 일본 오사카부 스이타시 |
활동지 | 경북민족통일연맹 - 대구광역시 |
성격 | 통일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대구일일통신사 사장 |
[정의]
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언론인이자 통일운동가.
[개설]
강신용(姜信用)[?~?]은 광복 후 언론인으로 종사하면서 평화와 자주의 민족 통일에 공감하여 경북민족통일연맹에 가입하여 교섭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61년 ‘3·1 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를 개최하여 가두시위를 전개하고, 2대 악법 반대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4·19혁명 시기에 언론 활동과 민족·민주운동을 전개한 민족통일운동가이다.
[활동 사항]
강신용은 1927년 일본에 유학하여 간사이대학[關西大學] 상과에 입학하였으나 1년 만에 중퇴하였다. 광복 후인 1945년 10월 경기도 인천에서 중앙신문사(中央新聞社) 인천지사장을 시작으로 인천신문사(仁川新聞社) 판매부장,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인천지사장, 비판신문사(批判新聞社) 인천지사장 등을 역임하며 언론 활동에 종사하였다. 그 뒤 서울 시사신문사(時事新聞社), 국제신보사(國際新報社) 등을 거쳐 국도신문사(國都新聞社)의 대구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 대구에서 언론 활동에 종사하였다.
강신용은 1960년 10월 대구에서 대구일일통신사(大邱日日通信社)를 설립하여 언론 활동을 펼쳤고, 12월 경북민족통일연맹(慶北民族統一聯盟)[민족통일경북도연맹]에 가입하여 외부위원회 교섭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경북민족통일연맹은 1960년 9월 무렵 만들어진 경북시국대책위원회를 확대 개편한 통일운동 단체였다. 1960년 11월 12일 경북시국대책위원회가 개최한 통일문제 시국 대강연회 직후 결성되었다. 강신용이 참여한 경북민족통일연맹은 1961년 2월 혁신 세력의 통일적 연합체로 결성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에 가입하여 전국적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강신용은 1961년 2월 25일 경북민족통일연맹 상임집행위원회에 참석하여 3월 1일에 3·1운동 기념일을 맞아 달성공원에서 ‘3·1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평화 통일에 관한 강연과 선전문을 살포할 것을 결의하였다. 강신용은 대회 개최를 위하여 대구시청을 방문하여 장소 사용 허가를 받아냈다. 이 대회에 3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연사들이 남북 교류를 통한 민족 통일을 주장하는 연설을 진행하였다. 대회 후 참가자들과 함께 달성공원을 나와 북성로와 중앙통을 거쳐 반월당까지 “통일만이 살길이다”라는 구호를 외치고, 선전물을 뿌리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3월 24일에는 대구역 광장에서 학생들이 개최한 ‘2대 악법 반대 규탄대회 및 횃불시위’에 참가하였다.
5·16쿠데타가 발생한 뒤 경북민족통일연맹 사건으로 군사혁명재판소에 넘겨져 1962년 1월 9일에 열린 재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