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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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有謙 |
영어공식명칭 | Lee Yukyum |
이칭/별칭 | 수익(受益),만회(晩悔)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일주 |
[정의]
조선 후기 대구부사를 역임한 문관.
[가계]
이유겸(李有謙)[1586~1663]의 본관은 우봉(牛峯)이며. 자는 수익(受益), 호는 만회(晩悔)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사의 이심(李諶)이고, 할아버지는 관찰사 이지신(李之信)이다. 아버지는 이할(李劼)이고,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활동 사항]
이유겸은 1586년(선조 19)에 태어났다. 만귀(晩歸) 조수륜(趙守倫)과 우계(牛溪) 성혼(成渾)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을 스승으로 섬겼다. 광해군 때 조수륜이 화를 당하여 죽었으나 아무도 아는 체하지 않자 친히 장례를 예식대로 집행하였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비시키려고 하자 잘못을 직언하기도 하였다.
이유겸은 1623년 인조반정 뒤 유일(遺逸)로 6품직인 신녕현감에 제수되었다. 신녕현감 재임 시 모략을 받자 백성들이 자진해서 포(布)를 상납하여 죄를 풀고자 할 정도로 정사를 잘 처리하였다. 그 뒤 공조좌랑·함흥판관 등을 지냈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으나 패배하였다. 1639년에 순창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고, 대구부사와 성주목사, 호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지방관으로 재임하였을 때 학덕과 연륜이 높은 선비들을 모셔서 술을 대접하고 기영회(耆英會)를 만드는 등 향촌 교화에도 힘썼다. 1663년(현종 4) 12월 20일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유겸의 저술로는 『만회유고(晩悔遺稿)』가 있다.
[상훈과 추모]
이유겸은 1688년에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과 1788년(정조 12) 순창의 지계서원(芝溪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