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3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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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尙眞 |
영어공식명칭 | Lee Sangjin |
이칭/별칭 | 천득(天得),만암(晩庵),충정(忠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병호 |
출생 시기/일시 | 1614년 - 이상진[李尙眞]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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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45년 - 이상진[李尙眞] 별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52년 - 이상진[李尙眞] 사헌부지평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54년 - 이상진[李尙眞] 사간원정언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60년 - 이상진[李尙眞] 경상도관찰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78년 - 이상진[李尙眞] 우의정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89년 - 이상진[李尙眞] 유배 |
몰년 시기/일시 | 1690년 - 이상진[李尙眞] 사망 |
출생지 | 전주 - 전라북도 전주시 |
거주|이주지 | 부여 - 충청남도 부여군 |
부임|활동지 | 경상감영 -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99[포정동 21] |
유배|이배지 | 종성 - 북한 함경북도 종성군 |
유배|이배지 | 북청 - 북한 함경남도 북청군 |
유배|이배지 | 철원 - 강원도 철원군 |
묘소|단소 | 이상진[李尙眞] 묘소 -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 1-1 |
사당|배향지 | 장보서원 - 전라북도 전주시 |
사당|배향지 | 한계서원 - 전라북도 전주시 |
성격 | 문관 |
성별 | 남성 |
본관 | 전의(全義) |
대표 관직 | 경상도관찰사|우의정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이상진(李尙眞)[1614~1690]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는 천득(天得), 호는 만암(晩庵)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부윤 이정란(李廷鸞)이고, 할아버지는 이준길(李遵吉)이다. 아버지는 사직서참봉을 지낸 이영선(李榮先)이고, 어머니는 공조참판 민여임(閔汝任)의 딸 여흥민씨(驪興閔氏)이다. 부인은 현령 김적(金迪)의 딸 연안김씨(延安金氏)이며,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이상진은 1614년(광해군 6)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태어났다. 1645년(인조 23)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1652년(효종 3)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1654년 사간원정언으로 있을 때에는 당시의 시사(時事)를 여러 차례 직언하여 왕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이후 이조참판·대사간을 역임하고 1660년(현종 1) 겨울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이상진은 경상도관찰사 재임 시 대동법으로 일어난 송사 판결을 신속하고 조리 있게 처결하였고, 인재를 뽑아 쓰고 탐관오리를 숙청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목민관으로서의 칭송이 도내에 자자하였다고 한다. 관풍루(觀風樓)의 기문을 짓기도 하였다.
이상진은 1678년(숙종 4) 이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하였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1683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1689년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위의 부당함을 간하다가 숙종의 진노를 사 종성·북청·철원 등지로 귀양을 갔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부여에 있는 옛집에서 우거하다가 1690년 사망하였다.
[묘소]
이상진의 묘소는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 1-1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상진은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695년 청백리에 녹훈되었고, 전주에 있던 장보서원(章甫書院)과 한계서원(寒溪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