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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292
한자 徐元履
영어공식명칭 Seo Wonri
이칭/별칭 덕기(德基),화곡(華谷),견지(見志)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병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96년연표보기 - 서원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27년 - 서원리 생원·진사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631년 - 서원리 세자익위사세마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39년 - 서원리 왕자사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56년 - 서원리 경상도관찰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58년 - 서원리 강화유수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62년 - 서원리 함경도관찰사 부임
몰년 시기/일시 1663년 4월 23일연표보기 - 서원리 사망
부임|활동지 경상감영 -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99[포정동 21]지도보기
묘소|단소 서원리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거사리
성격 문관
성별 남성
본관 달성(達城)
대표 관직 경상도관찰사|호조참판

[정의]

조선 후기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문관.

[개설]

서원리(徐元履)[1596~1663]의 자는 덕기(德基), 호는 화곡(華谷) 또는 견지(見志)이다.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1627년(인조5) 생원·진사시에 연달아 합격했으나, 문과에는 거듭 실패하여 음보(蔭補)로 1631년(인조9) 세자익위사 세마(洗馬)에 임명되었고, 3년 만에 부솔(副率)에 승진되었다가, 얼마 뒤에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師傅)로 선임되었다.

[가계]

서원리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한 조선 전기의 문신 서해(徐嶰)[1537~1559]의 증손으로, 조부는 병조판서를 역임한 서성(徐渻)[1558~1631]이고, 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서경우(徐景雨)[1573~1645]이며, 어머니 창녕성씨(昌寧成氏)는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성염(成恬)의 딸이다. 선조의 부마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1579~1643]의 조카이고, 영의정 서문중(徐文重)[1634~1709]의 양부이다.

[활동 사항]

서원리는 1596년(선조 29)에 태어났다. 1627년(인조 5) 생원·진사시에 연달아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거듭 실패하여 음보(蔭補)로 1631년 세자익위사세마에 임명되었다. 1634년 부솔(副率)로 승진하였고, 1639년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로 선임되어 청나라 심양관(瀋陽館)에서 봉림대군을 보좌하다가 돌아와 공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이후 공조정랑을 거쳐 청도군수로 나갔다가 연달아 배천군수에 임명되었다. 1651년(효종 2)에는 천안군수로 부임하여 새로 제정한 대동법(大同法)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였다.

서원리는 1656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효종의 북벌 계획에 따라 군정(軍政)을 쇄신하였다. 경상도관찰사 재임 당시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금호강 변에 있었던 소유정(小有亭)에 제영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서원리는 1658년 강화유수로 나가 효종의 북벌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후 한성부우윤과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62년(현종 3) 궁가(宮家)에서 마련한 궁방전(宮房田)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파직되었고, 겨울에 함경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663년 4월 23일에 함흥부(咸興府)의 관사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서원리의 묘소는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거사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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