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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동 중화양씨 세거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230
한자 池山洞 中和楊氏 世居地
영어공식명칭 Residential place of Junghwa Yang clan in Jishan-dong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지산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가구수 200여 가구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지산동에 있는 중화 양씨 세거지.

[개설]

중화양씨(中和楊氏)의 시조는 고려 고종(高宗) 때 정승을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당악군(唐岳君)에 책봉된 양포(楊浦)이다. 당악은 중화의 옛 이름으로, 이후 후손들이 중화를 본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었다. 이후 양포의 6세손인 양백지(楊百枝)가 고려 말에 서경천호(西京千戶)를 지내며 평양에 자리 잡은 이래 후손들이 주로 평양을 중심으로 세거하였다.

[명칭 유래]

‘지산(池山)’이라는 명칭은 치산(雉山)에 살던 정경세(鄭經世)가 모산골[현 능인고등학교 일대]에 당시 대구에서 가장 큰 못[池]을 만들어서 ‘지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명칭 유래는 수성구 범물동에 있는 천주교 성당 주변 산의 형세가 매의 주둥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매봉지’라고 불렸는데, 매 앞에서는 꿩이 꼼짝도 못한다고 하여 ‘치(雉)’ 자를 ‘지(池)’ 자로 바꾸어 지산동으로 불렀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중화양씨의 대구 입향 경위는 확실하지 않지만, 입향조는 조선 전기 대사간을 지낸 양희지(楊熙止)[1439~1504]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성종 9년[1478년] 6월 5일 자 기사에 따르면 “홍문관부수찬 양희지가, 노모가 경상도 대구부에 있기 때문에 귀양(歸養)할 목적으로 상장(上狀)하여 사직하였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양희지는 40세 이전에 이미 대구에 거주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양희지의 둘째 아들 양배선(楊拜善)옥산전씨 전중견(全仲堅)의 딸과 혼인하여 처의 고향에 살게 되면서 지산동 일대에 세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환경]

지산동의 자연부락으로는 조일골[朝日谷]·모산골[못안골]·무학산·약시걸·덕골·백전골[栢田谷][잣나무 밭이 있는 골]·죽리(竹里)[중리] 등이 있었다.

[현황]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5년 현재 중화양씨는 7,287명으로 조사되었다. 중화양씨수성구 지산동 세거지 외에 다른 지역의 집성촌은 알려지지 않았다. 지산동 중화양씨 관련 유적으로는 학산재(鶴山齋)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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