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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052
한자 蔡貴河 神道碑
영어공식명칭 Chaegwiha Sindobi[Goryeoguk Hojojeonseo Sijeonguigong Dauidang Chaeseonsaeng Sindobi]
이칭/별칭 고려국 호조전서 시정의공 다의당 채선생 신도비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비
지역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 1328
시대 고려/고려 후기,현대/현대
집필자 구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81년연표보기 - 채귀하 신도비 건립
현 소재지 의현사 -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 1328 지도보기
성격 신도비
양식 귀부(龜趺)|비신(碑身)|이수(螭首)
관련 인물 채귀하
재질 오석
크기(높이, 너비, 두께) 184㎝[높이]|62㎝[너비]|32㎝[두께]
소유자 인천채씨 대종회
관리자 인천채씨 대종회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에 고려 후기 문신 채귀하의 신도비.

[개설]

채귀하 신도비(蔡貴河 神道碑)[고려국 호조전서 시정의공 다의당 채선생 신도비(高麗國 戶曹典書 諡貞義公 多義堂 蔡先生 神道碑)]는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였던 다의당(多義堂) 채귀하[?~?]의 충절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1981년에 건립한 신도비이다. 대구 출신인 채귀하는 문과에 합격하여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역임하였다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를 지킴으로써 이른바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나중에는 황해도 평산 다의현(多義峴)에 들어가 생애를 마쳤다.

[건립 경위]

채귀하의 묘소가 황해도 평산에 있어 남북 분단으로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되자, 후손들이 1981년 금호강왕옥산(王屋山)의현사(義峴祠)를 건립하고 채귀하의 신도비를 세웠다.

[위치]

채귀하 신도비는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 1328번지의현사 광장에 있다.

[형태]

채귀하 신도비는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螭首)로 구성되어 있고 비신은 높이 184㎝, 너비 62㎝, 두께 32㎝의 크기이다.

[금석문]

비 전면에는 ‘고려국 호조전서 시정의공 다의당 채선생 신도비(高麗國 戶曹典書 諡貞義公 多義堂 蔡先生 神道碑)’라는 비제가 한자로 새겨져 있다. 한자로 새겨진 비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씨 조선의 혁명에 포은이 죽으니 공은 통곡하며 떠나야겠다고 하며 여러 아들에게 글을 써서 영에게는 고향에 돌아가 삼가 선조의 제사를 받들라고 하고, 부에게는 평양에 가서 부모와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게 하고, 동양과 명양은 내 뒤를 따르라 이르고 동지 제현들과 함께 부조현에 관을 걸고 두문동에 들어갔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72현 중의 한 분이다[及聖朝革命之際。圃隱死之。公痛哭曰可去矣。作書送子曰泳歸故鄕。謹奉先祠。浮去箕都。敬服父師遺敎。東陽, 明陽隨我後。乃與同志諸賢。掛冠于不朝峴。入杜門洞。世所稱七十二義士中一人也].”

[현황]

채귀하 신도비는 인천채씨 대종회에서 관리하고 있어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채귀하 신도비는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평생을 은거한 ‘두문동 72현’의 절의과 선조를 추모하는 정신을 잘 보여 주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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