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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절부 김씨 정려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039
한자 貞節婦 金氏 旌閭碑
영어공식명칭 Jeongjeolbu Gimssi Jeongnyeobi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비
지역 대구광역시 북구 구암로 47[관음동 1372]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전일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867년 - 정절부 김씨 정려비 김씨 출생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05년 - 정절부 김씨 정려비 김씨에게 정려 내림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947년 - 정절부 김씨 정려비 김씨 사망
건립 시기/일시 1947년 이후 - 정절부 김씨 정려비 건립 추정
현 소재지 관음공원 동편 등산로 입구 - 대구광역시 북구 구암로 47[관음동 1372]지도보기
성격 정려비
재질 청색 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110㎝[높이]|40㎝[너비]|18㎝[두께]
소유자 대구광역시
관리자 대구광역시 북구청|광주이씨 문중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관음동에 있는 정려비.

[개설]

정절부 김씨 정려비(貞節婦金氏旌閭碑)는 본관이 김녕(金寧)이며 김성연(金性淵)의 딸인 김씨[1867~1947]를 기리고자 세운 정려비이다.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김씨가 죽은 1947년 직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은 성리학자 기헌(寄軒) 조병선(曺秉善)이 지었다.

[건립 경위]

개항기인 1867년에 태어난 김씨는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이달윤(李達潤)과 혼인하였으나, 신랑이 초례석(醮禮席)에서 갑자기 병이 위독하여 행례(行禮)를 겨우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죽었다. 이에 김씨는 자결하려다가 사람들이 말려 미수에 그쳤다. 이후 자신의 신세를 운명으로 받아들여 죽은 남편의 염을 몸소 하고 빈소를 차려 대상을 치르고 시부모를 잘 받들며 살았다. 맏동서가 달이 덜 찬 미숙아를 낳자 받아서 자신이 길렀다. 아이가 아홉 살이 되던 해에 아이를 데리고 처음으로 친정에 갔는데 친정어머니가 다시 혼인하라는 뜻을 내비치자 그날로 시집으로 돌아왔다. 김씨는 아이에게 “시집을 가서 그 집을 세우지 못한 것이 너무 원통하다”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지자 1905년(고종 42) 정려가 내려졌다. 그 후 세금을 면제하고 몇 번 더 상을 주려고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여든한 살 되던 해 갑자기 병이 깊어지자 아들을 불러 “패물을 내 몸에 걸치지 말고 이대로 묻어 달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이에 이웃과 친척들이 김씨의 굳은 절개를 기리고자 비각을 세우고 정절부 김씨 정려비를 세웠다.

[위치]

정절부 김씨 정려비대구광역시 북구 관음동 1372의 관음공원 동쪽 등산로 입구 길가에 있다.

[형태]

정절부 김씨 정려비는 현재 비신만 드러나 있으며, 비석 덮개가 없는 반원 형태이다. 비신은 높이 110㎝, 너비 40㎝, 두께 18㎝ 규모이다. 정절부 김씨 정려비와 함께 비각도 세워졌으나, 이후 비각은 허물어지고 정려비만 남아 있다.

[금석문]

정절부 김씨 정려비에는 ‘정절부 김씨 정려비(旌節婦金氏旌閭碑)’라는 비제가 적혀 있고, 김씨에 대한 소개와 추모의 뜻 등을 한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 도의가 쇠퇴하자 염치를 상실하니, 사람이 짐승 같은 행동을 하고 금수처럼 더러운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가끔 부녀자 사이에는 통한을 머금고 죽음을 참으며, 스스로 그 절개를 지켜서 놀아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이는 어찌 국가가 배양한 공로가 아니겠는가? 스스로 그 절개가 어떻게 되는 줄도 모르지만, 사람의 살과 뼈에 스며듦을 또한 볼 수 있다. 사람의 성품이 본래 착한 것이어서 무식한 사람도 상실하지 않는 것을 내가 사는 고을의 절부 김씨에서 볼 수 있다./ 김씨는 김녕 사람인데, 아버지는 성연(性淵)이다. 여염집에서 생장하여 별로 배운 것이 없었다. 나이 열아홉에 칠곡면 관음리의 이달윤과 혼인을 정하였다. 달윤은 광주(光州) 사람인데, 아버지 재환(在煥)의 둘째아들이다. 초례석에서 갑자기 병이 위독하여 행례를 거우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죽었다. 김씨는 분상 통곡하고 자결하려다가 사람들에게 잡혀서 미수에 그쳤다. 이에 아픔을 참고 몸소 염을 하고 빈소를 차리고 제사를 드리고 다 손수 준비하여 소상과 대상도 같이했다. 시부모를 받들어 효도하면서 전혀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때 맏동서가 달이 덜 찬 둘째아들을 낳자 받아서 길렀다. 배고파하면 그의 젖으로 젖을 먹이고, 그 나머지 항상 업고 안고 하며 몸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 아이가 아홉 살 때에 처음으로 데리고 친정에 갔는데, 며칠을 머물지 못하여서 그의 어머니가 개가시킬 뜻으로 약간 빗대어 말을 하자, 대답하지 않고 그날로 시집으로 돌아와서는 문밖에도 발걸음을 하지 않고 항상 혼자 있으면서, 아이를 가리켜 말하기를 '어찌 한번 죽는 것을 아까워하랴? 가만히 인간 세상을 생각하니, 시집을 가서 그 집을 세우지 못한 것이 너무나 원통하다. 너는 장성하여 능히 내 말을 생각하겠는가?' 하였다. 동네 이장이 그 일을 들어 본군에 글을 올리고, 군에서는 도에 보고하고, 도에서는 나라에 보고하니, 광무(光武) 9년[1905년] 3월에 해당 부서로부터 정려의 첩지와 봉호가 내리고 군수도 돈과 쌀을 내렸는데, 이로부터 뒤로는 이러한 상품이 내려와도 받지 아니하였다. 호세를 면제하고 향리에서도 몇 차례 상을 매기고자 하였으나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으며, 부득이한 일이 있으면 아들을 시켜서 대신하게 하였다./ 나이 여든한 살에 갑자기 병이 깊어지자, 아들 모 씨를 불러 말하기를 “네가 이제 성년이 되었으니 나는 여한이 없다. 내가 받은 패물은 하나도 내 몸이 걸치지 말고 이대로 염을 하여라.” 말을 마치고 눈을 감으니, 곧 정해(丁亥)[1947년] 12월 22일이었다. 그 의리가 사람들을 무궁히 감동을 시켰다. 본가에서 장례 의식을 갖추고자 하였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자, 이에 이웃 마을과 인척들이 와서 서로 도와서 땅을 마련하여 비각을 세우고 비석에 글을 새겨 그 가문을 표창하였다. 나에게 글을 청한 자는 마을 사람 최인기(崔仁基)인데 역시 의리에 감동한 지이다. 이어 서 사를 지어 말한다./ 산에 돌이 있음이여 그것이 모두 옥은 아니라네. 들에 숲이 있음이여 그것이 모두 대가 아니라네. 옥이 귀함이여 그 박옥을 다듬지 아니하였다네. 대의 곧음이여 그 푸름을 바꾸지 않았다네./ 저 높은 집터여 그 사람의 그 아내라네. 향기로운 난초 패물이여 혜초 치마 깨끗하네. 이에 돌아감이여 도솔천에 귀의하리로다. 이 글의 진실이여 아낙네를 격려하리로다.”

[현황]

정절부 김씨 정려비는 현재 관음공원 동쪽 등산로 입구 길가에 비각이나 별다른 보호시설 없이 비석만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정절부 김씨 정려비는 현대에 세워진 정려비로 건립 시기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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