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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연맹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617
한자 眞友聯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5년 9월연표보기 - 진우연맹 조직
성격 무정부주의 단체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서 무정주의자들이 조직한 단체.

[설립 목적]

진우연맹(眞友聯盟)은 표면적으로는 친목과 수양을 표방하였지만 무정부주의 사상을 연구하고, 일제를 상대로 기관 테러와 요인 암살을 하고자 설립되었다.

[변천]

진우연맹은 1925년 9월 조직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23년 박열(朴烈)은 일왕을 암살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때 ‘박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지만, 예심에서 고소 면제를 받은 서동성(徐東星)은 고향인 대구로 돌아와 김소성(金召成)·방한상(方漢相)·서학이(徐學伊)·신재모(申宰模)·정명준(鄭命俊)·하종건(河鍾健) 등 7명과 함께 진우연맹을 조직하였다. 김정근(金正根)은 박열의 유지를 이어 홀로 도쿄에 머물면서 흑우회(黑友會)의 부흥에 힘썼다. 진우연맹이 조직되자 김정근은 대구로 와 진우연맹원과 만나 운동 방법에 대하여 논의하고 도쿄로 돌아갔다. 이후부터 신재모·방한상은 김정근과 편지로 운동 방법을 논의하였다. 1925년 11월 방한상·신재모 두 명은 도쿄에서 3개월 동안 머물면서 박열에게 의연금을 보내거나 일본인 무정부주의자들과 내왕하였다. 이때 방한상은 구라모토 웅유[椋本運雄]를 만나 진우연맹의 조직에 대하여 알렸다. 훗날 구라모토 웅유는 진우연맹이 파괴단을 만들자, 여러 차례 파괴단에게 직접 행동할 것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1926년 1월 12일 진우연맹 창립 당시 연맹원 서동성·신재모·방한상·서학이·정명준·하종건·김소성마명(馬鳴)·우해룡(禹海龍)[우해운(禹海雲)안달득(安達得) 등 창립 후 가입한 연맹원 총 10명은 대구부 신정 이금이[신재모의 부인] 집에서 기관 테러와 요인 암살을 계획하였다.

첫째, 대구부 내 도청·경찰서·우체국·대구지방법원·대구복심법원을 비롯한 주된 관청, 대구의 상업 중심지인 원정 1정목의 점포를 파괴한다.

둘째, 도지사·경찰부장·기타 관청의 수뇌자의 암살을 단행한다. 이를 위하여 진우연맹원들은 새로 파괴단을 조직하고, 선언·강령을 만들었다. 또한, 참석한 전원 모두 서명과 손도장을 하고, 구체적인 행동 날짜와 방법을 차후 결정하기로 합의를 내렸다. 훗날 김동석(金東碩)도 파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신재모대구역에서 경성으로 출발하는 구리하라 가즈오[栗原一男]에게 파괴단의 조직 결성과 활동 계획에 대하여 알렸다.

파괴단원들은 대구의 주요 관공서 파괴와 요인 암살에 필요한 폭탄을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민중사(民衆社)의 고백성(高白性)으로부터 입수할 계획을 세웠다. 경상남도 함안 출신의 고백성은 방한상에게 무정부주의 단체를 증설하고, 중국 상하이에서 원동무정부주의자총연맹이 성립되면 진우연맹원도 가입하라고 권유하였다.

1926년 4월 일본의 무정부주의자 구리하라 가즈오가 박열이 사형당하였을 때 시신 인수에 필요한 위임장과 가네코 후미코[今子文子]의 입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박열의 형 박정식(朴延植)을 만나러 대구에 왔다. 진우연맹원 신재모·서학이·마명·우해룡·정명준 등 5명은 구리하라를 만나 흑색청년연맹[흑색연맹]이 1926년 1월 일본 도쿄 긴자통에서 상점을 파괴한 활약상을 듣고, 구리하라가 흑색청년연맹에 가맹을 권유하자 모두 가입하였다. 1926년 5월 김정근은 반역아연맹(叛逆兒聯盟)이 흑우회에게 배부한 ‘반역아연맹선언서’ 9매를 신재모에게 보냈다. 신재모서학이·방한상·정명준과 함께 반역아연맹에 가입하였고, ‘반역아연맹선언서’를 마명에게 주어 진우연맹원이 회람하도록 건네주었다.

1926년 5월 말 일제 관헌은 진우연맹원의 활동을 예의 주시하다가 진우연맹원 1명이 마약과 관련되었다는 구실로 관계자들을 체포하였다. 진우연맹사건으로 일본 도쿄에서 김정근·구리하라·구라모토 3명 모두 체포·연행되어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 검사국(檢査局)[현 대구지방검찰청]으로 송치되었다. 김소성은 1926년 9월 3일 기소중지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1927년 7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으로 신재모·방한상·서학이·김정근은 징역 5년, 서동성은 징역 3년, 정명준은 징역 2년, 하종진·김동석·안달득은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마명·우해룡은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1심에 불복하여 신재모·방한상·마명·우해룡은 항소하였지만, 대구복심법원에서 1927년 11월 30일 마명·우해룡은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1928년 5월 3일 신재모·방한상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김정근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의의와 평가]

진우연맹은 1920년대 무정부주의자들이 일제의 탄압에 맞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진우연맹은 일본의 흑우회·반역아연맹·흑색연맹, 중국 상하이의 민중사 고백성 등과 연계하여 무정부주의운동과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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