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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545
한자 應徵士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강제징용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서 일제가 실시한 강제 동원 정책.

[개설]

응징사는 1943년 7월 일본 후생성(厚生省)에서 개정한 국민징용령(國民徵用令)에 의하여 동원된 노무자를 말한다. ‘징용에 응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대구 지역에서는 1943년 8월 10일 ‘응징사 복무 규율’이 공포 시행된 이래 1944년부터 본격적으로 징용되었다.

[설립 목적]

응징사는 일제가 징용 노동자들에게 군인 복무와 동일한 규율과 의무를 부여하여 생산을 증대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한 강제 동원 정책이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44년 6월 17일 경북도 당국은 국민총력총동원 경상북도 연맹위원장을 겸하고 있는 경북지사 명의로 경북 각 군수를 경북도청 소회의실에 모아 놓고 극비로 ‘응징사 징발’에 관한 회의를 열었다. 경북지사는 도내 각 군수에게 할당된 응징사를 6월 24일 대구공회당에 집결시킬 것을 하달하였다. 응징사의 자격은 신체 강건하고 사상이 온전하며 일본어에 능통한 만 20~30세의 남자, 응징되더라도 가계에 곤란이 없는 자 등이었다.

응징사는 민영기업에 징발될지라도 군무에 복무하는 군인이 국가에 의하여 신분이 보장되듯 응징사에게도 응징사로서 특별한 신분이 보장된다고 선전하였다. 또한, 징용부조라는 제도를 통하여 생계가 어려운 남은 가족이나 업무 수행상 재해에 도움이 되도록 보장이 되어 있는 것으로 선전하였다. 경북 각 군은 ‘응징사 징발’에 나서 각 군 단위로 징발한 응징사의 환송회 격인 장행회(壯行會)를 열었다.

1944년 6월 24일 대구공회당 광장에는 징발된 징용자 3,000여 명이 운집하였다. 다음날인 1944년 6월 25일 징용자들은 앞산에 위치한 연병장으로 이동하여 징용 편성을 마치고 연병장과 대구사범학교에 나뉘어 ‘응징사 복무 훈련’을 받았다. 1944년 7월 중순 대구의 연병장과 대구사범학교에서 응징사 훈련을 받은 징용자들은 대구역에서 부산을 거쳐 배편으로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하였다. 그 뒤 응징사들은 각기 정해진 부대의 군속, 민영기업의 징용자로 이동 배치되었다. 응징사들은 일제에 의하여 ‘명예롭고 떳떳한 의무’, ‘생산혼(生産魂)’ 등으로 일제의 전쟁 동원 정책의 선전 도구가 되어 희생을 강요당하였다.

[의의와 평가]

응징사는 일제하 전시체제기에 국민징용령에 의하여 강제 동원된 징용 노동자들로서, ‘생산혼’으로 선전되며 일제의 전쟁 동원 정책에 희생을 강요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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