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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수해대책위원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306
한자 大邱水害對策委員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4년 8월 13일연표보기 - 대구수해대책위원회 결성
최초 설립지 만경관 - 대구광역시 중구 국채보상로 547[종로1가 29-4]지도보기
성격 시민 단체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서 서문시장대신동 일대의 홍수 피해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결성한 시민 단체.

[개설]

대구수해대책위원회(大邱水害對策委員會)는 1924년 8월 13일 대구의 만경관에서 대구 수해 문제의 해결과 대책을 세우기 위하여 개최한 대구부수해문제시민대회에서 결성되었다. 서문시장대신동 일대의 수해는 1924년 7월 장마철에 내린 비에 의한 천재가 아니라 서문시장 매립공사 과정에서 배수 처리 시설이 미비하여 발생한 인재였다. 대구의 시민들은 원호반과 조사반을 꾸렸고, 언론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원호 활동 동참을 촉구하는 선전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대구부(大邱府)의 책임 회피와 미온적 태도에 대구수해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대구부의 적극적인 해결을 촉구하였다.

[설립 목적]

대구수해대책위원회는 1924년 7월에 발생한 대구의 서문시장대신동 일대에서 발생한 홍수 피해를 해결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결성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부수해문제시민대회에서 결성된 대구수해대책위원회는 위원장 이선호(李宣鎬)와 20여 명의 실행 교섭위원으로 구성되었다. 대구수해대책위원회가 내세운 서문시장대신동 수해의 해결 방안은 대구부수해문제시민대회 준비 위원들이 발표한 선언문과 결의 사항에 잘 나타나 있다. 곧 수해의 원인은 서문시장 매립공사 때 배수 처리 시설의 잘못에 기인한 인재로 규정하고, 책임과 대책은 대구부가 지되 수해 복구비와 도로 개선 등 공사비는 대구부 예산인 시가 정리비 70만 원으로 할 것이었다.

그러나 대구수해대책위원회대구부 예산인 시가 정리비 70만 원의 사용처를 놓고 일본인 사회와 조선인 유지 일부의 반대에 부딪혀 동력을 상실하였다. 시가 정리비 70만 원을 수해 복구비와 도로 개선에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위원들이 대구수해대책위원회에서 탈퇴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결국 대구부의 시가 정리비 70만 원의 예산은 피해 복구에 투입되지 않아 수해 이재민과 대구수해대책위원회가 원하던 방안은 관철되지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구수해대책위원회는 대구의 서문시장대신동에서 발생한 홍수 피해를 해결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결성된 범시민적 단체이며 피해 주민 및 조선인 중심의 해결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시가 정리비 예산의 사용처를 놓고 의견이 갈라져 대구수해대책위원회가 바라는 대로의 해결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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