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2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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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防空獻納式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37년 - 대구방공헌납식 거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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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시기/일시 | 1937년 - 대구방공헌납식 제2경북호 대구비행장에서 헌납식 |
발생|시작 장소 | 대구비행장[현 대구국제공항] - 대구광역시 동구 공항로 221[지저동 400-1] |
종결 장소 | 대구비행장[현 대구국제공항] - 대구광역시 동구 공항로 221[지저동 400-1] |
성격 | 역사적 사건 |
[정의]
일제강점기 전시체제기 대구비행장에서 열린 군용기 헌납 행사.
[개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침략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책을 마련하고 전시 동원 체제를 본격적으로 가동하였다. 1937년 9월 9일 일제는 「군수공업동원법」을 제정하고 전시 필요 물품을 통제·운용하도록 하여 군수품은 신속하고 원활히 보급되었다. 또한 1938년 5월 5일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통제 체제에 필요한 각종 법률[칙령]과 기구를 신설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일제는 전시 또는 전쟁이 발생하면 인적·물적 자원을 통제·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1938년 7월 일제는 친일 민간단체 대표자들에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결성하도록 하였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전시 동원 체제를 선전하는 조직이었다. 일제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통하여 민간에서 총후봉공(銃後奉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각종 법률과 친일 조직 등을 이용하여 전쟁물자를 동원하는 총력전을 펼쳤다. 일제는 식량 물자, 위생용 물자, 군수물자, 통신용 물자, 토목 및 건축 물자, 수송물자 등을 전쟁 물자로 지정하였다.
[역사적 배경]
군용기[일명 애국기(愛國機)] 헌납은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와 조선군사령부의 소속 부서인 애국부(愛國部)가 주도하였다. 조선군사령부는 1932년부터 참모부 소속으로 애국부를 설치하고, 조선에서 전쟁 후원 활동을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전쟁물자의 동원을 전담할 장교도 처음으로 조선군사령부에 배속시켰다.
또한 『애국』이라는 책자를 발간·배포하여 각 지역에서 군수물자 헌납 권장과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특히 조선의 전 지역에서 군용기 헌납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일제가 ‘애국기(愛國機)’[조선호(朝鮮號)]라는 이름으로 군용기 헌납을 받기 시작한 시기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인 1932년부터이지만 본격적으로 비행기 헌납을 강행한 시기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이다.
[경과]
1930년대 후반 대구 및 경상북도 지역에서 헌납한 군용기는 육군기 3기, 해군기 2기로 총 5기이다. 1937년 11월 13일 헌납된 경북호는 모두 해군기 2기이다. ‘제1경북호(第一慶北号)’[헌납 번호 137]는 함상 전투기(艦上戰鬪機)이고, ‘제2경북호(第二慶北号)’[헌납 번호 138]은 함상 폭격기(艦上爆擊機)이다.
육군기는 조선경북호(朝鮮慶北号)[헌납 번호 183, 184] 2기와 경북봉화호(慶北奉花号)[헌납번호 1174] 1기이다. 조선경북호(朝鮮慶北号)의 기종은 모두 구오식전투기(九五式戰鬪機)이다. 군용기의 이름은 주로 헌납자에 따라 명칭이 정하여졌다. 제1호경북호, 제2호경북호, 조선경북호는 대구 및 경상북도 군민과 유지가 중심이 되어 헌납되었기 때문에 군용기 명칭이 지역명을 따서 ‘경북’이라고 붙었다. 경상북도에서 봉화만이 군용기를 헌납하였기 때문에 ‘봉화’라는 구체적인 지명이 붙었다.
군용기를 헌납하는 과정은 제1경북호와 제2경북호의 헌납 과정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1937년 8월 2일 경상북도청 회의실에서 시국 간담회를 개최하고 경북호를 헌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후 대구 및 경상북도 각 지역의 관변단체, 친일파, 지역 유지, 군민들에게 ‘국방헌금’이라는 명목하에 10만 원을 기부받았다.
대구 및 경상북도 지역에서 군용기 헌납 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친일 단체로는 대구국방동지회, 제국재향군인회 대구지부, 적십자사 경북지부, 애국부인회 대구지부, 대구부인회 등이다. 경상북도 산업과장이 조선군사령부에 방문하여 군용기 헌납 약정 업무를 처리하였다. 이후 대구비행장[현 대구국제공항]에서 제1경북호와 제2경북호 헌납식을 거행하였다.
1940년대에도 군용기 헌납 운동이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1942년 1월 10일 오후 2시 대구부회의실에서 대구부민호(大邱府民号) 10기 헌납 운동 주최자 측과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역원이 긴급회의를 개최하였다. 이후 야마모토[山本] 대구부윤과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회장 박중양을 비롯한 다수의 회원이 대구공회당에서 간담회를 개최하고 군용기 헌납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첫째, 대구부민호 10기 헌납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촉진 위원 10명을 새로 정하고, 각 지역에서 유세를 벌여 비용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유세 관련 구체적인 안은 1942년 1월 13일 오후 4시 대구공회당에서 다시 협의하기로 하였다.
둘째, 전선에 파견된 장병에게 1,000개의 위문대(慰問袋)를 보내기로 하였다. 셋째,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전시생활부 내 부인부를 설치하여 조선의 여성들이 ‘총후부인(銃後婦人)’이 되어 대구부민호 헌납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도록 하였다. 1942년 1월 17일 대구공회당에서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부인회 간사로 임효정(林孝貞)을 선출하였다. 이밖에 총무부장 대창성재(大倉聖在)와 사업부장 금전용주(金田龍周), 전시생활부장 서상일(徐相日)을 선출하고,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사무소는 대구역 앞 조선항공연구소에 두었다.
[결과]
대구 및 경상북도 지역에서 군용기 헌납식은 대부분 대구비행장에서 열렸다. 해군대신(海軍大臣) 요나이 미쓰마사[米內光政] 명의로 발송된 제1경북호와 제2경북호 헌납식 안내장, 제1경북호와 제2경북호 헌납식 행사의 식순표, 「경북호 헌납식의 노래」라는 제목의 노래 가사 등 유인물 3점을 2020년 대구경북근현대연구소가 발굴하여 실제 군용기 헌납식이 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