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0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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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戶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재두 |
[정의]
조선시대 대구 지역의 집과 사람, 또는 집과 사람의 수.
[개설]
호구(戶口)는 국가가 공물(貢物)과 부역(賦役) 등의 세금을 부과하는 기준이었기 때문에 호구 수의 파악이 매우 중요하였다. 1414년(태종 14) 대구현은 이전부터 관할하던 하빈현과 함께 수성현과 해안현을 관할하였다. 1419년(세종 1)에는 1,000호 이상이 되어 군으로 승격하였는데 1,300호였다.
[내용]
1425년(세종 7)에 편찬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에 의하면, 대구군은 모두 1,249호 8,629명이었다. 자세히 보면, 대구본군이 436호 2,553명, 수성이 264호 1,348명, 해안이 198호 2,661명, 하빈이 351호 2,067명이었다. 현풍현의 인구는 477호 4,939명이었고, 성주목에 속하였던 화원현의 인구는 321호 2,851명이었으며, 칠곡 지역인 팔거현의 인구는 657호 4,551명이었다.
1685년(숙종 11)부터는 기존의 수성현·해안현·하빈현에 화원현과 풍각현이 대구도호부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구도호부의 전체 인구도 급증하였다. 3년마다 작성한 『대구부 호적대장(大邱府戶籍大帳)』에 의하면, 1720년(숙종 46) 대구도호부는 1만 3520호, 6만 8024명이었다. 1760년에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1759년(영조 35) 1만 2752호, 5만 9614명, 남 2만 4913명, 여 3만 4701명, 1789년(정조 13)에 편찬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1만 3413호, 6만 1477명, 남 2만 6691명, 여 3만 4786명, 1832년(순조 32)에 편찬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는 1831년(순조 31) 기준으로 1만 3194호 5만 6962명, 남 2만 4794명 여 3만 2168명으로 나온다.
18·19세기 호적대장의 호구 통계 정체 현상은 대구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고, 국역 기피와 신고 누락, 전염병과 기근 등이 주요 요인이었다. 성별 구성도 남성이 적고 여성이 많이 분포하였는데, 호적이 역(役) 부과의 기본 대장이었음을 감안할 때 남정(男丁)의 국역 기피와 남아의 신고 누락이 많았음을 뜻한다. 호당 평균 인구는 부부가족 중심의 4.5명 정도로 실렸지만, 실제 대가족이더라도 일정한 수로 부자 또는 형제간에 몇 개의 호로 나누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호구 통계는 실제 인구나 가구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녔다.
대구부 관내 34개 면 가운데 서상면과 동상면을 포용하는 도시지역은 호구가 집중적으로 분포하였고, 후대로 올수록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농촌지역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18세기 후반 대구의 도시지역에는 한량·군관·공생·장인·하전·사령·소동·군뢰·아병 등의 직역(職役)이 수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들 중 한량을 제외한 대부분은 각종 관청 소속이었다.
당시 각종 관청은 납품과 제조에 관련된 상행위에 관계하고 있었다. 실제 도시지역에는 많은 상인들이 있었는데도 상인들의 생업을 직접 표시하는 직역명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직역을 대신 사용하였다. 경상감영 설치와 대동법 실시 이후 관수품 조달을 위한 공인(貢人)의 활동은 도시 수공업의 발달을 촉진시켰으며, 18세 후반부터 대구는 상공업 도시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