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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42
한자 鄕吏
이칭/별칭 아전,인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재두

[정의]

조선시대 수령을 보좌하던 지방행정 실무자.

[개설]

원래 고려시대 향리는 지방의 행정 및 세금 징수를 주관하던 고을의 지배 세력이었다.

조선시대 향리는 수령을 보좌하여 고을의 각종 업무를 담당하는 실무 행정 담당자였다. 늘 백성과 접촉하고, 관과 민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한 고을에 세거하면서 향리직[향역]을 세습하며, 고을의 행정 업무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단신으로 부임하는 수령을 보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방 통치를 사실상 이끌어 갔다.

[변천]

중인 신분인 향리는 토착적 성격을 지니는 신분 용어이지만, 조선 후기에는 아전(衙前)이나 인리(人吏)로 통칭되었다. 아전은 질청[작청(作廳)] 등으로도 불린 이청(吏廳)이 관아 앞에 있다는 데서 유래하며, 인리는 관아에서 사역하는 자들을 지칭하는 직역의 의미를 갖는다. 감영, 병영, 진영에 소속된 영리는 각 고을의 향리 중에서 선발하였다. 읍리는 부·목·군·현 등 각 고을에 소속되었으며, 역리는 역에 소속되었다. 사회적으로 영리가 가장 높고 역리는 천시되었다. 향리들이 행정사무를 보는 이청[질청]에는 호장, 육방, 색리와 그 아래 하급 사역인인 통인, 사령, 관노비가 있었다.

조선시대 향리들은 고려시대와 달리 신역(身役)으로 향리 업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녹봉 지급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향리는 관직자가 받을 수 있는 녹봉의 지급 대상자는 아니었지만, 일에 대한 월급이나 업무 처리비가 공식·비공식적으로 책정되었다. 특히 상급 향리라 할 수 있는 호장과 이방 등은 많은 액수의 월급이나 업무 처리비를 받았다. 조선시대 양반 체제가 500년 동안 유지된 원인 가운데 하나로 향리들이 하층민들의 불만, 분노, 공격으로부터 양반 계층을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조선 건국 직후 대구군에서는 향리 세력이 비교적 강하였다. 15세기 초 향리 배설(裵泄)은 교활하고 눈치가 빠르며 민첩하고 법조문을 멋대로 해석하여 남용하였다. 수령들은 배설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여 통치하였다. 배설은 만년에 “전후의 수령들을 내가 모두 거느리고 살았는데, 오직 금유(琴柔)옥고(玉沽)는 모시고 살았다”라고 말하였다.

1601년(선조 34)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감영 소속의 영리를 두었고, 1654년(효종 5)에는 영장이 파견되는 대구 진영이 설치됨으로써 대구도호부의 향청은 상대적으로 왜소하여졌다. 대구 지역의 향리 세계는 감영이 설치된 후 관아 도시, 상업 도시로 발전하였고, 경상감영, 대구진, 대구부에서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영인리, 진무리, 부리[읍리] 등 향리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대구부에 소속된 부리[읍리]들은 영인리, 진무리와 함께 성내에 거주하면서 상당한 위세를 가지고 있었다.

1865년(고종 2)에 부임한 경상감사 이삼현(李參鉉)은 경상도 각 고을의 수령들이 읍리에게 수모를 당하는데 대구가 특히 심하며, 관노나 사령들은 읍리를 호랑이 보듯이 한다고 묘사하였다. 또한, 퇴근 후에는 중국산 부채를 들고 거리를 팔자걸음으로 걸으며, 재물과 술과 여색만 알고, 한번 직임을 얻으면 공물을 훔쳐 도망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들이라고 묘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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