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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침입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12
한자 蒙古- 侵入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박성현

[정의]

1231년부터 1259년까지 몽골군이 고려에 침입하여 특히 2차, 3차, 6차 때 대구 지역에 침입한 사건.

[전개과정]

고려시대인 1232년(고종 19) 몽골의 2차 침입 때 몽골군의 일부가 영남 지역까지 깊숙이 들어와 노략질하였다. 이 사실은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소장되어 있었던, 거란 침입기에 제작된 초조대장경판(初雕大藏經板)이 임진년[1232]에 소실되었다고 한 기록에 의하여 확인된다.

당고(唐古)를 수장으로 한 몽골군의 3차 침입은 1235년(고종 22)부터 1239년까지 약 5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1235년에는 내침한 몽골군의 일대가 안동, 해평 등지에 출현하였고, 또 동경(東京)[현재의 경주]으로 진출을 도모하였다. 이에 고려 정부에서는 9월 상장군 김이생(金利生)을 동남도지휘사(東南道指揮使)로 파견하고, 유석(庾碩)을 부사(副使)로 삼아 파견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 조에서는 김이생과 유석이 통도사(通度寺)에 들러 석가의 진신사리(眞身舍利)에 예배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몽골군은 1238년에도 대거 내침하였는데, 『고려사』에 의하면 윤4월 몽골군이 동경에서 황룡사 탑을 불태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1254년(고종 41)부터 1259년까지 4회에 걸쳐 이루어진 차라대(車羅大)에 의한 6차 침입 때에도 영남 및 대구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다. 1254년에는 몽골군이 충주를 거쳐 10월 상주산성을 공격하였으며, 그 뒤 단계(丹溪)[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를 경유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무렵 대구 지역도 공격을 당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듬해인 1255년 초 포로가 되었던 대구 사람이 도망쳐 돌아와 몽골군의 철수 소식을 알렸다. 몽골군이 철수하고 3월 산성과 해도에 입보(入保)한 자들을 나오라고 하였을 때 공산성(公山城)에 함께 들어가 있던 군현(郡縣)의 백성 중 굶어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아서 노약자들의 시신이 골짜기를 메웠으며, 심지어는 아이를 나무에 묶어 두고 가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1256년 4월에는 현풍현(玄風縣) 사람들이 40여 척의 배를 타고 피난을 가다가 인근 현(縣)의 강가에 정박하였는데, 몽골군이 추격하여 남녀와 재물을 빼앗고 권농사(勸農使) 김종서(金宗敍)를 죽였다는 기사가 있다.

[영향]

몽골의 고려 침입은 1231년(고종 18)부터 1259년까지 총 6차 11회[3차 3회, 6차 4회]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이 중 대구 지역에 영향을 미친 것은 2차, 3차 1·3회, 6차 1·2회라고 할 수 있다. 그로 인하여 백성들은 몽골군에게 약탈을 당하고, 공산성과 같은 인근 산성에 입보하여 고초를 겪었으며, 초조대장경이 불타고[2차 침입], 황룡사 9층탑이 소실[3차 3회 침입]되는 등 중요한 문화유산이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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