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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981
한자 先史
영어공식명칭 Prehistor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선사/선사
집필자 배성혁

[정의]

대구광역시의 구석기시대부터 초기철기시대까지 유적과 유물.

[개설]

선사시대(prehistory)는 역사시대(history)와 대칭되는 말로 문헌 기록이 없는 시대를 말한다. 우리나라 고고학계에서는 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초기 철기시대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역사학계에서는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성립하는 청동기시대부터는 역사시대로 구분하기도 한다.

대구 지역 선사유적은 구석기~초기 철기시대에 걸쳐 모두 확인된다. 구석기시대에는 달서구 월성동에서 석기 제작장이 조사된 것이 유일하다. 신석기시대에는 금호강금호강의 지류인 동화천신천, 낙동강의 지류인 진천천 일대에서 다수의 유적이 조사되어 본격적으로 신석기문화가 전개되었음을 잘 보여 준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면 대구분지, 월배 선상지, 칠곡 분지, 시지 지역 등 대구 전역에서 수백 기에 이르는 주거지와 고인돌이 조사되었고, 대규모 중심 취락도 많이 확인되어 청동기 문화가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초기 철기시대에는 유적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지만, 분묘에는 다양한 청동기·철기·토기가 부장되었으며, 원삼국시대로 이행되는 과도기 단계의 유적이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구석기시대]

구석기시대는 인류가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며 처음 도구를 사용한 약 260만 년 전부터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는 약 1만 년 전까지를 지칭하며, 지질학적으로는 제4기[第四紀, Quaternary] 갱신세(更新世)에 해당한다. 구석기인들은 진화 과정을 거치며 두뇌 용량이 점차 증가하고 지능이 발달하면서 간단한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였다. 원시종교가 발생하고 예술 행위도 일어나 시체를 매장하고 동굴에는 벽화를 남겼으며 사실적인 조각품 등도 제작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따뜻한 지방에 살다가 불을 발견하면서 추운 지방으로까지 삶의 터전을 확장하였다. 작은 무리를 지어 동굴이나 바위그늘, 야외에 간단한 막집을 짓고 살며 계절에 따라 이동 생활을 하였다. 먹거리는 사냥이나 채집 등을 통하여 조달하였는데, 사냥 도구로는 자연석기나 조잡한 석기, 나무, 뿔, 뼈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다가 제작 기술이 점차 발달하면서 다양한 용도의 정교한 석기를 제작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구석기 문화는 약 100~70만 년을 전후하여 시작되며, 한반도 전역의 주요 하천과 해안선을 따라 발견된 유적은 1,000여 곳에 이른다. 주요 유물로는 주먹도끼, 찍개, 여러면석기, 찌르개, 뚜르개, 새기개, 밀개, 긁개, 슴베찌르개, 좀돌날몸돌, 홈날, 망치 등이 있다. 대구 지역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월성동 777-2유적에서 좀돌날 석기를 포함한 석기 제작장이 조사되었고, 시지동 일대에서 중기로 추정되는 여러면석기가 채집된 바 있다.

[신석기시대]

지금으로부터 약 1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한반도에는 새로운 문화를 가진 신석기인들이 들어온다. 이들은 한반도 내에서 지역 간의 상호 교류를 활발히 하였으며, 멀리 중국 동북 지역, 러시아 연해주, 일본 열도 등과도 교류하였다.초기 신석기인들은 주로 강가나 바닷가에서 움집을 짓거나, 동굴·바위 그늘에서 살며 작은 마을을 이루어 생활하였다. 정착 생활이 보편화되면서 큰 마을이 형성되었고, 움집의 크기와 수량이 늘어났으며, 내부에는 저장시설과 음식의 조리와 난방을 위한 노지가 설치되었다. 또 토기와 간석기[磨製石器]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며 그물과 직물을 짜는 등 도구 발달이 현저하였다. 의례 행위도 발전하여 죽은 사람을 묻는 매장 풍습과 자연숭배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신석기인들의 흔적은 주거지, 동굴, 바위그늘, 무덤, 조개더미, 토기 가마터 등의 형태로 한반도 전역에서 유물과 함께 발견된다.

신석기시대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다양한 문양의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는 야외 가마에서 구웠으며, 곡식을 저장하거나 음식을 조리하는 데 쓰거나 옹관 등으로 사용하였다. 수렵과 어로를 비롯하여 벌목, 농경, 가공에는 석재 도구가 많이 이용되었다. 석재 도구는 석창·석촉·작살·석부·보습·갈판·갈돌 등 다양하며 갈아 만든 것이 많다. 그 외에 결합식 낚시, 송곳, 바늘 등의 골각기와 토제 인형, 조개팔찌, 귀고리, 목걸이 등의 장신구도 있다.

한편,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시작으로는 제주도 고산리식 토기가 약 1만 년 전[기원전 8000년]으로 편년되었지만, 아직 제주도에서만 출토되고 내륙에서는 발견된 바 없다. 내륙의 빗살무늬토기는 독특한 토기 형태와 문양을 기준으로 전기 후반부터 서북 지역, 동북 지역, 중서부 지역, 남부 지역, 동해안 지역 등 5개 문화권으로 크게 구분된다.

경북·대구 지역은 동해안 지역과 남부 지역 문화권에 포함되는데, 이른 시기의 취락은 동해안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점차 내륙 지역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인다. 대표 유적으로는 울진 죽변리 유적과 후포리 유적, 김천 송죽리 유적과 지좌리 유적, 경주 봉길리 유적, 대구 유천동 유적 등이 있으며, 조기~말기에 해당한다. 대구 지역에서는 나지막한 구릉과 충적지에서 중기부터 후기·말기에 이르는 유적들이 발견되는데, 대부분 소규모 취락이나 유물만 확인되며, 대규모 취락은 확인된 바 없다. 남서부 진천천 유역과 월배 선상지 일대의 유천동 248-1 유적, 월성동 1275 유적, 상인동 119-20 유적, 진천동 576-8 유적, 대천동 413 유적, 북동부 금호강 유역의 대림·사복동 유적, 달성 달천리 135 유적, 검단동 유적, 북부 동화천 유역의 서변동 취락 유적, 남부 신천 일대의 상동지석묘Ⅰ, 상동 522-4 유적, 대봉동 마을 유적, 대봉동 21-7 유적, 동문동 38-6 유적 등이 조사되었다.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는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를 주 무대로 기원전 15세기 무렵 시작되었는데, 중국 동북의 요령 지역으로부터 청동기 제작 기술을 가진 새로운 농경민 집단이 이주하여 오면서 한반도에 거주하던 신석기인들을 흡수·동화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였다.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를 대신하여 민무늬토기를 사용하였으며, 청동기는 권위의 상징물이나 의기(儀器)로 일부 지배층만 소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문헌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이 한(漢)을 비롯한 주변의 여러 세력과 공존하며 패권을 다투던 시기이기도 하다.

대규모 마을공동체가 발전하면서 방어를 위하여 환호(環濠)와 목책(木柵)을 마을 주변에 설치하였고, 움집과 지상가옥으로 이루어진 주거 공간에는 별도의 공동 작업장과 창고, 가축우리, 광장 등을 만들었다. 마을과 인접한 구릉과 하천변에는 논과 밭을 만들고 벼·보리·콩·조·수수 등을 재배하였다. 삶이 윤택하여져 발생한 잉여생산물은 계층분화를 촉진하여 계급과 사유재산이 생겨났고, 마을공동체 간의 갈등은 전쟁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계급 발생에 따른 권력의 집중화는 수십 톤의 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거대 고인돌[支石墓]의 축조를 통하여 잘 드러난다. 우리나라에서만 수만 개의 고인돌이 무리를 이루어 축조되었고, 돌널무덤[石棺墓]와 돌덧널무덤[石槨墓]·독무덤[甕棺墓]도 유행하였다. 또 공동체의식과 의례 행위도 발전하여 태양신과 기하문, 별 등을 새겨 풍요를 기원하는 바위그림[岩刻畵]이나 바위구멍[性穴], 선돌[立石] 등이 조성되었다.

생활 도구는 새로 등장한 청동으로 만든 비파형동검·청동꺾창·청동거울 등의 청동 제품과 석재를 정밀 가공하여 만든 창·칼·화살촉·도끼·대팻날·반달돌칼·낫·괭이·가래·갈돌·갈판·숫돌·가락바퀴 등 간석기가 발달하였다. 그리고 생활 용기와 의례 용기들은 민무늬토기[無文土器]와 홍도(紅陶), 흑도(黑陶) 등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청동기는 의기적 성격이 강하며 실용구는 여전히 토기와 석기가 중심이었다.

경북·대구 지역의 청동기 문화는 동해안에 접한 소하천과 구릉, 남부 내륙지역의 낙동강, 금호강, 형산강 등을 비롯한 강과 하천 주변의 충적지와 선상지, 나지막한 구릉 일대에 밀집되어 분포하는 양상을 보인다. 시기적으로도 조기에서 후기까지의 대규모 취락과 분묘가 고루 분포하며, 지역별로 독창적인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대구의 청동기시대 유적은 금호강의 소지류인 신천, 대구천, 팔거천, 동화천, 율하천, 매호천, 욱수천 유역과 낙동강으로 직접 유입되는 달서구 진천천, 성당천 유역을 포함하는 월배 선상지 일대의 낮은 구릉지와 선상지에 고인돌, 주거지를 포함한 대규모 마을 유적들이 집중 분포하여 있다. 시기적으로는 조기에서 후기까지의 유적들이 모두 확인되는데, 취락은 대구분지 전역에서 고루 확인되고, 분묘는 신천 유역의 충적지와 진천천 일대의 월배 선상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며, 욱수천동화천 일대에서도 일부 확인된다.

조기 유적으로는 시지동 유적, 월성동 1275 유적, 상동 유적, 대천동 511-2 유적, 봉무동 유적, 봉산동 185-4 유적, 삼덕동 188-1 유적 등이 있는데, 기원전 13세기대로 보고 있다. 전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유적은 대구분지 전역에 걸쳐 나타나지만, 진천천 유역의 월배 선상지와 신천 유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며, 기원전 12~5세기대로 보고 있다.

진천천 유역에서는 대천동 511-2 유적, 상인동 123-1 유적, 상인동 128-8 유적, 상인동 87 유적, 상인동 98-1 유적, 송현동 906-11 유적, 월성동 1275 유적, 월성동 498 유적, 월성동 600 유적, 월성동 777-2 유적, 월암동 363 유적이 대표적이다. 신천 유역에는 대봉동마을 유적, 상동 80 유적, 상동 89-2 유적이 있고, 팔거천 유역에는 팔달동 유적, 동천동 취락 유적, 매천동 154 유적이 있다. 그리고 동화천 일대에는 서변동 취락 유적이, 율하천 유역에는 신서동 유적, 각산동 430-8 유적, 괴전동 125 유적이 있고, 욱수천매호천 유역에서는 시지동 60-1 유적, 욱수동 134 유적, 매호동 979-4 유적 등이 알려져 있다.

[초기철기시대]

한반도에서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기원전 300년경부터 삼국이 정립된 기원후 300년경까지를 철기시대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아직 시대구분 용어에 논란이 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삼한시대(三韓時代)로 부르다가 최근 한반도 남부 지역에 한정된다는 지역적 한계점으로 말미암아 부여/삼한시대로 개칭하였다. 고고학계에서는 기원전 100년경을 기준으로 초기 철기시대(初期鐵器時代)와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로 구분하기도 하며, 초기 철기시대의 특징적인 점토대토기 중에서 원형점토대토기 단계까지를 청동기시대 후기에 포함하기도 한다.

초기 철기시대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기원전 100년 경을 전후한 시기로 중국 연(燕)[기원전 323~기원전 223년]의 화폐인 명도전(明刀錢)과 함께 철제 무기와 농공구 등이 서북한 지역으로 유입되면서 시작되지만, 남부 지역에서는 말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100년경 고조선과 낙랑의 철기 문화를 가진 유이민 집단이 들어오면서 정착된다. 철기의 보급은 생활 경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와 농업 생산성이 증가하고 계층분화가 가속화하며, 전쟁 형태도 대규모화되는 등 사회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 시기의 유적으로는 움집터와 무덤이 많이 확인되는데, 집터는 전통적인 움집과 지상 가옥 안에 부분적으로 온돌 시설이 채용되고 내부 공간도 확대되며 대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무덤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와 돌널무덤이 점차 줄어드는 대신, 중국의 영향과 전통적 무덤 양식이 결합된 널무덤[木棺墓]·덧널무덤[木槨墓]·독무덤 등이 유행하였다.

한편 대동강 남쪽에서는 중국과는 다른 한반도만의 독특한 청동기 문화가 형성되어 세형동검, 꺾창, 투겁창, 거울, 방울, 도끼 등을 비롯한 한반도형 청동 제품이 많이 제작되었다. 철기는 각종 무기와 농공구, 마구가 주종을 이루는데, 주조품 위주로 제작되다가 점차 단조품으로 변화되었다. 토기 역시 중국 토기의 영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여, 기존의 무문토기·홍도·흑도의 변형과 더불어 우각형파수토기, 점토대토기, 두형토기가 등장하게 되고 시루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간석기의 전통은 여전히 지속되나 점차 줄어들며 청동기와 같이 의기화되어 갔다.

대구 지역의 초기 철기시대 취락은 이전 단계인 청동기시대보다 급격히 쇠퇴하는 양상을 보이며, 기원전 4세기 이후로는 주거지의 형태가 부정형으로 나타난다. 생활 유적으로는 각산동 912-6 유적과 국우동 유적이 있는데, 원형점토대 토기와 파수부 토기를 공반하고 있다. 무덤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부장 양을 보이지만, 팔달동 유적에서 확인된 기원전 2세기 후반경의 널무덤 5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초기 철기시대 말기에서 원삼국시대로 이행하는 과도기 단계의 유적이다.

원삼국시대 초기로 이어지는 기원후 1세기 전반의 만촌동, 평리동, 비산동 청동기 유적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청동기가 부장되고 있는데, 특히 평리동 청동기 유적에서는 한경(漢鏡)과 방제경도 출토되는 등 부장품의 양과 종류 그리고 질에 차별성이 나타난다. 이는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기원후 1세기 전반에 걸쳐 대구 지역에 유력한 지배자가 출현함과 동시에 사회분화가 크게 진행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대표 유적으로는 신천금호강의 합수 지점인 독립 구릉 정상부에 있으며, 유구석부의 제작 과정을 잘 보여 주는 다량의 석기가 확인된 북구의 침산 유적연암산 유적이 있다. 그리고 분묘나 생활 유적이 확인되거나 청동 유물들이 출토된 서구의 비산동 청동기 유적과 평리동 청동기 유적, 북구의 국우동 유적팔달동 유적, 동구의 신천동 청동기 유적, 수성구의 만촌동 청동기 유적, 동구의 각산동 912-6 유적 등이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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