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부 호적대장
-
대구 지역에 있던 조선 후기 유기장 마을. 조선 시대의 소외 계층인 백정(白丁)은 고려 시대의 양수척(楊水尺)이 재인(才人)과 화척(禾尺)으로 분화되었다가 1423년(세종 5)에 개칭된 것이다. 백정으로 개칭된 이후에도 백정들은 성(姓)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저기 떠돌면서 구걸, 사냥, 도살 및 고리·가죽 제품 제조와 판매, 공연[창우(倡優)] 등을 업으로 삼아...
-
조선 후기에 대구도호부에서 3년마다 조사한 호적대장. 『대구부 호적대장』은 1681년(숙종 7)에서 1876년(고종 13)까지 대구도호부 내의 주민을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인구 기록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대구부 호적대장』 서명은 ‘숙종십육년경오대구장적(肅宗十六年庚午大邱帳籍)’이며, ‘대구장적’이라고도 한다....
-
조선 후기 대구 지역에 형성된 성이 같은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 조선 후기 친족 질서는 내외친이 망라되는 양계적(兩系的) 친족 질서에서 적장자(嫡長子) 중심의 부계적(父系的) 친족 질서로 변화되었다. 구체적으로 혼인 형태에서 유교적 요소의 강화, 적장자 중심의 남녀 차등 상속, 장자 단독 봉사(奉祀), 부계 혈연을 중심으로 한 문중(門中)의 결성과 동성마을의 형성 등으로 나타났다...
-
조선 후기 대구읍성 남문 밖 저지대에 있었던 갖바치 백정 마을. 조선시대에는 가죽제품인 피물(皮物)을 만드는 장인을 피장(皮匠), 갖바치, 피쟁이로 불렀는데, 신분적으로 양인이지만 대대로 천역인 소 도축과 가죽제품 생산에 종사하면서 천인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다. 『대구부 호적대장』을 보면, 대구부 서상면 노하리는 1738년부터 1876년까지 140여 년 동안 피쟁이마을이었다. 노하...
-
조선시대 대구 지역의 집과 사람, 또는 집과 사람의 수. 호구(戶口)는 국가가 공물(貢物)과 부역(賦役) 등의 세금을 부과하는 기준이었기 때문에 호구 수의 파악이 매우 중요하였다. 1414년(태종 14) 대구현은 이전부터 관할하던 하빈현과 함께 수성현과 해안현을 관할하였다. 1419년(세종 1)에는 1,000호 이상이 되어 군으로 승격하였는데 1,300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