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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형편을 펴게 해준 논공 수박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B020201
한자 - 形便- 論工 -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호상

[정의]

마을의 형편을 펴게 해준 논공 수박

[달성군에서 처음 수박농사를 시작하다]

달성군 논공읍의 논공들은 1962년 낙동강 제방공사를 통해 옥토로 바뀌었다. 그런 가운데 밭농사만으로는 경제적 형편이 개선되지 않자 주민들은 마을의 소득 증대에 도움이 될 만한 작물을 찾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재배된 것이 논공수박이다. 수박은 1960년대 중반부터 재배가 시작되어 1970년대 새마을운동에 힘입어 1970년대 중반까지 전국에서 유명하였던 논공의 대표적인 농산물이었다.

논공에서 수박재배는 1963년 성주에서 논공으로 온 강태수가 수박의 턴넬조숙재배 방법을 처음 보급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때 처음 가지고 온 종자는 ‘신대화 3호’였다. 이후 1965년 수박재배 농가가 60여호로 늘어났다. 그런 가운데 씩실마을 출신으로서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귀향하여 농사를 짓고 있던 이원경의 권유로 품종을 개량하여 시험재배를 하게 되었다. 이원경이 소개한 종자는 일본품종으로서 ‘기원’,‘아스가’,‘다루마’,‘팔보’ 등 4가지 품종이었다. 종자 구입은 당시 대구 역전 시장앞에 종묘상을 하면서 일본을 자주 왕래하던 안상문을 통해 구입하였다. 이를 시험 재배한 결과 논공 땅에는 ‘아스가’와 ‘다루마’ 품종이 적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두 품종은 섬유질이 조밀하고 당도가 11도 내외이며 껍질이 얇아 기존 성주수박이나 달성군의 다른 수박보다 훨씬 뛰어난 맛을 보였다. 논공에서의 첫 수박농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노지(露地: 맨땅)에서 했는데, 그때는 자재가 미약하고 하니 작게 구덩이를 파서 고깔처럼 해서 나무로 십자형 지지대를 하나하나 만들어서 비닐을 덮어 씌우고 공기통을 뚫어서 그렇게 어렵게 농사를 지었지. 그라다가 비닐을 길게 붙여서 하는게 좋지 않겠나 해서 바로 대를 100m 정도 좁게 해서 비닐을 덮어 농사를 지었어” (이달지, 남 80세)

[전국에서 이름을 떨친 논공수박]

1966년경부터 논공 수박은 본격적으로 재배되어 출하되어 각광을 받았다. 이러한 수박재배과정에서 이원경 이외에 경북대 농대를 졸업한 김종천과 배길종 등 37명이 원우회(園友會)를 조직하여 ‘논공수박’의 상표를 만들고 수박을 출하할 때 숙도(熟度) 80% 이상의 것만을 출하하도록 권장하는 등 품질을 관리하였다. 그 결과 1970년대에는 원우회 회원이 215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논공수박의 명성이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논공수박의 특징은 첫째 종자는 일본산 수입종으로 ‘아스가’와 ‘다루마’이다. 당도가 보통 수박이 7에서8도인데 비해 논공수박은 10도에서 12도까지 측정되어 11도인 설탕의 당도와 같은 품질었다. 그리고 껍질이 얇고 섬유질이 조밀하며, 수확 후에도 수박의 보존기간이 일반 수박에 비해 훨씬 길었다. 그리고 원우회에서 엄격한 품질관리를 함으로써 믿고 살 수 있는 상품으로 이름을 떨쳤다.

[수박에서 토마토로 전환하다]

그러나 1975년경 수박재배의 연작으로 인해 토질이 황폐해지는 결과가 서서히 나타났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접목재배를 통해 생산하기도 하였으나 이전에 비해서는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후 논공수박의 명성은 이웃 옥포로 옮겨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의 발견-경상북도』(뿌리깊은나무, 1984)

『내고장전통가꾸기-달성군편』(달성군문화공보실, 1988)

〔정보제공자〕

이달지(남, 1937년생,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1리 씩실마을 주민)

이달국(남, 1965년생,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1리 씩실마을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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