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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포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0794
한자 別砲軍
영어의미역 Byeolpogun Unit(another the artillery)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최인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1871년연표보기
시행처 삼군부

[정의]

조선 후기 칠곡 지역에 주둔했던 포·조총 부대.

[제정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 후 군대의 전투력 강화를 모색하면서 1627년(인조 5) 5월 부제학 정경세(鄭經世), 교리 김광현(金光炫), 부교리 이윤우(李潤雨)·이성신(李省身), 수찬 권도(權濤) 등이 적을 방어하는 장비로 포(砲)를 사용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라고 지적하면서 1군(軍)에 각각 포수(砲手) 3천 명씩을 둘 것을 건의하였고, 재정으로는 내수사의 재물과 대신 이하 내외의 관원들과 여염의 품관(品官)이나 사자(士子)에 이르기까지 병사(兵士)가 되지 않은 자들에게는 모두 베 한 필 씩을 내게 하여 조달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어 김류(金瑬)가 군역(軍役), 내노(內奴), 공사천(公私賤)을 막론하고 정장(精壯)하고 담력이 있는 자를 수효대로 가려 뽑아서 조총을 지급하고 별포군(別砲軍)이라 이름하고, 이들을 훈련시키고 호역(戶役)을 면제시켜주며, 선발할 때는 수령이 직접 점검하여 뽑게 하고, 감사와 병사가 수시로 검열하여 시험할 것 등 구체적인 운용 방법을 건의하면서 구체화되었다. 칠곡의 경우는 1871년(고종 8) 인동부에 별포군 20명이 설치되었고, 1786년에 제작한 지방지도 「인동부지도」에 별포청이 표시되어 있어 인동부에 별포군이 설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관련기록]

관련기록으로는 『인조실록』 권16, 인조 5년 5월 1일, 『고종시대사』 1집 1871년 1월 10일, 『승정원일기』, 고종 8년 1월 10일, 『고종실록』, 고종 8년 1월 10일 및 규장각 소장 1876년 지방 지도인 「인동부지도」 등이 있다.

[내용]

칠곡의 별포군은 1871년(고종 8) 인동부에 20명이 설치되었고, 1786년에 제작한 지방지도인 「인동부지도」에 별포청이 표시되어 있어 1876년까지는 인동부에 별포군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별포군인조 당시의 별포군 설치 논의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며,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 대원군이 국방력을 강화하는 과정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 집권기 지방에 포군(砲軍)을 설치하기 시작하는 것은 1865년(고종 2) 3월에 국왕의 인가를 받아 설치한 함경도 남병영의 별포위군(別砲衛軍)이었으며, 본격적으로 설치되는 것은 병인양요 이후부터였다. 특히 각 지역에 포군을 설치하는데 중요한 전기가 되었던 것은 1868년(고종 5) 7월에 승인받은 충청도 연해읍의 포군 설치 계획이었으며,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발발하는 1871년(고종 8) 4월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었다. 그리고 대원군이 실각한 이후에는 더 이상 설치되지 않았다. 이러한 포군의 설치는 병인양요 이후 서양 군사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군대는 오직 포군뿐이라는 인식의 결과로 병인양요 이후 조선의 병제가 포수 중심 체제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별포군의 규모는 각 읍의 사정에 따라 차이가 있었고, 입번하는 방식이나, 급료 등의 규정도 동일하지 않아 운영 방식이 매우 다양하지만 교대로 입번하고, 일정한 급료를 받는 공통점도 있었다. 이들이 입번하는 장소는 별도로 마련된 청사였는데 건물은 포청(砲廳), 포군청(砲軍廳), 포수청(砲手廳), 별포청(別砲廳), 별위사청(別衛士廳) 등으로 불렸다. 임무는 입번하여 수직(守直) 하거나, 전략적 요충지에 설치한 포막(砲幕)이나 요망처(暸望處)를 지키거나, 성문, 군기고의 수비, 화약과 탄환 제작에 참여, 성내의 순찰, 각종 행사 의장 사열에 참여하며, 외적이 침입했을 때 출전하는 것이 기본 임무였다. 이외 각종 민란의 진압에도 동원되었다. 포군은 평상시의 훈련이 매우 강조되었으며, 사격술의 연마에 중점이 두어졌다. 또한 사기 진작을 위하여 전국적으로 화포과가 설치되고 도시(都試) 등에서 조총 과목이 강조되었다. 이들은 전립과 군복, 조총 한 자루, 환도 1자루, 약통 1개 등을 지급받아 무장하였다. 별포군에 편성되면 각 잡역을 면제 받았으며, 화포과를 통하여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으며, 각 지역별로 창감, 향임 등에 진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칠곡의 경우 인동부에 설치한 별포군이 20명에 불과하여 독립된 부대를 편성하거나, 독립된 임무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으며 기존의 부대 조직의 일부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여러 차례에 걸친 외적의 침입을 받으면서 국방력의 강화를 위하여 설치가 논의되었으며, 조선 말기 대원군 집권기에 서양 세력의 침입과 관련한 조선 정부의 대응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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