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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동 이정골 - 전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530
한자 龍亭洞-
이칭/별칭 유정골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가구수 100여 가구

[선돌(장승) 유래]

옛날에 “꼭끼할매”가 치마에 돌을 가져가다가 그 자리에 콱 박았다는 이야기가 있어. 두 개를 가져갔었는데, 지금은 하나만 박혀 있어. (나머지 하나도) 아마 찾아보면 어디에 있을 거여.

(제보자 : 이정진, 남, 1923년 생, 상당구 용정동 46)

금강산에서 일만이천 봉을 수집하는데 이것(선돌)을 가져가다가, 일만이천 봉을 다 쌓아서 완성했다는 소리를 듣고, 여기에 놓았다는 겨. 이게 선돌이라고 다 전설이지 뭐.

(제보자 : 김정헌, 남, 1934년 생, 상당구 용정동 95)

청주시 오목리 다리(남석교)를 쌓는데, 거기에(사용하려고) 돌(선돌)을 가지고 가는데 이미 완성됐다고 해서 그냥 꽂아놓았다는 전설이 있어. 석교동 저 전에 테레비에서 나왔잖아(땅에 에 묻혀 있다는 다리) 그 석교다리를 오목리 다리라고 그랬지.

(제보자 : 박인규, 남, 1930년생, 상당구 용정동 76)

[도적골]

나무하러 다닐 때 저 산성 쪽에 옛날에 도둑들이 많이 댕겨서 도적골이야. 왜냐하면 지금 상봉고개 다니는 길이 산성 한 바퀴 도는데 십 리여. 그래 저저 무성골이니 나락실이니 소 끌고 돌아대(다)녔어. 그래가지고 (도적이) 소를 잡아가고, 그래도 댕길 길이 없거든, 그래 여럿이 다녔겠지.

(제보자 : 이영복, 남, 1942년생,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116번지, 이정골 토박이)

[구중고개 유래]

아홉 선생이 여서 왔다 갔다 하면서 공부를 한겨, 여기를. 여기 서원에 그래서 집에 가면은 시내로 가는겨 그럼 왔다 갔다 하는 겨. (아홉 분은 아세요?) 아, 서원에 다 써 있는데 거기 성이 다 있는데. 여기 길 나면서 없어졌지. 성황당도 있었고, 제일 꼭대기 거기 돌아가려면 머리끝이 섬뜩해, 무서워가지고.

(제보자 : 이영복, 남, 1942년생,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116번지)

구중고개는 아홉 명의 중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보자 : 김정헌, 남, 1934년생,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95)

아니다. 서원에 구정승이 넘어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구중고개다. 구선생 모신 서원이 있다.

(제보자 : 이정진, 남, 1923년생,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46)

전라도고 경상도 등의 퇴임한 구정승이 재산을 모아서 산도 사고 땅도 사서 서원을 지었다. 그리고 그 구정승이 다니던 고개가 구중고개다.

(제보자 : 최용안, 남, 1951년생,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90)

문헌에는 다음과 구중고개에 대해 같은 전설이 전한다.

조선 중엽 광해군(光海君) 때, 청주 고을에 낙향한 한양 벼슬아치 가운데 호조참판을 지낸 이참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외동딸 운선(雲仙)은 그 집 하인으로 일하는 상백(相百)이라는 젊은이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으나, 양반이라는 지체 때문에 감히 의중을 전하지 못하고 상사(相思) 지경에 빠졌다. 마음의 병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면서 헤어날 길이 없는 운선 아씨는 마침내 말 못할 고뇌를 안고 병석에 몸져 눕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참판은 의원을 불러 병맥(病脈)을 살피도록 하고 무당 판수를 불러 병마를 쫓도록 굿을 하는 등 병 고치는 데 최선을 다했으나 백약이 무효로 운선의 병은 조금도 회복되지 않았다.

이때 경기도 용인에 명의(名醫)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참판은 자초지종을 소상하게 적은 서신을 상백 하인에게 들려 그 명의를 초청하도록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안 운선은 동구 밖 성황당 있는 곳에서 상백을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내 스스로가 앓고 있는 병세가 다름 아닌 상백으로 인한 상사병이라는 것을 밝히고 함께 도망가서 살자는 뜻을 전했다. 운선 아씨로부터 사연을 고백 받은 상백은 크게 놀라서 자기와 같은 미천한 하인 놈하고 그와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양반의 손에 죽도록 만드는 것 외에 아무 성사도 없다고 하며, 그 길로 혼자 도망을 쳐 용바위골 낙가산(洛迦山) 기슭에 있는 보살사(菩薩寺)로 들어가 불가(佛家)에 귀의하기로 결심했다.

이 때에 보살사 주지승 보현(普賢) 스님은 상백의 뜻이 일시적인 고뇌 탈피를 위한 흥분에서 온 것으로 간파하고 조용히 보름 동안을 객방에 둔 뒤 마음이 변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상백의 뜻이 초지일관(初志一貫) 변함이 없자 마침내 길일(吉日)을 택하여 삭발을 하고 정각(正覺)이라는 법명(法名)을 내려주어 수도의 길로 인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지스님을 따라 시주를 나온 상백은 공교롭게도 청주성에 들어와 때마침 연연탐색(戀戀探索)하고 있던 운선 아씨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그토록 병이 되도록 상백을 찾고 있던 운선은 그날 밤 보살사 수행방(修行房)을 찾아가 상백에게 그 동안 보고 싶었다는 회포를 말하고, 다시 둘만의 생활을 위해서 절을 빠져나갈 것을 간청했다. 상백은 처음엔 불제자(佛弟子)가 된 몸으로 도저히 그와 같은 짓은 하지 못하겠다고 강경하게 거절을 했으나 운선 아씨의 흐느낌과 호소에 마침내 마음이 변했다. 그리하여 그날 밤 두 남녀는 남몰래 보살사를 빠져 나와 청주성으로 향하던 중 항상 넘나들었던 '이정골고개'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상백은 속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그 고갯길을 넘은 지 석 달도 되지 않아서 환속의 몸으로 고갯길을 넘게 되는 자신의 약한 의지를 개탄하면서 운선 아씨에게 앞으로 떳떳하게 살지 못할 바에야 여기서 함께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며 정사(情死)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자 운선 아씨도 서로가 같은 신분이 아닌 이상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상백이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새벽 마을 사람들은 중들이 넘는 고개에서 목을 매고 죽은 젊은 중과 아녀자의 시체를 발견하고 관가에 알림으로써 그들의 신분이 밝혀졌다.

이에 보살사 주지 보현(普賢) 스님은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고 그 고개를 중들이 왕래하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그리하여 옛 중들이 지나던 고개라고 해서 오늘날 그 고개를 '구중고개[舊僧峙]'라 하고, 새로 넘나드는 길목을 오늘날 '중고개[僧峙]'라 하는데 그 곳이 바로 현재의 용암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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