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5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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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守儀洞- |
이칭/별칭 | 강상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
[천곡 송상현]
우리 천곡(泉谷)할아버지의 출생지는 서울 황하방인데, 지금 그 위치는 정확하게 어딘지는 모르겠어. 내가 알고 있는 이유는 할아버지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천곡 선생의 부친이 서울에 살고 있다는 기록이 있어요. 할아버지가 사신 곳은 현재로는 전라도 정읍시 망재동 마을인데 거기가 천곡이야. 그래서 호가 천곡이구, 거기를 샘골이라 부르기도 해.
임진왜란 때 일본이 명나라를 치러갈 때 목판에 길을 내달라고 했는데 천곡 선생이 “나는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그러니까,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이라고 써서 전쟁이 시작되었어요. 우리 할아버지가 동래에서 전투할 때, 부산에 있을 때, 부사 관인이 있었는데, 무복 위에 관복을 입고 단좌해서 혈서로 부모께 글[고성월운 열진고침 군신의중 부자은경(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을 올린 후 돌아가셨어. 그때 왜놈들은 그것을 빼앗아야 항복을 받는 것인데, 오른손에 그걸 쥐고 그것을 내지 않으니까 오른손을 칼로 쳤어, 그러니까 왼손에 그걸 쥐니까 또 칼로 왼팔을 내리쳤어, 그러니까 입으로 그걸 물었어, 그러니까 목을 칼로 내리치니까 앞으로 쓰러지면 항복을 하게 되니까 뒤로 넘어지신 거야. 그걸 다 학자들이 밝혀냈어.
이제 할아버지 시신이 동래에 전사했을 때 일본사람이 가묘를 했어요, 우리 할아버지를 가묘하고 목판으로 세워 표시를 했어요. 순절 이후 일본 적장이 “조선제일충신 송아무개공”이라고 가묘를 세우니까 거기 위에 삼 년간 천기, 서기가 돌았어요. 붉은 색으로 돌았어요. 일인들이 놀랐다고 그래요. 그런 다음에 이항복(李恒福)이, 왜 오성대감 알지? 그이가 삼도 실정을 조사하는 도중 우리 할아버지 기록을 찾았어요. 임금께 보고를 드렸지. 그래서 선조(宣祖) 임금의 명으로, 그래서 3년 만에 모셔온 거예요, 전란 중에 공의 시신을 청주로 옮길 때 적군이 적극 지원했는데 이는 전사에 유래가 없던 일이야.
후에 선조이 조선의 역술하는 사람이 아니고, 중국의 저 유명한 주자충이라는 사람을 시켜 가지고 조선팔도에 제일 좋은 곳에, 충렬(忠烈) 아니 우리 할아버지를 모셔 들이라는 국왕의 명에 의해 국장으로 모셔 오신 거예요. 그래서 3년 만에 청주에 자리를 잡은 거예요. 우리 후손들이 잡은 것도 아니고 국왕이 시켜서 한 거예요. 묵방산에 이장하면서 후손들이 옮겨온 거예요. 선조가 죽고 나서 광해군(光海君)가 임금 할 적에 지금 사당 안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혼백을 모셔놓은 사당이에요, 그래서 할아버지 후손들이 정착한 것이 여기라고.
여산송씨(礪山宋氏) 지신공파가 살고 있어요. 5파가 있어요, 6대 선조부터예요, 단종비가 지신공파에서, 할머니가 단종의 비에요, 지금도 여주, 이천에 가면 우리 할머니가 단종이 영월에 가셨을 적에, 그래서 소나무가 모두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요. 얼마나 단종을 그리워하고 그랬으면 동쪽을 바라보고 지금도 그런 얘기가 있어요.
산소 주위 사패지라고해서 사방 십 리를 후손들에게 왕이 하사했어요. 산소자리 거기가 명당자리에요. 그래서 할아버지 산소가 여기로 오시면서 정착되었어요.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 강자는 벼루 강(綱)자에요, 강(江)자는 일본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은 거고, 일본사람이 한국을 먹고 난 다음에 행정상으로 그런 거예요. 왜정 때에 간혹 일본사람들도 여기 지나가다가 말에서 내려서 가고 그랬대요.
(제보자 : 송원섭, 남, 1937년생,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 665-12)
(제보자 : 송해만, 남, 1927년생,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강상 마을 178-4)
[정절을 지킨 이소사]
원래 할아버지가 동래부사 가실 적에 정경부인이 성주이씨(星州李氏)에요, 그 할머니가, 옛날에는 부모가 있고 자손이 있으면 부인을 못 데려갔어. 옛 법에, 그리고 동래에 가면 죽음의 길을 가는 거를 아니까 데려갈 수가 없잖아. 그때 할아버지 수발을 들기 위해 따라간 사람들이 한소사라고도 하고 금섬할머니라고 해. 이소사(李召史), 이양녀(李良女)는 일본까지 볼모로 갔다 온 사람이 그분이야, 한소사 할머니는 동래에서 돌아가셨어. 기왓장으로 대항을 하다가 조총에 맞아서 돌아가신 거야. 이양녀, 이소사 할머니는 볼모로 잡혀갔는데 풍신수길이 수청을 들라고 말했는데 거절했지. 그날 밤 그 주위에 지진이 일어나서 왜병이랑 모두가 죽었는데, 이소사 할머니하고 시녀하고만 살았어요. 그 주변에 지진이 나서 다 죽은 거야, 그러니까 풍신수길이 요녀를 데리고 왔다고 어서 빨리 조선에 데려다 주라고, 그래서 다시 조선에 온 거야. 그래서 송가 본가로 와서 아드님 병 수발하다가 전라도사로 있던 천곡할아버지의 동생인 상자 임자 할아버지가 마침 부인이 돌아가셔서 거기 가서 수발을 드셨지. 이후에 돌아가셔서 지금 금섬할머니 묘에 단하고 묘비만 세웠어요.
(제보자 : 송원섭, 남, 1937년생,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 665-12)
(제보자 : 송해만, 남, 1927년생,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강상 마을 178-4)
[전의 이씨 묘의 형국]
전의 가봤어? 전의이씨는 전의에 살면 안돼. 폭삭 망해. 전의를 떠나야 잘 산다는 겨. (조사자 질문) 전의이씨 선조 묘가, 그 자리가 호랑이가 개를 끌어안고 있는 형국이야. 나도 몇 번 가봤어. 호랑이가 개를 끌어안고 있는 형국이라 전의를 떠나야 잘 산다는 거야.
(제보자 : 송해만, 남, 1927년생,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강상 마을 17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