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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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記錄金石文 |
영어의미역 | Historical Records Inscribed on the Ancient Stone Monuments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상일 |
[정의]
쇠붙이와 돌에 새긴 살아있는 역사기록이며 선조들의 삶과 사건의 생생한 증거
[개관]
금석문은 크게 금문과 석문으로 나누어진다. 금문은 금속류의 용기·악기·무기·화폐·인장·경감·조상·범종·도량형 등에 주출되었거나 새겨진 문자이며, 석문은 석재의 비·묘지·조상 등에 새겨진 문자이다. 금문의 대표적인 경우는 「칠지도명」·「환두대도명」·「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광배문」·「상원사종명」·「성덕대왕신종명」 등이 있고 석문의 대표적인 경우는 「안악 3호분 묵서명」·광개토왕(廣開土王)비·중원고구려비·무령왕릉지석·단양적성비 외에 각종 비석의 비문과 묘비 등이 있다. 이러한 금석문을 연구하는 학문을 금석문이라 하며,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기입 대상물의 재료, 용도에 따라 비문, 묘지, 불상명문, 종명, 도검명, 목간, 토기명문, 와전명, 그리고 묵서명, 암각문 등, 그 분류 기준에 따라 위와 같이 분류한다.
금석문의 특징은 한번 새겨진 내용은 마멸되거나 훼손시키지 않는 한, 영구히 보존된다는 것에 있다. 그런 이유로 금석문은 사서의 내용과 비교하면서 역사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금속유물에 새겨진 글씨]
금문이란 일반적으로 금속류에 주출되거나 새겨진 명문을 말한다. 도검류와 동경, 동종, 금동불상 등의 청동제 및 철기류로 된 것들에 명문이 있는 것을 이른다.
1. 「흥덕사명」 금구(興德寺銘 禁口)
흥덕사지(興德寺址) 발굴조사 당시인 1985년 10월에 사지의 동쪽 훼손부분에서 수습된 것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두 조각을 합하면 측면에 ‘갑인오월 일 서원부흥덕사금구일좌 개조입중삼십이근인(甲寅五月日西原府興德寺禁口壹座改造入重參拾貳斤印)’이라 음각된 명문이 확인된다. 일부 파손이 있어 금구의 전면과 후면이 불분명하나 각기 다른 면에 당초문과 연화문이 양각되어 있고, 명문은 측면에 양각되어 있다. 이와 같은 연화문과 당초문의 문양이나 서원부라는 지명에서 볼 때, 금구의 제작연대에 해당되는 ‘갑인년’은 고려 광종 5년(954)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이 사지의 이름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곳이 금속활자본『직지』가 인쇄된 곳임을 증명하게 된 중요한 자료이다.
2. 「황통십년 흥덕사명」 청동불발(皇統十年 興德寺銘 靑銅佛鉢)
1986년 5월에 있었던 흥덕사지(興德寺址) 주변지역 정밀조사에서 발견된 것으로 얇은 동판으로 만든 직립구연부의 복발형 불발이다. 이 구연부에 “황통십년경오사월 일 흥덕사의지중대사령인왕생정토지원불발일합구삽운구입중이근이량인(皇統十年庚午四月 日興德寺依止重大師領仁往生淨土之愿佛鉢一盒具鈒雲口入重二斤二兩印)”이라는 음각의 명문이 있다. 이중 ‘황통십년경오’는 고려 의종 4년(1150)에 해당되어 이 일대에서 함께 출토된 유물들의 연대추정은 물론 이 불발이 흥덕사에서 사용되었던 것이고, 또 이 사지가 바로 흥덕사의 유지임을 재확인 시켜주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된 유물이다.
고려시대 청주의 대표적 사찰인 용두사지(龍頭寺址)에서 전하는, 높이 12.7m의 거대한 철제당간으로 청주시 남문로 2가, 현재 청주백화점 서편에 위치하고 있다. 철제당간에 있는 준풍(峻豊) 3년(고려 광종 13, 962)의 주성기에 의하면 이 당간이 고려 초 청주의 대표적 호족인 김예종(金芮宗), 김희일(金希一) 형제 양가의 발원에 의해 세워졌고, 30단의 철통으로 60척의 높이였음을 알 수 있다. 철조당간을 받치고 있는 석조당간지주는 아래가 넓고 위가 좁으며 양쪽 밖으로 곡선을 그리고 있는 단순한 기둥형태이고 윗부분과 중간 부분이 묶여져 있다. 지주 사이에는 좌석이 놓여 있다. 철통은 현재 20단만 남아 있으며 아래로부터 3번째 철통에 「유준풍삼년(維峻豊三年)」이라는 주성기가 양각되어 있다.
용두사는 고려시대 청주지역의 중심 사찰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15권 청주목 고적조에 따르면 용두사가 이미 폐사되어 당간만 남아 있음을 전하는 것으로 보아, 폐사는 조선시대 초 이전임을 알 수 있다.
[비석을 통해본 청주 역사의 발자취]
석문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비석이나 묘비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비석과 묘비 외에 석재(石材)에 조출되거나 새겨진 모든 것을 일반적으로 석문이라 한다.
1. 사적비
(1) 운천동 신라사적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4호로 국립청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이 사적비는 청주시 운천동 속칭 산직말마을 입구에 놓여 빨래판으로 사용되다가, 1982년에 발견되어 학계에 알려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적비이다.
이 비는 거의 정방형으로 단단한 화강암제인데 오랜 세월 동안 빨래판으로 사용되어 마멸이 심한 상태이다. 3면에 걸쳐 비문이 확인되고 있으나 사면비로도 추정된다. 비의 상단은 절단되고 하단부만 잔존하며 명문은 현재 90여자가 판독되고 있다.
비문 중에“壽拱二年歲次丙戌(수공이년세차병술)”이라는 대목이 있어 당의 측천무후 수공이년(垂拱二年 : 병술)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신라 신문왕 6년(686)에 해당된다. 비문의 내용은 불법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시작하여, 국왕의 덕을 칭송하고 삼한을 통일한 위업이 서술되었으며 그 다음에 사적비로서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
(2) 삼충사 사적비
청주시 수동에 위치하고 있다. 이인좌(李麟佐)의 난(1728) 때 청주성을 지키다 순절한 병사 이봉상(李鳳祥)[1676~1728], 영장 남연년(南延年), 비장 홍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삼충사(표충사)의 사적비로 조선 영조 7년(1731)에 이덕수가 찬하고 조문명이 전하여 세웠다.
(3) 구룡사지 사적비
청주 상당산성 남문 앞에 서 있는 비로 조선 영조 40년(1764)에 은재거사(隱齋居士)가 찬하고 새겨서 건립하였으며, 상당산성과 구룡사(九龍寺)의 창건 유래 및 중창 불사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구룡사(九龍寺)는 청주 상당산성 서남암문 안쪽에 있던 사찰로 조선 숙종 46년(1720)에 절도사 이태망(李台望)과 우후 홍서일(洪敍一)이 영사(營舍)를 신축하고 연못을 팔 때 함께 도천(道天) 스님이 창건한 절이다.
(4) 보살사 중수비
숙종 9년(1683)에 보살사를 크게 중수하고 기념하여 세운 비로, 현재는 비문만 전하고 비는 파손되어 땅에 묻혔다. 전에는 극락보전 뒤쪽에 있었는데 1988년에 사찰 측에서 사찰 입구로 옮기려다 부주의로 파괴되었다. 보살사의 연혁과 중수에 대해 밝히고 있는 비이므로 원형대로 복원하여 원위치에 세워져야 할 것이다.
2. 기적비
(1) 조헌(趙憲)[1544~1592] 전장기적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6호인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청주성을 탈환한 조헌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청주시 중앙공원 내에 있다.
조헌의 본관은 배천, 자는 여식, 호는 중봉 또는 후율이다. 명종 22년(1567)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국정에 헌신하였고 학문 연구에 힘써 학자로서도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승장 영규대사(靈圭大師)[?~1592]와 합세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그 후 적이 금산을 거점으로 충청도 일대를 유린하려 하자 영규대사와 함께 700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적과 싸워 막대한 타격을 주고 중과부적으로 전원 옥쇄하였다.
이 비는 팔작지붕의 개석을 갖춘 일반형 비로 비제는 “文烈公趙先生紀蹟碑(문열공조선생기적비)”이다. 숙종 36년(1710) 서문동에 세웠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2) 영규대사 전장기적비
임진왜란 때 조헌과 더불어 청주성 탈환전에서 승병을 이끌었던 영규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4년에 세운 전적비로 청주시 중앙공원 내에 있다. 비제는 “義僧將騎墟堂靈圭大師戰場紀蹟碑(의승장기허당영규대사전장기적비)”이다.
영규대사의 속명은 박씨(朴氏), 본관은 밀양, 당호는 기허당(騎虛堂)으로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로 선장(禪杖)을 가지고 무예를 연마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승병을 이끌고 조헌의 의병과 연합하여 청주성을 탈환하고, 이후 전라도를 유린할 목적으로 남하하던 왜적을 금산에서 맞이하여 조헌과 함께 전원 옥쇄하였다. 사후 금산의 종용사(從容祠)에 배향되었으며, 법도·대인 등이 진락산 서쪽 기슭에 세운 영각(靈閣)에는 ‘의선(毅禪)’이란 편액이 하사되었다.
(3) 박춘무(朴春茂)[1544~1611] 전장기적비
임진왜란 때 청주성 탈환전에서 향토의병을 이끌었던 박춘무의 공적을 기려 1988년에 세운 전적비로 청주시 중앙공원(中央公園) 내에 있다. 전액(篆額)은 “愍襄公花遷堂朴先生戰場紀蹟碑銘(민양공화항당박선생전장기적비명)”이다.
박춘무의 본관은 순천, 호는 화천당(花遷堂)으로 학행으로 장령에 뽑혔으며 벼슬은 찰방을 지냈다. 임진왜란을 만나 거병하여 조헌, 영규대사의 의병과 연합하여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우고, 진천에서도 왜적을 격파하였다. 이후 인천부사를 지냈으며, 사후 참찬(參贊)이 추증되고 민양(愍襄)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3. 선정비
(1) 목사 서유민 선정비
조선 후기에 청주목사를 지낸 서유민의 선정을 기려 헌종 8년(1842)에 세운 비석이다. 청주시 중앙공원(中央公園) 내에 위치하고 있다. 비제는 “牧使徐公有民淸簡善政碑(목사서공유민청간선정비)”이며, 뒷면에 건립시기를 새겼다.
(2) 목사 김효성(金孝誠)[1585~1651] 선정비
조선 인조대에 청주목사를 지낸 김효성의 선정을 기려 효종 2년(1651)에 세운 비석으로 청주시 중앙공원 내에 있다. 비제는 “牧使金公孝誠淸白善政碑(목사김공효성청백선정비)”이다.
김효성의 본관은 광주, 자는 행원으로 광해군 7년(1615)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추방하려는 자들을 탄핵하다 길주로 유배되었고, 이어 진도로 유배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의금부도사, 청안현감을 거쳐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3) 목사 이경여(李敬輿)[1585~1657] 선정비
조선 인조대에 청주목사를 지낸 이경여의 선정을 기려 인조 9년(1631)에 세운 비석으로 청주시 중앙공원(中央公園) 내에 있다. 비제는 일부 훼손이 있으나, “行牧使…德善政碑(행목사…덕선정비)”이며, 좌측면에 “淸白我公 勒之貞珉 化浹仁明 永留風聲 (청백아공 늑지정민 화협인명 영유풍성)”이라는 선정을 찬양하는 명문이 있다.
이경여의 본관은 전주, 자는 직부, 호는 백강(白江) 또는 봉암으로 광해군 1년(1609)에 문과급제하였으며, 인조 8년(1630)에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이후 영중추부사를 거쳐 효종 대에는 영의정을 지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4) 병사 이참□ 마애선정비
충청병사를 지낸 이참□의 선정을 기려 세운 마애비로 청주시 산성동 것대봉수에서 시내로 향하는 등산로 중턱의 자연암반에 병사민지열(閔祉烈) 마애선정비·병마우후 이의장(李義長) 마애선정비와 함께 나란히 암각한 형태로 있다.
(5) 병사 민지열 마애선정비
충청병사를 지낸 민지열의 선정을 기려 세운 마애비로 청주시 산성동 것대봉수에서 시내로 향하는 등산로 중턱의 자연암반에 병사 이참□ 마애선정비·병마우후이의장 마애선정비와 함께 나란히 암각한 형태로 있다.
(6) 병마우후 이의장 마애선정비
병마우후로 있던 이의장의 선정을 기려 세운 마애비로 청주시 산성동 것대봉수에서 시내로 향하는 등산로 중턱의 자연암반에 병사 이참□ 마애선정비·병사 민지열 마애선정비와 함께 나란히 암각한 형태로 있다.
(7) 병사 심의풍(沈宜豊) 선정비
조선 고종대에 충청병사를 지낸 심의풍의 선정을 기려 고종 1년(1864)에 세운 선정비로 청주시의 동쪽에 위치하는 우암산 순회도로의 일명 비선거리에 있다. 비제는 “兵使沈公宜豊撫恤軍民淸簡善政碑(병사심공의풍무휼군민청간선정비)”이고 뒷면에 건립시기를 밝혔으며, 좌측면에 건립내력을 밝히고 있다.
(8) 영장 정종현(鄭宗鉉) 선정비
조선 고종대에 충청병영의 영장을 지낸 정종현의 선정을 기려 고종 원년(1864)에 세운 선정비로 청주시의 동쪽에 위치하는 우암산 순회도로의 일명 비선거리에 있다. 비제는 “營將鄭公宗鉉淸簡善政碑(영장정공종현청간선정비)”이며 좌·우면에 명문이 있고, 후면에 건립시기를 밝히고 있다.
(9) 김(金)찰방 선정비
조선시대 율봉도찰방을 지낸 김(金)□□의 선정비로 청주시 율량동 양지마을에 위치한다. 전면에 “行察訪兼外史官金公(행찰방겸외사관김공)”까지만 보이며 그 이하는 땅속에 묻혀있다.
(10) 찰방 허직 선정비
조선 고종대 율봉도찰방을 지낸 허직의 선정비로 고종 2년(1865)에 건립되었다. 현재 청주시 율량동 양지마을에 있으나 절반이 땅속에 묻혀 있어 보존상태가 좋지 못하다. 전면에 “行察訪許公稷永世(행찰방허공직영세)”까지만 보이며, 후면에 건립시기가 새겨져 있다.
(11) 병사 홍재의 선정비
조선후기 충청병사를 지낸 홍재의의 선정을 기려 고종 25년(1888)에 세운 비석으로 모충사 입구 외정 우측에 있다. 비제는 ‘숭정대부행병마절도사홍공재의영세불망비(崇政大夫行兵馬節度使洪公在義永世不忘碑)’이며, 좌우면에 명문이 있고, 후면에 건립시기를 새겼다.
4. 불망비
(1) 병마우후 신태희(申泰羲) 불망비
조선 철종대에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의 병마우후를 지낸 신태희의 선정을 기려 철종 10년(1859)에 세운 비석으로 비제는 ‘병마우후신공태희영세불망비(兵馬虞侯申公泰羲永世不忘碑)’이며, 뒷면에 건립시기를 새겼다. 청주시 산성동 마을에서 서문으로 올라가는 길 왼쪽의 커다란 자연석 바위위에 위치한다.
(2) 절도사 구완식 불망비
조선 고종대에 충청병사를 지낸 구완식의 선정을 기려 고종 30년(1893)에 세운 불망비로 청주시의 동쪽에 위치하는 우암산 순회도로의 일명 비선거리에 있다. 비제는 ‘절도사구공완식거사불망비(節度使具公完植去思不忘碑)’이며 좌, 우면에 명문이 있고, 후면에 건립시기를 밝히고 있다.
(3) □명수불망비
청주시의 동쪽에 위치하는 우암산 순회도로의 일명 비선거리에 있는 8기의 비석 중 가장 우측에 있는 비석이다. 일부 훼손이 있어 비제는 ‘…공명수영세불망비(…公命洙永世不忘碑)’이며, 좌우·후면에 명문이 있다.
5. 신도비
(1)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1551~1592] 신도비
청주시 수의동 산 1-1번지에 있다. 지방기념물 제66호로 1984년에 지정되었다. 충렬(忠烈) 송상현은 선조 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로 있으면서 동래성으로 침략한 왜병과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신도비는 묘소 입구의 강촌마을에 있는데, 화강암으로 이수에는 조각이 정교하며 효종 10년(1659)에 세웠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이정영(李正英)이 전각을 하였다. 비의 높이가 280㎝로 1980년에 보호각을 새로 지었다.
(2) 곽예(郭預)[1232~1286] 신도비
청주시 명암동에 있으며, 고려지밀직사사청주인(高麗知密直司事淸州人) 연담(蓮潭) 곽예의 신도비로 조선 고종 21년(1884)에 김복한(金福漢)이 찬하고 오영근이 서하여 세웠다
(3) 박숭원(朴崇元) 신도비
조선 선조대의 문신 박숭원의 신도비로 청주시 수의동 도장골마을 입구 좌측 둔덕에 위치하고 있다. 제액은 “漢城府判尹贈左贊成諡忠靖密陽朴公神道碑銘(한성부판윤증좌찬성시충정밀양박공신도비명)”이다.
박숭원의 본관은 밀양이며 임진왜란 때는 판한성부사로 있으면서 선조(宣祖)를 호종하여 밀천군(密川君)에 봉해졌다. 그의 묘소는 도장골 뒷산인 청룡산 정상에 있다.
6. 묘비
(1) 박민준(朴敏俊)[1676~1744] 묘비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공적을 세운 박민준의 묘비로 청주에서 부강으로 가는 서부도로 충북공고 부근의 오른쪽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철종 10년(1859)에 세웠으며 비제는 “揚武一等功臣贈通訓大夫司憲府指平朴公敏俊之墓 淑人和順崔氏祔右麓 繼配李氏墓在北面金川 (양무일등공신증통훈대부사헌부지평박공민준지묘 숙인화순최씨부우록 계배이씨묘재북면금천)”이다.
박민준의 본관은 순천, 자는 언백(彦伯)이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을 만나 형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상당산성 북장대에서 이인좌의 동생 이기좌(李麒佐)를 참살하여 난의 진압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공로로 양무일등공신에 책록되었다.
7. 기타 기념비
(1) 척화비
청주시 중앙공원(中央公園) 내에 있다. 지방기념물 제23호로 1978년에 지정되었다. 척화비는 고종 8년(1871) 대원군이 신미양요를 치른 뒤 백성들에게 서양에 대한 강한 항전의식을 심어주기 위하여 서울 및 전국의 요충지에 세웠던 비중의 하나이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의 12자의 내용을 담고 있지만 상단부가 깨어져 ‘양(洋)’자와 ‘즉(則)’자가 없어졌다. 이 비는 1976년에 석교동 노상 하수구 뚜껑으로 있던 것을 발견하여 현 위치로 옮긴 것인데 석질이 좋지 않아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 아니다.
(2) 청주 신항서원 묘정비
충청북도 기념물 제42호인 이 비는 조선 선조 3년(1570) 창건되어 현종 1년(1660)에 사액을 받은 신항서원의 묘정비로서 비좌와 개석을 갖추고 있으며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신항서원은 당초 유정서원이라 하여 이 지방의 선현인 경연(慶延)·박훈(朴薰)[1484~1540]·김정·송인수(宋麟壽)[1487~1547] 등을 제향하였으나 임진병화 후에 개건한 후 한충·송상현·이득윤(李得胤)[1553~1630]·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이색(李穡)[1328~1396] 등을 추향하였다.
묘정비는 숙종 11년(1685)에 세웠는데 서원의 연혁과 9현의 약력을 적고 있다. 비문은 송시열이 찬하고 조향기가 서하였으며 김수항(金壽恒)이 전자를 썼다. 목조와가의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3) 무농정 유허비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대표적인 씨족 중의 하나인 청주 한씨 종중에서 세운 누정인 무농정(務農亭)의 옛 터에 세운 표석으로 숙종 14년(1688)에 세웠다. 앞면에 ‘무농정’이라고 새겼고, 뒷면에는 기문이 있는데 그 내용은 후손으로 충청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한 한근이 무농정의 옛 터를 찾아내어 토단을 쌓고 표석을 세웠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4) 이이수식송비
조선중기 기호학파의 종장 율곡(栗谷) 이이가 청주목사를 떠날 때 직접 소나무를 심은 사실을 기념하여 고종 3년(1886)에 세운 표석으로 청원군청 내에 있다.
(5) 양수척(楊水尺) 효자비
조선 전기의 효자 양수척의 효행을 기려 세운 비석으로 청주시 운동동 비선거리에 위치한다. 전면에 “孝子楊水尺之碑(효자양수척지비)”라 새기고, 후면에 건립시기를 새겼다.
(6) 의병홍재의존성비
조선 고종년간에 충청병사를 지낸 홍재의의 유학 진흥을 기려 고종 25년(1888)에 세운 선정비로 청주향교에 있다. 비제는 “兵馬節度使洪公在義尊聖碑(병마절도사홍공재의존성비)”이며, 좌우·후면에도 명문이 새겨있다.
(7) 청주 한씨 시조 제단비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대표적인 씨족 중의 하나인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시조인 한란(韓蘭)[?~?]을 제사하기 위하여 제단을 마련하고 함께 세운 사적비로 청주시 운동동 다릿골마을 뒷산 끝자락의 밭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선조 38년(1605) 청주목사겸 청주진병마절제사로 부임한 한백겸이 시조인 한란의 유적을 고증하여 찾고, 그 동생 이조참판 한준겸(韓浚謙)이 후손들에게 선조의 내력을 알려줄 목적으로 비문을 지어 건립하였다. 한란은 고려 초기 청주지역의 호족으로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견훤(甄萱)을 정벌하기 위해 청주를 지날 때 군량미를 도와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봉해지고 개국공신이 되었다. 한백겸[1552~1615]은 선조 37년(1604)에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