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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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淸州-防禦-淸州邑城 |
영어의미역 | Cheongjueupseong Fortress built for the protection of Cheongj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양식 |
[정의]
고대부터 청주의 정치, 행정, 군사, 사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조선시대의 석축읍성.
[개설]
조선시대 축조된 청주읍성은 청주시의 최고 최대의 역사유적지이다. 청주의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그 흔적을 시내 중심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청주읍성은 청주의 보금자리요 청주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곳이다.
[건립경위]
청주읍성은 읍성의 나라였던 조선왕조 때 돌로 쌓은 것이지만, 그 뿌리는 매우 깊다. 백제는 청주지역을 상당현으로 통치하였다. 상당현의 중심지가 어디였는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현재 밝혀진 바로는 신봉동 일대에 백제시대의 고분이 많고 그곳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기 때문에 신봉동을 상당현의 중심지로 보기도 하나, 청주읍성 자리도 부정할 수 없다.
그 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신문왕 때인 685년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하고 4년 뒤인 689년에 서원경성을 쌓았다. 신라의 왕성 배치구조는 하천을 자연 해자로 삼아 평지에 성을 쌓고 사방을 일정하게 구획하는 형태였다. 서원경성 역시 무심천(無心川)을 해자로 삼아 바둑판 모양의 시가지가 성으로 둘러싸여 도성 형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서원경성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서원경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조선시대의 청주읍성 자리가 신라시대에도 중심지였다는 점이다. 그곳에는 사찰이 있었고 많은 민가가 있었다.
고려시대 역시 청주는 정치·행정 등의 중심지였다.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청주에 나성(羅城)을 쌓도록 하였다. 청주나성은 10세기 전반에 고려왕조가 건설한 최초의 나성으로, 우암산(牛岩山)[338m]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성은 오늘날 우암산(牛岩山)[338m]에 있는 산성으로 흥천사·천응사 같은 사찰이 있었다. 외성은 조선시대의 읍성 터로, 그 안에는 남문·북문·관사·민가·객관(客館)·취경루(聚景樓)·압각수·용두사 등이 있었다. 그리고 공북루와 영모정 등의 누정(樓亭)이 나성의 북쪽에 있었고, 서쪽으로는 지금의 운천동에 사뇌사·흥덕사, 남쪽으로는 청주 한씨의 세거지인 방정(方井)이 있었다. 당시의 청주성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우암산(牛岩山)[338m] 안팎으로 성이 있고, 무심천변에 있는 여러 사찰들은 아침저녁으로 종소리를 울려대고, 용두사 철당간에는 깃발이 펄럭이고, 하늘로 솟아오르듯 서 있는 누정에서는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는 고려시대 청주성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압각수 은행나무에 얽힌 이야기나, 공민왕(恭愍王)이 청주 관아의 부속 누정인 취경루(聚景樓)(현재, 망선루)에서 과거를 설행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공민왕은 1362년 10월 친히 취경루(聚景樓)에 올라 과거시험을 주관하였는데, 이날 장원급제자는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인 정도전(鄭道傳)을 비롯한 33명이었다. 매우 뜻깊은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으나, 청주성은 1390년 장마 폭우로 냇물이 넘쳐 성 안을 휩쓸고 지나가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청주성이 복구되는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이다. 읍성의 나라였던 조선왕조는 각 군현의 치소(治所)에 읍성을 쌓도록 하였는데, 청주읍성은 성종 18년인 1487년 2월에 완공되었다. 돌로 쌓은 읍성의 둘레는 1,084보(步) 내지 3,648자이고 높이는 8자였다. 성 안에는 13개의 우물이 있었다. 시설물로는 객관(客館)과 목사가 집무하는 동헌(東軒), 옥(獄), 객관의 동쪽에 있는 망선루(望仙樓)[취경루(聚景樓)를 한명회(韓明澮)가 이름을 고침], 동헌의 북쪽에 있는 청연당(淸讌堂) 등의 각종 관청건물과 창고 등이 있었다. 성 밖에는 성리학적인 통치이념에 따라 동쪽에는 향교, 서쪽에는 사직, 북쪽에는 잡된 귀신을 제사하는 여단(厲壇) 등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고려 때와는 달리 성 안팎에 있던 사찰은 모두 철거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선 초의 청주읍성은 장마 때 무심천(無心川) 범람으로 홍수 피해를 입거나,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을 겪으면서 퇴락해 갔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청주성을 점령하고 의병이 탈환하는 과정에서 아마도 읍성의 많은 시설물이 손상되었을 것이다.
그 뒤 정부는 군사적 설비를 다시 정비하면서 효종 때인 1651년에 충청도 54개 고을의 육군을 총괄하는 충청도병마절도사의 주둔지인 병영을 해미로부터 청주로 옮겼다. 이러한 병영의 이동으로 청주읍성은 큰 변화를 겪는다. 청주목사가 정3품의 당상관의 품계를 가진데 비하여 충청병사는 이보다 한 등급이 높은 종2품의 품계를 가진 사람 으로 보임되었기 때문이다. 읍성은 이제 병영성으로서의 역할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읍성 겸 병영성을 보완하는 청주 상당산성이 병영 소속으로 경영되었다. 병영이 이동된 지 3년 뒤인 1654년에는 옥천에 있던 중영(中營) 영장(營將)이 청주로 자리를 옮기었다. 이로써 청주는 행정·사법의 중심도시 위에 군사도시의 기능을 더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충청병영이 설치된 청주읍성은 보잘 것이 없었다. 좌우로 큰 내가 흐르는 성벽은 무너져 내려 성 같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영조 4년인 1728년 3월 15일에 이인좌(李麟佐)가 이끄는 반란군이 청주읍성을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반란군의 청주성 점령은 큰 충격이었다. 조선정부는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청주읍성을 수축하도록 하였다. 이 때가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 다음해인 1729년이었다. 전보다 규모가 커지고 성벽의 높이도 높게 축조되었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있었고, 특히 남문과 북문에는 옹성이 있었다. 문루는 4개의 문 가운데 서문만 없었다. 조선초기에 13개였던 우물은 12개로 줄어들었다. 성벽 둘레는 1,427보(步)였다. 성 안의 관아와 병영 시설도 증개축하여 규모도 확대되었다.
[청주목과 관련한 읍성 안의 시설]
객사(西原館) : 망선루와 함께 관아 북쪽에 위치. 왕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출장 온 관리들이 머무르는 곳으로, 건물은 22간의 규모였음.
동헌 : 근민헌(近民軒)이라 편액. 목사가 정사를 보는 건물. 서원현감 이병정(李秉鼎)이 창건하였는데, 뒤에 청녕각으로 고쳐졌음. 10칸짜리 건물로 현재 상당구청 안에 남아있음.
중동헌(中東軒) : 경한당(景韓堂)이라 편액. 숙종 때 서원현감 이형직이 창건, 8칸 규모임.
향사당(鄕射堂) : 8칸으로 유향의 품관들이 모이는 장소. 청주목사에 자문하고 이속을 규찰하던 곳임.
주사(州司): 청주목의 행정 실무를 보는 곳으로 6칸 건물.
작청(作廳) : 청주목의 행정사무를 보는 육방서리들의 집무청, 8칸 건물.
군관청(軍官廳) : 6칸으로 청주목에 소속된 군관들의 집무처.
집사청(執事廳) : 5칸으로 청주목 동헌 남쪽에 있는 건물로 실무행정을 담당한 곳.
무학당(武學堂) : 10칸으로 청주목 소속의 여러 장교들의 처소.
작대장청(作隊將廳) : 6칸으로 군병 훈련과 관련된 장교들의 처소.
창고 : 동창(東倉) 20칸, 서창(西倉) 24칸, 대동고(大同庫) 15칸, 군작미고(軍作米庫) 6칸, 관청고(官廳庫) 6칸, 장적고(帳籍庫) 8칸 등
[병영에 소속된 읍성안의 시설]
청진당(淸塵堂) : 병마절도사의 처소로 12칸 건물
삼석당(三錫堂) : 병마절도사가 좌기하는 살림집
후당·반시당(後堂·反始堂) : 각각 8칸과 6칸으로 도서실이다.
아사(衙舍) : 14칸으로 운주헌이라 부름. 병사의 집무소
거입정(去入亭) : 6칸으로 휴식을 취하는 누각
통군루(統軍樓) : 2층 12칸으로 일종의 병사 지휘소
폐문루(閉門樓) : 12칸으로 아래의 1층은 문을 만들고 그 위에 누다락을 만든 것으로 병영을 출입하는 원문, 현재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忠淸道兵馬節度使營門)으로 중앙공원 내에 있다.
비장청(裨將廳) : 18칸으로 병사를 보좌하는 비장이 있는 곳
집사청(執事廳) : 10칸으로 실무를 보는 사무실
영리청·진무소(營吏廳·鎭撫所): 각기 18칸씩으로 영리와 진무들의 사무소 등.
이처럼 이인좌의 난을 겪은 청주읍성은 영조 때 완연한 읍성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읍성 안에 거주하는 호구는 총 421호 1,363명으로, 청주목 전체 호구의 3,3%, 전체 인구의 3.18%로써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주로 관리와 군교·노비들로서, 청주목에 소속된 아전·사령·노비 214명, 병영에 소속된 비장·파총·나장 800여명 등이었다. 여러 시설물이 들어차 있고 각종 사람들로 북적이는 청주읍성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영조(英祖)에 이어 정조도 1785년에 청주읍성을 다시 수축하도록 하였는데, 공사기간이 무려 10여년이나 소요되었다. 이 때는 성벽 뿐만 아니라 성벽 위의 여장(女墻)까지 쌓았다. 이로써 역사적인 청주읍성이 최종적으로 완성되기에 이르렀는데, 성벽 둘레는 1,350보, 높이는 8자, 여장은 566첩(堞), 포루는 8곳, 우물은 12개가 있었다.
이와 같은 청주읍성의 모습은 현재 읍성지도가 남아 있어 생생히 엿볼 수 있다. 특히 「청주읍성도」에 보이는 성곽이나 4대문, 도로의 위치는 현재의 지형과 대부분 일치하고 있어 사실적이다. 그럼 지도 속으로 여행을 떠나 보자.
지도에 나타난 청주읍성은 크게 두 구간으로 구획된다. 하나는 현재의 중앙공원(中央公園) 일대에 자리한 충청병영으로 충청도병마절도사가 기거하던 곳이고, 또 하나는 현재의 청원군청과 옛 청주경찰서 터에 위치한 청주목으로 청주목사가 근무하던 곳이다. 이 두 공간의 경계선은 현재의 청주우체국을 중심으로 족발골목으로 통하는 길 안쪽이다.
읍성에는 4개의 문이 있었는데, 동문을 벽인문(闢寅門), 서문을 청추문(淸秋門), 남문을 청남문(淸南門), 북문을 현무문(玄武門)이라고 하였다. 남북으로 긴 장방형 구조인데, 남문과 북문은 오늘날 성안길과 일치하는 큰 길이 직선으로 이어져 있으며 동문과 서문 사이는 어긋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성벽 네 모퉁이는 모두 성벽을 따라 삼각지를 형성하면서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는데, 지금도 성벽의 모퉁이가 위치한 곳은 모두 살짝 꼬부라져 있어 성벽의 자취를 엿볼 수 있다. 무심천(無心川)은 남쪽에서 서쪽으로 흘러가는데, 현재의 무심천(無心川) 위치보다 훨씬 안쪽으로 흐르고 있다.
북문인 현무문(현재의 성안길 북쪽 입구)을 들어서면, 남쪽으로 남문인 청남문(현재의 국민은행 청주지점 앞)에 이르도록 똑바로 길이 나 있다. 이 길이 현재의 성안길이다.
북문을 들어서서 서쪽으로 초가집의 민가 사이에 기와집이 있었는데, 이것이 영조 때 이인좌의 난 때 희생된 병사(兵使) 등을 모신 표충사(表忠祠)이다. 1791년에 건립되었다. 그 동측에 당시 함께 죽은 열기(烈妓) 해월(海月)의 사당도 있다.
북쪽 성벽을 따라 서쪽으로 모퉁이를 도는 곳(지금의 대한투자신탁 서쪽 모퉁이 따로 떨어진 땅)에는 뚝(纛)을 제사지내는 터가 있었으며, 여기에 커다란 나무가 그려져 있다.
4개의 성문 안쪽에는 문을 들어서서 바로 오른쪽에 기와집이 한 채씩 그려져 있다. 그곳이 수문장(守門將)을 비롯한 문을 지키는 병사들의 사무처이다.
성안은 크게 3개의 건물들이 모여 있는 중앙구역이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다. 성 전체의 중앙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객관과 동헌을 비롯한 청주목 관련의 치소(治所) 건물이 구역을 차지하고, 그 남쪽으로 사창(司倉)의 구역이 있으며, 그 남쪽으로 병영이 있다. 객사 서쪽으로는 군기고가 있고, 병영 서쪽으로는 진휼고 등의 각종 창고, 병영 남쪽으로는 아전과 영리들의 집무관련 시설들이 있다.
치소의 동쪽 구역에는 연방(緣房)이라는 육방 서리들의 건물이 있고, 병영의 동쪽 구역에 장청(將廳)이 있다. 병영 입구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길이 있는데, 그 남쪽 언저리에 고마청 등의 건물이 즐비하다. 지금의 남사로 일대이다.
성 안에도 별도의 문이 있다. 서문(현재 서문동 5거리 족발골목 입구) 안쪽에는 병영 서쪽 담 근처에 내서문(內西門)이 있고, 동문(현 청주백화점 입구)을 통해 동헌 외삼문을 가려면 커다란 홍전 삼문(紅箭三門)이 있다. 동문을 들어서면, 남쪽으로 감옥이 있다. 높은 둥근 담장으로 둘러싸인 내부에 기와집이 그려져 있다.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은 지금의 그 자리에 그려져 있다. 우물도 성안에 8곳이 그려져 있다. 압각수를 비롯하여 버드나무 등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변천]
1790년대에 상당한 규모로 수축된 청주읍성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쇠락하는 가운데 20세기에 들어와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였다.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5일에 걸친 장마 비는 무심천(無心川)을 넘어 성 안까지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2년 뒤인 1908년 6월 5일 충청북도 관찰부가 충주에서 청주로 옮겨 옴에 따라, 청주읍성은 충청북도의 부성(府城)이 되었고 동헌인 청녕각이 청사로 사용되었다.
그 무렵 청주읍성은 퇴락하였지만, 의연히 자기 모습을 지켜내고 있었다. 성벽은 성벽 위의 여장만 무너진 부분이 많았을 뿐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었다. 남문인 청남문의 문루도 견고하게 서 있었다. 성 안에 있던 관아와 병영의 여러 건물도 감옥만 사라졌을 뿐 거의 그대로 있었다. 8개의 우물도 많은 물이 샘솟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0년 충청북도장관으로 임명된 일본인 스즈키(鈴木隆)는 읍성 안의 시가지 도시정비계획을 1911년 4월부터 시행하였다. 먼저 읍성을 철거하고 성돌을 이용하여 새롭게 하수구를 만들었다. 도로는 남석교-남문-북문으로 이어지는 직선도로를 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성안길인 본정통(本町通)이다. 땅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어 본정(本町), 욱정(旭町), 상생정(相生町) 등의 이름을 붙이고 일정목(一丁目), 이정목(二町目) 등으로 나누었다. 이렇게 읍성은 1911년부터 철거되기 시작하여 1915년에 일본식의 새로운 신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현황 및 문제점]
조선시대 존재했던 청주읍성 안의 주요 시설물은 성벽, 4개의 성문, 객사, 동헌, 병영, 망선루, 삼충사(표충사), 감옥, 철당간, 압각수, 비각, 8개의 우물 등이다. 그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동헌, 병영문, 망선루, 표충사, 철당간, 압각수, 비각 뿐이다.
객사 건물의 규모는 전면 11칸과 측면 2칸으로 추정되고 있다. 처음에는 청주보성학교에서 사용하였고 1911년부터는 현 청주농업고등학교가 수선하여 사용하였다. 청주농고가 이전한 뒤 헐리었다.
동헌 건물은 현재 청원군청 안에 남아 있는데, 1731년에 서원현감 이병정이 창건한 근민헌이다. 순조 25년과 고종 5년, 두 차례에 걸쳐 개축하였다. 특히 고종 5년 때 개축하면서 동헌 이름을 ‘근민헌’에서 ‘청녕각’으로 바꾸었다. 오랫동안 청주군·청원군 사무실로 이용되어 구조가 많이 변하였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으나 매우 퇴락한 상태이다.
병영 건물은 1908년부터 충청북도가 사용하였다. 정청인 운주헌은 지방계와 권업계가, 통군루는 회계과가, 압각수 밑의 거입정은 학무과가, 그리고 운주헌의 동쪽에 있던 비장청은 재무과가 각각 이용하였다. 그 뒤 도청이 현재의 문화동으로 이전함에 따라, 병영 건물은 모두 헐리고 병마절도사영문만 남아 있다. 영문은 조선시대 충청도 전체의 방어를 맡았던 병마절도사(종2품)의 근무처를 출입하던 문이다.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5호로 지정되었다.
객사 동쪽에 있었던 망선루는 고려시대의 목조건물로 청주보통학교 교사로 사용되다, 1923년에 청주제일교회로 이건되었다. 그 뒤 청남학교(淸南學校)와 세광중학교·세광고등학교(1949~1960년) 교사, 청주제일교회 교육관 등으로 사용되었다. 중앙공원(中央公園)에 있는 현재의 망선루는 2000년에 새로 이전 복원한 건물이다. 원래의 망선루 자리는 지금의 쥬네쯔 앞이다.
그밖에 삼충사는 1731년에 북문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 지금은 수동 87번지로 이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청주읍성을 탈환한 조헌(趙憲)[1544~1592] 의병장과 승병장 영규대사(靈圭大師)[?~1592]의 전장기적비(戰場 紀蹟碑)는 각각 서문 밖과 북문 안에 있었는데, 현재는 중앙공원(中央公園) 안으로 옮겨 세워 놓았다.
이렇듯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읍성과 성 안의 여러 시설물들은 거의 모두 없어지거나 원래의 자리를 떠나 옮겨져 있다. 성벽과 성문은 자취를 감추었고 성돌도 여기저기 흩어져 땅속에 묻히거나 어느 집 정원석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행히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忠淸道兵馬節度使營門)과 동헌이 남아 있어 청주읍성의 옛 모습을 느끼게 할 뿐이다. 특히 고려시대부터 처음 그 자리에서 청주의 보금자리를 지켜온 것이 있으니, 압각수와 철당간이다. 수령이 약 900년에 이르는 압각수 은행나무는 자연적인 청주의 지킴이요, 고려초 962년에 만들어진 철당간은 역사적인 청주의 지킴이로서, 청주의 중심을 상징하는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전망]
청주읍성은 청주의 역사 숨결이 스며 있는 보금자리로서 길이 보존되어야 한다. 그것이 곧 청주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청주를 역사도시, 문화도시, 교육도시로 만들어가는 초석이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청주읍성을 보존하려는 꾸준한 노력이 이어져 가시적인 성과가 있었다.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 정비사업, 청주읍성 4대문 터에 그 유래를 알리는 표석 세우기, 동헌과 병영 위치 밝히기, 망선루의 중앙공원(中央公園) 이건, 망선루의 원래 위치인 쥬네쯔 앞에 표석 세우기 등 청주읍성을 복원하고 보존하려는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져 왔다. 앞으로도 그와 같은 활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대안이 필요하다.
첫째, 시민단체가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 보호운동을 벌인 사례를 살펴볼 수 있다. 철당간 주변 정리를 통해 문화보호구역을 형성하였듯이 각 문화재에 대한 보호운동이 필요하다.
둘째, 문화재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 예로 동헌과 병영을 들 수 있다. 1988년까지 동헌인 청녕각과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忠淸道兵馬節度使營門)이 서로 뒤바뀌어 잘못 알려졌었다. 중앙공원(中央公園)의 정문은 남쪽인데, 병영은 동향을 하고 있다. 건물의 올바른 복원도 필요하다.
셋째. 흩어져 있는 유물의 정리와 조사가 필요하다. 그 예로 남석교의 난간에 있었던 고려견상을 들 수 있다.
넷째, 청주읍성의 복원을 위해서는 관·학·민이 연계되어 주체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의 주변이 정비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단체의 문화운동 뿐 아니라 개인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할 때 청주읍성 복원은 가능할 것이다. 더 나아가 청주읍성이 청주의 보금자리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청주 동헌과 중앙공원(中央公園)을 연계시킨 관아공원 조성하기, 일부 성벽과 성문 및 성루를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는 성안문 조성하기, 남석교의 복원을 통한 육거리재래시장의 관광 자원화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앞으로 청주읍성이 살아나서 생동감이 넘치는 청주의 보금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그곳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곳이자, 전통문화와 현대문화가 만나 혁신적인 제3의 청주문화가 탄생하는 곳이 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