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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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淸州-魂-歷史文化紀行 |
영어의미역 | Journey to history and culture of Cheongju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양식 |
[정의]
청주지역의 역사와 문화 등이 담겨져 있는 명소 기행.
[역사문화기행의 내용 및 특징]
오늘의 충청도를 호서지방이라 한다. 청주는 그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으며 소백산맥과 차령산맥, 노령산맥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청주의 진산인 우암산(牛岩山)[338m]은 동쪽에 우뚝 솟아 있다. 서쪽으로는 부모산이 마주보고 서 있다. 그 두 산자락 가운데 든 시가지를 동·서로 가르는 물줄기가 바로 무심천(無心川)이다.
청주 무심천(無心川), 진천의 백곡천, 증평의 보광천, 천수천 등이 합수하여 미호천(美湖川)을 이룬다. 미호천(美湖川) 유역의 물은 금강 하류인 논산의 강경으로 흘러간다. 청주인은 미호천(美湖川) 유역의 사람들이자, 금강 수계의 주민들이다.
미호천(美湖川) 유역은 기름진 땅이다. 이중환(李重煥)은 무심천(無心川)의 하류 까치내 작천(鵲川)을 살기 좋은 곳 중의 하나로 뽑았다.『택리지(擇里志)』에서 까치내 이웃의 여러 마을은 ‘물대기가 좋아서 부잣집이 많다’고 했다. 바로 청주를 말한다.
청주에는 20만년전부터 인류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청원군 두루봉 동굴 유적을 통해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구석기유적이 7군데, 청동기유적은 59군데에 이른다. 청주 내곡동과 봉명동의 집자리 유적에서 일상생활과 관련된 민무늬질그릇, 갈돌과 갈판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청주는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되면서 685년에 서원소경이 세워졌다. 7세기 후반부터 청주는 문화도시로 커나갔다. 뒷날 고려 초기에 세운 용두사지(龍頭寺址)철당간의 새김글 명문에 학원경(學院卿)이 보이는데, 이는 학문을 교육했던 교육기관이었다.
조선이 가장 큰 통치이념으로 삼은 학문은 성리학이다. 사림은 성리학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였는데, 그들의 기반은 붙박이 성씨나 이름난 가문이었다.『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청주의 명문거족 다섯을 들기도 하는데,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왕실과 혼인을 맺은 재상집안으로도 유명하지만, 모두 6명의 대간이 나왔다.
청주의 학맥은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를 리더로 한 기호학파에 속한다. 그 기호학파의 구심점이 호서로 옮겨지면서, 문인들은 거의 청주목과 공주목에서만 배출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청주성을 탈환한 중봉 조헌(趙憲)[1544~1592]도 기호학파 문인의 선비였다. 유학이념을 뚜렷이 드러낸 기호학파의 문인들이 유별나게 많이 나온 청주를 ‘선비의 고장’이라고 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까지 이어졌을 학원경과 용정동의 신항서원, 봉계서원·송계서원(松溪書院) 등이 청주가 배움의 고장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런 전통은 한말 자주적 민족운동이 일어나면서 근대 교육체제로 탈바꿈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1904년 김태희 등 기독교계 인사들이 광남학교(廣南學校)를 세웠다. 뒷날 청남학교(淸南學校)로 이름이 바뀐다. 신채호(申采浩)[1880~1936]는 그 무렵 세워진 산동학원(山東學院)의 설립에 참여하였다.
1945년 광복이후 한강 이남의 첫 대학은 청주대학이었다. 지금은 종합대학이 셋이나 되며, 다른 대학도 여럿이 있다. 청주시 전체인구 60만명 가운데 20%인 12만명이 학생인구이다. 청주는 ‘교육도시’라는 대명사가 늘 따라 다닌다. 그것은 영원한 ‘선비의 고장’을 의미하는 문화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청주의 역사를 따지면, 자그마치 2000년에 이른다. 두 천년 역사와 문화가 어울릴 고도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청주는 세계 속의 문화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청주지역의 역사가 2천년을 넘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역사유적도 다양하다. 청주지역의 시티투어에서는 청주의 역사문화를 하루와 반나절 일정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 코스를 연결하여 이틀 일정도 가능하다.
아울러 주제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청주의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문화유적을 통해 청주의 혼과 얼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 글은 이철희의 『아이들과 함께하는 청주문화유산답사』를 중심으로 재구성하였다.
[역사문화기행의 시작]
1. 양반고을 그 역사의 숨결
◎ 코스
국립청주박물관(명암유원지) → 8.9㎞ → 청주 정북동 토성 → 5.5㎞ → 신봉동 고분군(중부매일 앞, 청주시 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 동쪽으로 400m) → 6.9㎞ → 부모산성(부모산성 효성아파트 앞길에서 1,200m) → 4.2㎞ → 가경동(佳景洞)유적(제2외곽 순환도로 서쪽, 터미널에서 500m) → 5.2㎞ → (신전동 고가, 강서동 휴암휴게소에서 남쪽으로 1,400m) → 9.2㎞ → 청주동헌(상당구청 내) → 1.8㎞ → 표충사(우암초등학교에서 동쪽 400m) → 5.1㎞ → 무농정지와 방정(방서사거리 대머리공원) → 9.8㎞ → 청주 상당산성(제2외곽 순환도로 동쪽에서 빠져 4,600m) → 2.1㎞ → (것대산 봉수터, 청주 상당산성 맞은편 산)
청주는 이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청주를 부르는 별칭은 여러 가지인데, 그 중의 하나가 ‘양반고을’, ‘선비의 고장’이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로 이어지는 학원경 등과 같은 교육직함, 조선시대 서원으로 이어지는 전통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청주는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땅으로,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중요거점으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서원경이었다.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였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청주는 2천년의 역사가 흐르면서 남겨진 자취도 많다. 그 숨결을 찾아가 보자. 우선 청주문화를 한곳에서 볼 수 있는 박물관에서 출발하자.
국립청주박물관은 국토중심부의 유물을 종합적으로 보관·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충청북도는 삼국시대에 각각 백제, 고구려,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어 삼국의 문화가 어우러지던 곳이다. 1987년 10월 30일 개관하였다.
청주 정북동 토성은 정북동의 미호천(美湖川)과 무심천(無心川)이 합류하는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현존하는 토성 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고 초기 성곽 축성의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상당산성고금사적기(上黨山城古今事蹟記)』를 보면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이 토성을 축조하여 곡식을 저장하였다가 상당산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으나, 출토유물과 축성방식 그리고 주변여건으로 보아 약 2세기경인 원삼국시대에 최초로 축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999년 10월 22일에 충청북도 기념물 제82호에서 사적 제415호로 승격·지정되었다.
청주 신봉동 고분군은 청주의 북서쪽에 있는 명심산에 집중·분포하고 있다. 1980년대 초부터 2000년까지 5차에 걸쳐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 조사결과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4~5세기 경 백제시대 최대의 토광묘 밀집지역으로 밝혀졌다. 당시의 백제 영토와 생활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되어 1987년 7월 18일 사적 제319호로 지정되었다. 백제시대 움두덤, 돌방무덤, 고려후기 무덤, 1,7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철제갑옷, 투구, 화살통 등은 백제시대 무덤에서는 처음 나온 것이며, 철제 말장식과 같은 단일유적상 최대의 자료가 나왔다.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유구가 발견되어 이곳이 청주지역 최대의 문화유적지이며 우리 지역 최초의 거주지임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고분이라는 특성상 일반인들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청주시는 2001년 11월 이곳에 유물전시관을 건립하였다.
청주 동쪽에 우암산(牛岩山)[338m]이 있다면, 서쪽에는 부모산이 있다. 이 산에는 삼국시대의 석성이 있다. 부모산 주변은 미호천(美湖川) 유역에 발달한 구릉과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다. 시야를 가리는 높은 산이 없어 산허리의 등산로를 돌아가며 청주 지역을 넓게 조망할 수 있다. 산 정상부에는 전설을 간직한 모유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몽고에 의한 고려 침입시 인근주민이 이곳으로 피난하자 짙은 안개가 끼어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먹을 물이 없어 고생하던 중 이곳에서 물이 솟아나 기갈을 면했다고 한다. 이에 부모와 같은 은혜를 준 산이라 하여 부모산, 어머니 젖과 같은 물을 주었다 하여 모유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 절에는 전통사찰 연화사가 있으며, 맛좋은 물로 유명하다. 2002년 1월 11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가경동(佳景洞) 유적은 가경동(佳景洞)의 홍골~감나무실 사이의 구릉지역(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가경동 산 54-1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대한주택공사에서 추진한 청주 가경4지구 택지개발사업과 관련한 발굴조사에서 그 실체가 드러난 곳이다. 현재 공원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백제시대의 철기, 토기류, 마구류, 농공구류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전국에서 처음으로 아궁이, 굴뚝, 봉통부(천장)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삼국시대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2002년 1월 11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20호로 지정되었다.
신전동고가는 1926년에 지어졌다. 건축연대는 오래지 않았으나 안채·사랑채·행랑채가 고루 갖추어져 있다. 종보 위에는 파련대공을 놓고, 종도리와 뜬 창방을 결구하였는데 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수법이다.
청주동헌은 상당구청 안에 있으며, 조선후기 지방 관아건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청주읍성 안의 관아건물 가운데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忠淸道兵馬節度使營門)과 함께 당시의 위치에 그대로 보존된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표충사는 조선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순절한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1676~1728], 영장 남연년(南延年), 비장 홍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 7년(1731)에 청주읍성 북문안에 세운 사당이다. 세 분의 충신을 모셨다하여 삼충사(三忠祠)라고도 하며, 영조 12년(1736)에 사액되었다. 이 사당은 1939년 일제의 시가지계획에 따라 현재의 위치인 우암산(牛岩山)[338m] 산 밑으로 이전되었는데, 지금의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또한 사당 동쪽에는 홍림을 따르던 기생 해월의 덕을 기린 열녀문이 있다. 1972년 12월 6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었다.
무농정지는 청주한씨와 관계된 유허지이다. 청주 남쪽의 넓은 들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한란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농사에 힘쓰도록 권장하였던 곳이다. 그러나 정자의 옛터는 폐허가 되고 숙종 14년(1688)에 후손 한익저(韓益著)가 세운 유허비만 남아 있었다. 1949년에 후손들이 정자의 옛터에 콘크리트로 다시 세웠다가 1988년 목조로 고쳐 지었다. 앞뜰에는 무농정유허비가 있다. 1990년 12월 14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85호로 지정되었다. 무농정지에서 남쪽으로 약 200m쯤 가면 네모진 우물이 있다. 방정이라 하는데 1990년 12월 14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되었다.
청주 상당산성은 역사문화와 휴식공간이 어우러져 있는 사적공원이다.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잘 남아있는 조선 중후기의 대표적인 석성이다. 둘레가 4.2㎞, 내부면적이 22만평에 이르며 전형적인 포곡식 내탁공법의 성이다. 지금의 산성은 조선 숙종~영조 때에 대대적으로 개축된 것이다. 현재 청주 상당산성에는 진동문, 미호문, 공남문의 3개문과 2개의 암문, 치성 3개소, 수구 3개소가 있다. 1992년에는 동장대인 보화정이 재건되었다. 1970년 10월 1일 사적 제212호로 지정되었다.
양반고을 청주의 그 역사의 숨결을 따라 가 보았다. 길지 않은 여정이지만 그 여정 속에서 옛 청주인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청주의 동쪽 지킴이 청주 상당산성, 서쪽 지킴이 부모산성,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는 무심천(無心川)을 보았다. 평야 한가운데에 있는 네모난 토성, 백제시대의 청주사람들, 옛 관아건물, 죽어도 충절을 지켰던 위인들을 통해 청주 양반고을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2. 청주의 혼과 얼을 찾아서
◎ 코스
(청주 예술의 전당 단재(丹齋) 동상) → 청주향교(도청에서 400m) → 2.1㎞ → 신항서원(제2외곽 순환도로 동쪽에서 이정골 방향으로 800m 진입) → (목은(牧隱)영당, 수름재 지나 750m) → 표충사(우암초등학교에서 동쪽 400m) → 삼일공원(우암산 순회도로 서쪽 입구) → 18.2㎞ → 단재 신채호 사당(청원 낭성, 시내에서 승용차로 25분 거리) → 26.8㎞ →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1861~1922] 생가(청원 북이, 시내에서 승용차로 25분 거리) → 20.4㎞ → 민충사(강서검문소 지나 주봉마을 내) → 4.1㎞ →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1551~1592] 충렬사(경부고속도로 나들목에서 1,100m)
청주는 민족정기의 터전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이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구한말에는 단재가 민족사관을 정립하였다. 또한 청주는 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삼남제일의 향교였던 청주향교와 신항서원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청주의 역사를 찾아가 보고자 한다. 청주인의 나라사랑하는 마음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배우고 계승할 수 있을 것이다.
청주향교는 세종 26년(1446), 세종(世宗)이 초정에 행차했을 때 서적을 하사하였으며 세조 10년(1464)에 세조(世祖)가 문묘에 친히 제향하기도 한 삼남 제일의 향교였다. 숙종 9년(1683)에 지금의 대성동 자리로 옮겨왔다. 청주의 역사적인 관학교육기관이며 삼남 최고의 향교였던 이곳에서는 여전히 서예, 한문, 전통예절 등을 가르치고 있다. 1977년 12월 6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신항서원은 선조 3년(1570)에 창건되었다. 당시에는 유정서원이라 불려졌다. 현종 원년(1660)에 신항서원이라 개칭하였다. 『동국문헌원사록』에 삼남에서 제일가는 서원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종8년 서원철폐령으로 폐하여졌다가 광무 9년(1904)에 복구되고 1957년 지방 유림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1978년 12월 6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되었다.
목은영당은 청주 북쪽 수름재에서 오른쪽으로 1㎞ 정도에 위치해 있다. 고려 말의 대유학자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곳이다. 숙종 36년(1710)에 창건하였다. 주성강당은 유학자들이 학문을 닦던 건물로 조선시대 목부재와 건축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996년 12월 30일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되었다.
표충사는 ‘이인좌의 난’ 때 순절한 충청병사 이봉상, 영장 남연년, 비장 홍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 7년(1731)에 청주읍성 북문 안에 세운 사당이다. 세 분의 충신을 모셨다하여 삼충사(三忠祠)라고도 하며, 영조 12년(1736)에 사액되었다. 1972년 12월 6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청주의 진산 우암산(牛岩山)[338m] 서쪽 자리에는 삼일공원이 있다. 삼일운동 민족대표 33인중 충북출신인 손병희, 권동진[1861~1947], 권병덕(權秉悳)[1867~1944], 신흥식, 신석구(申錫九)[1875~1950], 정춘수(鄭春洙) 등 여섯 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공원은 1980년에 조성되어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린 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민족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정춘수는 후에 변절하여 친일행각을 함으로써 논란 끝에 1996년 2월 시민단체에 의해 강제로 동상이 철거되었다.
단재 신채호는 독립지사이며 사학자이자 언론인이었다. 단재 선생을 기리기 위해 청원군 낭성면 그의 묘 바로 앞에 1978년에 세웠다. 묘소는 선생이 어린 시절에 살던 옛 집터로 한용운, 오세창, 신백우(申伯雨)[1886~1959] 등이 세운 표와 1972년에 세운 사적비가 있다. 최근에 건립한 전시관이 옆에 있다. 1993년 11월 5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었다.
청주에서 충주 방면으로 가다보면 내수사거리를 지나 우측으로 손병희 선생의 생가 표지판이 보인다(청원군 북이면). 선생이 태어난 생가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초가집으로 1971년에 해체, 보수하였고 1961년에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세운 유허비가 있다. 청원군에서는 선생의 유허지 12,500여평 위에 1991년부터 1999년까지 선생의 생가, 영당, 동상, 전시관 등을 건립하여 2000년 3월 1일 개장하였다. 1970년 10월 2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었다.
부모산 아래 주봉마을 뒤에는 민충사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700여명의 의병을 모아 청주성을 탈환한 박춘무(朴春茂)[1544~1611]를 비롯한 청주의병들의 신위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이 사당은 2001년 순천박씨(順天朴氏) 문중에서 주관이 되어 건립하였다. 박춘무 선생을 비롯하여 박춘번(朴春蕃), 박동명(朴東命)[1576~1636], 이시발(李時發), 한혁 등 당시 청주 출신 의병들과 이름없는 7백의사의 신위를 모시고 있으며 해마다 청주성 탈환일인 9월 5일(양)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광해군 2년(1610)에 창건하였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980년에 중수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첨 목조 기와집이다. 청주시는 여산송씨(礪山宋氏) 문중과 더불어 1999년부터 약 3,500여평의 면적에 사당과 유물전시관을 건립하였다. 2000년 6월말 그동안 부산 충렬사에 전시 중이던 1658년에 그린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 1741년에 영조(英祖)가 내린 교지 2점, 1717년 숙종·1750년 영조의 「치제문(致祭文)」, 『천곡수필집』, 『천곡결서(泉谷決書)』 등 총 10점의 유물을 반환받았다. 1977년 12월 6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3. 청주 옛 성을 찾아서
◎ 코스
부모산성(흥덕구 비하동 효성아파트 앞길에서 1,200m) → 청주 정북동 토성 → 청주읍성 → 청주 상당산성(제2외곽 순환도로 동쪽으로 빠져 4,600m)
사람들은 정착하면서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청주는 인류가 정착생활을 시작한 곳 중의 하나로 토성을 쌓았다. 그리고 삼국시대, 임진왜란, 이인좌의 난 등을 거치면서 평지에는 읍성을, 산에는 산성을 쌓았다. 서쪽에는 부모산성, 동쪽에는 상당산성, 그 사이에 청주읍성을 쌓았다.
우리의 옛 성은 어떠한 모습으로 남아있는지 왜 그 곳에 성이 쌓여졌는지 찾아가 보자. 청주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청주 동쪽에 우암산(牛岩山)[338m]이 있다면, 서쪽에는 부모산이 있다. 이 산에는 삼국시대의 석성이 있다. 부모산 주변은 미호천(美湖川) 유역에 발달한 구릉과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다. 시야를 가리는 높은 산이 없어 산허리의 등산로를 돌아가며 청주 지역을 넓게 조망할 수 있다. 산 정상부에는 전설을 간직한 모유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또한 전통사찰 연화사가 있으며, 맛좋은 물로 유명하다. 2002년 1월 11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청주시 상당구 정북동의 미호천(美湖川)과 무심천(無心川)이 합류하는 동쪽에 청주 정북동 토성이 위치해 있다. 현존하는 토성 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고 초기 성곽 축성의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상당산성고금사적기(上黨山城古今事蹟記)』를 보면 후삼국 시기에 궁예(弓裔)가 이 토성을 축조하여 곡식을 저장하였다가 청주 상당산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으나, 출토유물과 축성방식 그리고 주변여건으로 보아 약 2세기경인 원삼국시대에 최초의 축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999년 10월 22일에 충청북도 기념물 제82호에서 사적 제415호로 승격·지정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통일신라 신문왕 5년에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나눌 때 청주지역을 서원이라 하고 소경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4년 후에 서원경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행정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진다. 조선후기 청주읍성은 행정의 중심지뿐만 아니라 병영으로서의 기능을 같이 하게 된다. 읍성에는 4개의 문이 있었다. 벽인문, 청추문, 청남문, 현무문이라고 하였다. 현재 성벽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도로와 성문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다. 읍성 안에는 동헌과 병영건물, 망선루, 삼충사, 강선루 등 많은 건축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중앙공원(中央公園) 입구에 영문과 상당구청 뒤편에 청녕각만이 남아 있다.
청주 상당산성은 역사문화와 휴식공간이 어우러져 있는 사적공원이다.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잘 남아있는 조선 중후기의 대표적인 석성이다. 둘레가 4.2㎞, 내부면적이 22만평에 이르며 전형적인 포곡식 내탁공법의 성이다. 최초의 축성연대는 알 수 없지만 삼국시대에 토성으로 쌓여졌으며 임진왜란 당시 원균(元均)이 수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산성은 조선 숙종~영조 때에 대대적으로 개축된 것이다. 현재 청주 상당산성에는 진동문, 미호문, 공남문의 3개문과 2개의 암문, 치성 3개소, 수구 3개소가 있다. 1992년에는 동장대인 보화정이 재건되었다. 청주시는 앞으로 청주 상당산성 내부를 조선 영·정조시대의 모습 그대로 복원하고 당시의 생활상을 재현할 예정이다. 1970년 10월 1일 사적 제212호로 지정되었다.
4. 종교 유적을 찾아서
◎ 코스
용화사 석불장군(무심천변, 청주대교 북쪽 400m) → 보살사(제2외곽 순환도로 남쪽에서 2,300m) → 순치명석불입상(제2외곽 순환도로 남쪽에서 400m, 신항서원 입구) → 청주 서기사 석조약사여래좌상(율랑동 예비군 훈련장 뒤편 산) → 정하 마애비로사나불좌상(제2외곽 순환도로 북쪽에서 800m, 청주 정북동 토성 입구) → 탑동 오층석탑(일신여고 북쪽 300m) → 신대교회(미호천변, 까치내 서쪽 3500m) → 청주성공회성당(우암산 순회도로 서쪽 입구) → 청주탑동양관(일신여고 내)
청주지역의 불교와 기독교 유적을 중심으로 기행을 해보고자 한다. 이들 유적을 통해 청주의 종교역사를 볼 수 있다.
무심천변에는 용화사가 있다. 용화보전은 석불상군을 모시고 있으며 1995년에 새로 신축한 것이다. 이곳의 석불들은 본래 한 사찰에 있던 것이 아니다. 대부분이 고려시대의 불상들이며 보호각을 지을 때 훼손부분을 복원하였다. 앞줄 왼쪽부터 모자를 쓰고 좌대에 앉아 있는 유마거사상, 그 옆에 석불, 그 옆에는 미륵부처상이 있다. 뒷면에는 삼불전이 있다. 6m에 달하는 약사여래불, 미륵불, 석가모니불을 모셨다. 미륵불의 가슴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고, 석가모니불 뒷면에는 큰 나한상이 조각되어 있어 전국적으로 희귀하다. 1989년 4월 10일 보물 제985호로 지정되었다.
보살사는 조계종에 속한 사찰이다. 신라 진흥왕28년(567)에 법주사를 창건한 의신조사가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공민왕 때 토지를 하사받았고, 조선 세조 때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다. 경내에는 지정문화재 4점이 있다. 보살사에는 「보살사 영산회괘불탱」이 있다. 이 괘불탱은 승려 신겸과 덕희 등이 그린 것으로, 길이 6.13m, 너비 4.26m의 크기이다. 그림의 가운데에 키모양광배(箕形光背)를 배경으로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한 석바불이 있으며, 이 본존불상을 중심으로 8대 보살과 사리불·십대제자 등의 대중들이 좌우 대칭으로 에워싸고 있다. 17세기 전반의 대표작으로 청원 「안심사 영산회괘불탱」(1652년, 국보 제297호)과 더불어 영산회상도의 기본형을 보여주고 있다. 1997년 8월에 보물 제1258호로 승격된 탱화의 일종이다.
용정동 이정골 입구 논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불상이 있다. 순치명석불입상이다. 1652년(효종 3)에 조성되었다. 3.16m의 크기에 방형석주와 같은 화강암의 상단부에 머리만을 조각하여 마치 장승처럼 보인다. 1985년 12월 28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0호로 지정되었다.
율량동 예비군 훈련장 안의 서기사(瑞氣寺)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이 있다. 대좌는 없고 주형광배가 따로 떨어져 있으며 목이 부러졌던 것을 콘크리트로 보강하여 놓았다. 고려 중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며, 규모는 전체 높이 86㎝, 머리 높이 30㎝, 어깨 폭 42㎝, 가슴 폭26㎝, 무릎높이 21㎝이다.
청주의 북쪽인 정하동 길가에 청주 정하동 마애비로자나불좌상이 있다. 속칭 돌산으로 불리는 바위산에서 돌출된 판석형의 자연암반에 선각되어 있는데 전체높이 323㎝, 머리높이 65㎝이며 연화대좌는 높이 45㎝, 폭 214㎝이다. 조성시기는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단정하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양의 관모를 쓰고 있다.
일신여고 고갯길을 100m 정도 올라가다 보면 좌측 골목 집안에 세 채의 효자각과 함께 탑이 있다. 이것이 바로 탑동 오층석탑이다. 효자각은 곽여찬(郭汝贊), 곽진은(郭鎭殷), 곽원호, 곽상조 등 4대에 걸친 현풍곽씨(玄風郭氏)의 효자문으로 부모가 위독할 때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여 살려내는 등 그 효성이 지극하였다. 오층석탑은 현재 기단부가 없으며, 층수를 나타내는 탑신부도 3층만이 남아 있다.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충북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가 전래된 곳이 신대마을이다. 1901년 신대리에 살던 오천보, 문성심, 오삼근 등이 교회를 설립하였다. 신대교회로 가기 전에 비석하나를 볼 수 있다. 1985년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기념사업회 충청북도협의회에서 세운 기독교전래기념비이다. 비석 뒷면에 첫 교회를 설립한 내력과 복음이 충북지역으로 퍼져 나간 역사가 새겨져 있다.
청주에 성공회가 들어온 것은 1922년이다. 현재의 청주성공회성당은 구세실(Cecil Cooper) 주교에 의하여 1935년에 건축되었다. 남북방면으로 자리잡은 이 건물은 정면 8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에 한식기와를 얹은 전형적인 조선 한옥양식이다. 창문은 십자문양을 응용한 전통 창살무늬로 꾸몄으며, 위쪽은 고딕양식의 반원형 아치로 꾸며 동서양 문화의 만남을 상징하고 있다. 1985년 12월 28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거주와 선교, 교육 및 진료 등을 위해 건물을 짓게 되는데 이것이 탑동에 있는 양관이다. 이 건물은 1904년 부지를 매입하기 시작하여 1906년 제3, 제4호가 지어졌고, 1910~1912년에 제1, 제5, 제6호가 그리고 1932년에 제2호 등 총 여섯 채의 건물이 지어졌다. 그 중 네 채는 일신여고 안에 있고 두 채는 학교 외곽에 있다. 최초 두 채의 기단부의 돌은 청주읍교회 터에 있던 옛 영장(營將)관사와 감옥을 헐어 사용하였다. 처음의 건물은 한옥형태 위주로 붉은 벽돌과 아치형 창문 등 일부 서양식 건축방식이 적용되었다. 서양식 건물도입 변천사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1983년 3월 30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33호로 지정되었다.
5. 청주 박물관 기행
◎ 코스
국립청주박물관(명암유원지) → 청주백제유물전시관 →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와 청주고인쇄박물관 → 충북대학교박물관 → 한국잠사박물관
청주에는 국립박물관, 시립박물관, 대학박물관 등 다양한 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다. 형태도 다양하지만 주제를 갖고 독특하게 운영되고 있다.
충청북도는 우리나라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내륙지방으로 역사적으로 삼국시대에 각각 백제, 고구려,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어 삼국의 문화가 어우러지던 곳이다. 이런 국토 중심부의 유물을 종합적으로 보관·전시하고 있는 곳이 국립청주박물관이다. 박물관은 1987년 10월 30일 개관하였다. 3만여평의 부지 위에 세워진 국립청주박물관에는 4개의 상설전시관에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2,3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별전시관, 야외전시관 그리고 어린이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청주백제유물전시관은 2001년에 지어졌다. 청주 신봉동 고분군에서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유구가 발견되었다. 청주지역 최대의 문화유적지이며 우리 지역 최초의 거주지임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고분이라는 특성상 일반인들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청주시는 이곳에 유물전시관을 건립하였다.
흥덕사는 인쇄문화의 탄생지이다. 이곳에서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 간행되었는데, 이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다. 흥덕사는 기록에만 존재할 뿐 그 실체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1984년 운천동 택지개발사업 중에 기와와 절터가 발견되면서 그 위치를 드러내었다. 충청북도는 사적으로 지정하고 흥덕사를 복원하였으며, 그 위치에 청주고인쇄박물관을 건립하였다.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 내에는 총 12,400평의 면적 안에 정면5칸, 측면3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금당과 3층 석탑이 복원되었다. 청주고인쇄박물관에는 2000년 증축을 통해 5개의 상설전시장과 1개의 기획전시실, 인쇄시연체험실 등을 갖추었다. 매년 청주인쇄출판축제를 개최하고 격년으로 국제학술회의를 열어『직지』를 세계에 알리고 있다. 1986년 5월 7일 사적 제315호 지정되었다.
충북대학교 박물관은 1970년 농업박물관 및 종합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청원 두루봉유적 등을 포함하여 고고·선사·역사유적들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다.
한국잠사박물관은 2004년 개관하였다. 잠업의 변천사 등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청원군 강내면 학천리에 위치하고 있다.
6. 근대 청주의 모습을 찾아서
◎ 코스
국립청주박물관 → 청주성공회성당(우암산순회도로 서쪽입구) → 청주 탑동 양관(일신여고 내) → 읍성밖 저자거리 → 육거리재래시장 → 청주 먹거리 이야기
20세기 초기에 청주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우리 할아버지 세대의 모습이 궁금하다. 1900년 이후의 청주역사 흔적을 찾아가 보자.
국립청주박물관은 청주뿐만 아니라 충청북도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국립청주박물관은 1987년 10월 30일 개관하였다. 3만여평의 부지 위에 세워진 국립청주박물관에는 4개의 상설전시관에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2,3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별전시관, 야외전시관 그리고 어린이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청주성공회성당은 구세실 주교에 의하여 1935년에 건축되었다. 남북방면으로 자리잡은 이 건물은 정면 8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에 한식기와를 얹은 전형적인 조선 한옥양식이다. 창문은 십자문양을 응용한 전통 창살무늬로 꾸몄으며, 위쪽은 고딕양식의 반원형 아치로 꾸며 동서양 문화의 만남을 상징하고 있다. 1985년 12월 28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거주와 선교, 교육 및 진료 등을 위해 건물을 짓게 되는데 이것이 탑동에 있는 양관이다. 이 건물은 1904년 부지를 매입하기 시작하여 1906년 제3, 제4호가 지어졌고, 1910~1912년에 제1, 제5, 제6호가 그리고 1932년에 제2호 등 총 여섯 채의 건물이 지어졌다. 그 중 네 채는 일신여고 안에 있고 두 채는 학교 외곽에 있다. 최초 두 채의 기단부의 돌은 청주읍교회 터에 있던 옛 영장(營將)관사와 감옥을 헐어 사용하였다. 처음의 건물은 한옥형태 위주로 붉은 벽돌과 아치형 창문 등 일부 서양식 건축방식이 적용되었다. 그 후에는 2층, 3층으로 건물이 지어져 서양 건축양식이 많이 가미되었다. 즉, 서양식 건물도입 변천사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1983년 3월 30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33호로 지정되었다.
청주의 재래시장은 약전, 남주동(南洲洞) 일대의 목물전, 자유극장 부근에 있던 쇠전, 그 앞의 피전, 무심천변의 나무전, 육거리시장 등이다. 청주읍성이 존재할 당시에는 청남문 앞에 아침, 저녁으로 열리는 상설시장이 있었다. 이를 ‘저자시’라 했으며 장꾼들은 통상적으로 ‘저자거리’라 불렀다. 저자시는 청주에만 열렸던 것이 아니라 읍성이 있던 곳이면 모두 성문밖에 존재했다. 일반인들의 물물교환뿐만 아니라 읍성안의 관급 물자 조달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저자시는 아침 해가 뜨기 이전인 인시(오전 4시~6시)말쯤 열려 묘시(오전 6시~8시)무렵에 파장되었다. 저녁나절에도 잠깐 열렸다가 파시했는데 아침 장이 저녁 장보다 규모가 컸다. 현재 중앙공원(中央公園) 앞, 조흥은행 앞 시장바닥이 바로 청주읍성의 저자시가 열렸던 곳이다. 무려 7~8백년의 역사를 간직한 청주 저자시가 청주읍성이 헐리면서 쇠퇴했고 유통구조가 바뀐 요즘에는 이름만이 전해질뿐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중앙공원(中央公園) 정문에는 저자시의 잔영이 있었다. 큰 떡전이 있었는데 남사로가 확장·포장되면서 종적을 감췄다. 떡전 아래로 남주동(南洲洞) 골목의 잡화전과 혼수가게, 그리고 수산업협동조합 등 어물전이 꼬리를 물었으나 수산시장이 신봉동으로 이사를 간 후, 어물전 경기는 시들해졌다. 구 도립병원(현 만복회관) 일대에는 운명철학가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대부분 노쇠한데다 컴퓨터 사주, 토정비결 등의 등장으로 이 역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지금은 만복회관 옆에서 중앙공원(中央公園)으로 통하는 골목길에 서너 명의 역학인들이 있다. 장꾼들의 발길로 늘 시끌벅적하던 읍성 밖 저자거리는 현재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요란하다. 재래상가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청주읍성 성벽이 지나가던 자리인 청주 YMCA 앞, 길 건너편에는 일제의 적산가옥만이 몇 채 있을 뿐이다.
남석교 일대에 들어선 재래시장, 오늘날 육거리시장이라 부른다. 1906년 청주에 온 일본 상인들은 당시 남석교 북쪽 연안에서 시작되어 청주읍성 남문에 이르는 석교장터에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남석교 장터는 무심천변 모래사장에 포장을 즐비하게 차리는 형태였다. 그때의 번화가는 남석교에서 남문까지였으며, 읍성 안쪽은 한가하였다. 이러한 시장은 물난리로 인해 폐허가 되었다. 1906년 8월 26일부터 28일까지 큰비가 내려 무심천(無心川)이 범람하고 9월 1일에는 읍성 안으로 물이 넘쳐 사람들이 청남문과 청추문 문루에 올라 물난리를 피하였다고 한다. 이 물난리로 일본의 상인들이 시장의 상권을 잠식해 들어갔다. 육거리시장은 구 석교동 파출소 일대에서 북진하며 청주시의 간선도로를 따라 발전해 왔다. 주로 남북으로 발달했던 시장은 한국동란이 지나면서 모양새가 바뀌었다. 즉 남북측으로 늘어섰던 시장의 형태가 동서축으로 이어지면서 이른바 바둑판식 시장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바둑판식이란 자로 잰듯한 규격이 아니라 눈대중으로 쳐서 씨줄과 날줄을 얼기설기 엮은 모양을 일컫는다. 여기에다 수백 명에 달하는 노점상이 가세하여 육거리시장은 혼잡하기 이를 데 없다. 육거리시장에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을 두루 갖추고 있다. 각종 육류, 생선류, 피복, 그릇 등이 산더미 같다. 2일, 7일 서는 청주 장날이 오면 육거리시장은 발 디딜 틈이 없다.
청주에는 청주 특유의 음식 몇 가지가 전하고 있다. 청주 서문동의 올갱이국과 남주동(南洲洞)의 해장국이다. 올갱이는 다슬기과의 하나인 고동의 일종으로, 1급수 맑은 물에서만 자란다. 청주 올갱이국이 요즘 뜨는 까닭은 공력과 정성이 듬뿍 밴 향토음식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또 국맛이 맛깔스럽기도 하거니와 청주 말고도 다른 데서 좀처럼 맛보기가 어려워 희귀성 기호식품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감칠맛 나는 버섯찌개도 청주의 명물로 자리를 잡았다. 표고버섯에 느타리버섯, 팽이버섯, 양송이 따위의 버섯만도 네 가지가 들어간다. 또 갖가지 양념과 채소에 다진 쇠고기까지 들어간 버섯찌개는 열량이 아주 적어 비만에도 좋다. 지난 50년 전통의 청주 남주동 해장국도 별미중의 별미다. 3대째 손맛을 잇는 남주동(南洲洞) 해장국은 어른들 입맛에 착 달라붙게 얼큰하면서도 칼칼하게 끊여낸다. 누린내가 감돌지 않는 남주동(南洲洞) 해장국의 풍미는 장맛에서 우러난 것이라고 했다. 청주 남주동은 원래 닷새장이 열리던 장터다. 1943년 때 쇠전 인근에서 문을 연 남주동(南洲洞) 해장국집은 개업 당시는 새벽 반짝 장사를 했다. 새벽 쇠전에 나온 소장수나 거간꾼, 소를 팔러 왔거나 사러 온 시골 농사꾼들이 단골이었다. 그래도 장날만큼은 점심 무렵까지 장사를 했지만, 여느 날은 새벽서 아침나절까지만 국을 끓였었다.
7. 청주 최고의 문화유적지를 찾아서
◎ 코스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와 청주고인쇄박물관 → 청주읍성(중앙공원(中央公園)) → 삼일공원(우암산 순회도로 서쪽 입구) → 청주 상당산성 → 국립청주박물관
2000년의 역사가 흘러오면서 청주는 각종 문화유적이 남아있다.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직지』, 그리고 민족의 주체성을 밝혀준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이 있다. 나라의 환난 시에는 많은 충절애국지사들이 나왔다.
그러나 이 많은 유적지를 일일이 한 번에 찾아볼 수 없다. 그 중에서 청주의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꼭 이곳만은 보아야 할 곳만을 엄선하여 청주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을 찾아가 보자.
흥덕사는 인쇄문화의 탄생지이다. 이곳에서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 간행되었는데, 이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다. 흥덕사는 기록에만 존재할 뿐 그 실체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1984년 운천동 택지개발사업 중에 기와와 절터가 발견되면서 그 위치를 드러내었다. 충청북도는 사적으로 지정하고 흥덕사를 복원하였으며, 그 위치에 청주고인쇄박물관을 건립하였다.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 내에는 총 12,400평의 면적 안에 정면5칸, 측면3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금당과 3층 석탑이 복원되었다. 청주고인쇄박물관에는 2000년 증축을 통해 5개의 상설전시장과 1개의 기획전시실, 인쇄시연체험실 등을 갖추었다. 매년 청주인쇄출판축제를 개최하고 격년으로 국제학술회의를 열어『직지』를 세계에 알리고 있다. 1986년 5월 7일 사적 제315호 지정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통일신라 신문왕 5년에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나눌 때 청주지역을 서원이라 하고 소경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4년 후에 서원경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행정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진다. 조선 후기 청주읍성은 행정의 중심지뿐만 아니라 병영으로서의 기능을 같이 하게 된다. 해미에 있던 충청병영이 청주읍성 내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읍성에는 4개의 문이 있었다. 벽인문, 청추문, 청남문, 현무문이라고 하였다. 현재 성벽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도로와 성문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다. 읍성 안에는 동헌과 병영건물, 망선루, 삼충사, 강선루 등 많은 건축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중앙공원(中央公園) 입구에 영문과 상당구청 뒤편에 청녕각만이 남아 있다. 용두사지(龍頭寺址)철당간은 국보 제41호이다. 원래 높이는 30단 60자, 18m이었다. 그 중 3단이 없어져서 키가 13m로 줄었다. 962년에 세워진 철당간은 ‘준풍’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학원경’이라는 명칭이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청주가 주체성을 가지고 교육도시로써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앙공원(中央公園)은 청주의 중심지이며 청주 역사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중앙공원(中央公園) 자리는 바로 청주읍성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던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있던 곳이다. 중앙공원(中央公園) 내에는 지정문화재 5점이 자리잡고 있다. 이밖에도 서원향약비·대한민국독립기념비·한봉수(韓鳳洙)[1883~1972] 의병장송공비 등이 있다.
청주의 진산 우암산(牛岩山)[338m] 서쪽 자리에는 삼일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충북 출신인 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흥식, 신석구, 정춘수 등 여섯 분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태극모양의 삼일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1980년에 조성되어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린 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민족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정춘수는 후에 변절하여 친일행각을 함으로써 논란 끝에 1996년 2월 시민단체에 의해 강제로 동상이 철거되었다.
청주 상당산성은 역사문화와 휴식공간이 어우러져 있는 사적공원이다.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잘 남아있는 조선 중후기의 대표적인 석성이다. 둘레가 4.2㎞, 내부면적이 22만평에 이르며 전형적인 포곡식 내탁공법의 성이다. 최초의 축성연대는 알 수 없지만 삼국시대에 토성으로 쌓여졌으며 임진왜란 당시 원균이 수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산성은 조선 숙종~영조 때에 대대적으로 개축된 것이다. 현재 청주 상당산성에는 진동문, 미호문, 공남문의 3개문과 2개의 암문, 치성 3개소, 수구 3개소가 있다. 1992년에는 동장대인 보화정이 재건되었다.
청주시는 앞으로 청주 상당산성 내부를 조선 영·정조시대의 모습 그대로 복원하고 당시의 생활상을 재현할 예정이다. 1970년 10월 1일 사적 제212호로 지정되었다.
충청북도는 우리나라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내륙지방으로 역사적으로 삼국시대에 각각 백제, 고구려,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어 삼국의 문화가 어우러지던 곳이다. 이런 국토 중심부의 유물을 종합적으로 보관·전시하고 있는 곳이 국립청주박물관이다. 국립청주박물관은 1987년 10월 30일 개관하였다. 3만여평의 부지 위에 세워진 국립청주박물관에는 4개의 상설전시관에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2,3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별전시관, 야외전시관 그리고 어린이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현황 및 문제점]
청주지역에는 다양한 문화유적이 있다. 우암산(牛岩山)[338m]과 무심천(無心川), 산성과 토성, 불교유적, 특성화된 박물관, 고건축물 등이 있다. 각 유적과 유물에는 독자적인 문화와 사상이 깃들어져 있다. 이러한 문화유산을 주제별로 나누어 소개하였다. 양반고을 청주, 그 혼과 얼을 찾아보고 박물관 기행 등 세부적으로 안내하였다. 이외에도 시티투어에 포함되지 않은 다양한 문화유산이 있다.
이러한 문화유산이 청주의 유구한 역사를 바탕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청주는 동서남북 동선이 길지 않기 때문에 역사자원을 생활 속에 녹일 수 있다. 계속해서 청주지역의 문화자원을 알리는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소개되어야 한다. 최근에 청주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소개하는 책들이 발간되었다. 반가운 일이다. 찾아가는 길과 주위와 연관되어 볼거리, 맛거리, 축제 등이 풍성해질 필요가 있다.
[전망]
풀뿌리 민주주의인 지방자치가 시작되면서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지방자치뿐만 아니라 문화자치가 시작된 것이다.
청주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찾아서 문화축제로 발전시키는 사례도 늘고 있다. 역사와 문화를 그 지역의 자산으로 개발하여 활용한 것이다.
다양한 연구도 필요하지만 현재 우리지역에서 찾아갈 수 있는 곳들을 보다 쉽게 찾아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찾아가는 길이 어렵고 복잡하다면 다시는 찾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그 문화유산에 대한 쉽고 자세한 소개도 필요하다. 큰 전시관이나 대형 조형물이 아닌 쉽고 간단한 안내서가 더 유용하다.
청주지역은 예로부터 선진적인 도시였다. 이러한 문화와 역사에 대한 긍지를 갖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리의 삶에 다가오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