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407 |
---|---|
한자 | -文化藝術-都市淸州 |
영어의미역 | Cheongju, City Proud of Its Culture and Arts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승환 |
[청주문화의 개념]
청주문화란 청주와 청원 지역에서 축적되고 존재하는 문화이다. 청주문화는 다른 문화와 비교상대적인 문화 개념이다. 청주문화의 개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문화의 독자적인 완결성을 공간적으로 강조할 때 이런 문화단위 개념이 설정될 수 있다. 이 경우 지역의 독자적 문화문법(文化文法)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의 마모를 견디면서 내재하는 문화의 장기지속의 심층구조가 있다는 것도 전제로 한다. 일반적으로 문화는 사회 구성원의 고유한 정신적, 물질적, 지적, 감성적, 윤리적 능력의 총체로서 예술과 학술만이 아니라 생활양식, 가치체계, 심성과 태도 등 다양한 차원을 포괄한다. 청주문화 역시 그러한 문화적 특질을 가지고 있는데 청주문화는 배타적으로 독자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개념이다. 즉, 청주문화는 안동문화의 타자이면서 한국문화의 하위 개념인 것이다. 한편 청주문화의 주체인 청주인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문화적 잠재의식, 역사의 공동경험, 정신과 감정의 유사성, 행동양식의 동질성 등이 있다는 가정 하에 ‘지역문화’ 즉, ‘청주문화’라는 용어를 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의 ‘지역문화’는 장기지속의 문화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 문화형질을 유전하는 유전인자가 우성(優性)이고 다른 지역문화와 변별성이 있을 때 그 의미가 분명해 진다.
청주문화와 청주의 지역문화는 다르다. 청주문화는 완결적인 개념으로서의 문화단위를 말하는 것이고 청주의 지역문화는 청주의 문화보다 청주의 지역적 가치에 무게를 두는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보다는 공간을 우선한다. 달리 말하면 청주라는 하나의 생존공간에서 청주가 가진 지역의 문화를 표현한다는 뜻이다. 이 때 장기지속의 심층구조는 지역문화보다 지역에 있다. 예를 들어 청주의 지역문화에서 ‘청주’의 장기지속의 구조를 더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 청주가 가지고 있는 역사와 생존 전체 속에 재생성될 가능성의 장기지속의 구조가 있을 때 쓴다.
[선사와 고대의 청주문화사]
청주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청주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간략하게 청주의 역사를 일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서기 50만년 전부터의 구석기시대에 금강 유역에 발달한 구릉은 구석기인들의 삶을 확인할 수 있는데 청주시 봉명동, 청원군 두루봉 샘골유적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청주 흥덕구 개신동, 명암동 등에서도 구석기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서기 만년 전부터의 신석기시대에는 청주 향정동, 청원 쌍청리에서 발견된 집터 유적, 청주 산성동 유적에서는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석기가 출토되었다. 서기 천년 전부터의 청동기시대 청주 지역 인근에 펼쳐진 낮은 구릉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집터가 발굴·조사된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 상당구 용암동, 청원군 내수리 유적이 대표적이다. 기원전 4세기 무렵 금강유역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 유적들은 지역적 특색을 보이고 있다. 대략 서기 300년 전의 청주 흥덕구 비하동 유적에서는 한국식동검을 비롯하여 검은간토기, 덧띠토기가 출토되어 금강유역 초기 문화의 일단을 보여준다.
현재의 청원 지역에 두루봉 동굴이 발굴되어 구석기인들의 거주가 확인되었다. 1976년 이 일대 석회암 채취를 위한 발파작업으로 파괴된 채 발견되어 긴급발굴을 시작으로 10차에 걸쳐 조사되었다. 이곳에서는 사슴과 동물의 턱뼈, 원숭이 아래턱, 큰 곰의 송곳니 등이 원 위치에서 발견되었고 그 주위에서 손질된 골기가 발견되었다. 꽃가루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진달래과의 꽃가루가 대량으로 발견되어 당시 구석기인들이 꽃을 사랑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15굴에서는 집터가 발견되었으며 새굴에서는 옛코끼리(Elephas antiguitas)상아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흥수굴에서는 완전한 사람뼈와 석기, 동물화석들이 모두 제자리에서 발견되었는데 2개체의 사람뼈 중 1호는 만 6~7세의 어린아이의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는 출입구에서 모룻돌 망치를 비롯하여 많은 석기가 출토되어 이곳이 바로 석기제작소이며 생활의 중심지임을 알 수 있었다. 특히 흥수굴에서는 대부분 석기들이 층위로 출토되었고 인골과 동물화석이 다양하게 발견되어 당시 인류의 체질학적 특성과 매장방식, 식생활 및 기후를 복원, 해석하여 고대의 문화와 생활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청원군 오창면 소로리에 자연 볍씨가 출토되어 농경문화의 세계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도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선사시대적 생존 양식은 청주문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현재의 청주인은 북방의 몽고계가 내려와 정착하면서부터 문화가 존재하고 계승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구석기시대의 토탄층에서 볍씨(japonica 형과 indica 형)가 발굴되고 그 이전의 층에서는 유사벼가 발굴되어 크게 주목받고 있다. 소로리 유적에서 출토된 볍씨는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로 보면 한국에서는 물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인 것으로 밝혀져, 벼의 기원, 진화, 전파 등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소로리의 볍씨가 그 자체로 농경의 흔적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청주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주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근세까지의 청주문화사]
원삼국(삼한)시대의 청주는 마한에 속한다. 마한의 문화적 속성은 청주 흥덕구 송절동, 청원군 송대리 유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청주 정북동 토성은 당시에 쌓아진 평지 방형 토성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예이다. 서기 300년 삼국시대의 청주는 백제에 속했는데 상당현, 낭자곡, 낭비성이라 불렸다. 청주 봉명동, 신봉동, 명암동, 가경동(佳景洞), 청원 송대리, 주성리에 수많은 무덤이 분포하여 청주를 중심으로 금강 중상류 지역과 남한강 상류에 이르는 영역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문의면, 현도면, 부용면 지역은 백제의 일모산군으로 불렸다. 5세기경 고구려가 잠시 남하하여 청원산성을 쌓았다. 신라는 6세기 중엽 청주에 진출하였고, 이후 후삼국기에 이르기까지 청주는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 685년(신문왕 5년)에는 옛 백제 지역인 금강유역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청주에 서원경이 설치되며, 신문왕 9년(689)에 경성[西原京城]이 축조된다.
서원경성은 청주 상당산성·당산토성·청주읍성·와우산성 등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그 위치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상당산성과 우암산(牛岩山)[338m] 주변에서 사량부(沙梁部)와 탁부(啄部)란 글자가 있는 기와가 발견되어 서원경도 왕경처럼 6부가 존재하는 행정도시의 면모를 갖추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또한 이를 반영하듯 청주에서는 흥덕구 운천동 사적비와 동종, 용암사 불상·농촌동 금동불·탑동 석탑, 명암동·용담동·금천동 통일신라무덤 등이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여러 유적과 기록은 청주문화가 신라문화적 특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음을 말해 준다. 또한 김유신(金庾信)의 아들 원정(元貞)이 서원술성(西原述城)을 쌓고, 혜공왕이 770년에 서원경을 다녀간[巡幸] 기록이 있다. 경덕왕 16년(757) 서원경으로 승격하다. 1933년 일본 정창원(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촌락문서」는 서원경과 그 주변의 촌락의 모습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다. 후삼국시대에는 청주를 두고 견훤(甄萱), 궁예(弓裔), 왕건(王建)이 대립을 했다.
고려시대인 태조 23년(940) 청주라 처음 칭하다. 성종 2년(983) 전국에 12목을 두었는데 청주에도 목을 설치하다. 성종 14년(995) 12목을 폐지하고 전국을 10도 12절도사로 개편할 때 전절군을 파견하고, 중원도에 속하게 하다. 현종 2년(1011) 거란의 침입으로 왕이 나주에 피난하였다가 개경으로 돌아갈 때 청주 행궁에서 연등회를 베풀다. 현종 3년(1012) 절도사를 폐하고 안무사를 파견하다. 공민왕 11년(1362) 홍건적의 침입(1361)으로 왕이 복주로 피난, 다음해 청주에서 7개월간 머물다.
조선시대 태조 4년(1395) 충청도로 개칭되면서 충주목과 함께 계수관이 되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에게 빼앗긴 청주성을 탈환하다. 효종 7년(1656) 노비 억이가 주인을 죽인 사건으로 서원현으로 강등, 현종 8년(1667) 청주목으로 복구되다. 고종 33년(1896) 전국을 13도로 개편하고 청주군(26개면)은 충청북도에 속하다(관할부는 충주에 설치). 융희 2년(1908) 관찰부를 충주에서 청주로 옮기다. 융희 3년(1909) 6월 25일 충청북도 청주군 청주면으로 개편하다.
일제식민지시대인 1913년 4월 1일 청주면에서 청주읍으로 승격하다. 1946년 6월 1일 청주읍이 부로 승격하고 청주군은 청원군으로 개칭하다. 1949년 8월 15일 청주읍이 시로 승격되어(23개 동) 그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니까 청주라는 이름이 1,100년 동안 지속된 것이다. 청주 천년의 역사 속에서 축적된 삶의 경험과 생존의 총체를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구한 시간 속에서 서서히 변화하거나 변하지 않고 내재한 문화구조가 있다.
청주문화의 기원은 신라시대의 서원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청주(서원)가 자기동일성과 변별성을 가지고 역사시대에 기능한 것이 바로 통일신라의 서원경 설치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상당산성 축조와 두루봉 구석기가 앞서기는 하지만, 역사를 축적해 나가면서 재역사화(re-historization)하는 과정에서 서원경을 가장 중요한 역사동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중원문화의 하위 영역으로서 서원문화권이라고 가정하는 청주문화는 삼국 쟁패의 영향권에 들기는 했지만 주로 백제와 신라가 중심이 된 문화다. 따라서 청주문화는 백제/신라의 이국문화(二國文化)로 남방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고 간적접으로 고구려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독자적 생명체로서의 청주문화 형성과정]
문화는 언제나 우수한 곳으로부터 열등한 곳으로 물처럼 바람처럼 흐른다. 때때로 열등한 문화가 우수한 문화를 축출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은 것은 세계문화사가 보여주는 바와 같다. 먼 옛날, 중화문화의 중력(重力)은 우리의 민족문화를 중국중심주의로 이끌었으며 우리의 민족문화는 문화의 아시아적 보편성 속에서 존재해 왔다. 한자문화권으로 표현되는 아시아적 보편문화에 따르면서 문화의 민족적 주체성을 추구한 우리의 민족문화는 차츰 그 독자적 생명력을 가지고자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갔다. 고대와 중세에 이르는 공동문화권에서 민족문화를 이룩하는 과정에서의 문화 인정투쟁(認定鬪爭)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청주문화는 민족문화의 하위영역으로 민족문화와 동일한 동아시아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중세에서 근세에 이르는 청주문화는 바로 이 문화의 인정투쟁 과정이었으며 독자적 생명력을 향한 항진(航進)이었던 것이다. 한자문화권이라는 ‘보편적 공동문화로부터 분리하는 과정에서 민족문화는 형성되는 것’이며 ‘지역문화는 민족문화와의 공동체의식을 공유하면서 독자적 생명력을 갖고자 할 때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 봉건시대의 봉건문화와 존화의식(尊華意識)을 가진 보편적 아시아문화로부터 근대의 민족문화로 이행하려던 그 시점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해 버렸다. 이러한 역사이행의 모순은 문화예술의 모순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중세 봉건문화에서 근세 민주주의 민족문화로의 이행은 순조롭지 못했다. 이른바 식민지적 근대로 인하여 청주문화는 식민지적 근대문화의 속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 때 청주에 서양과 일본의 문화가 이식(移植)된다. 이것이 이른바 이식문화론이다. 문화의 전통은 단절되고 민족문화의 정통성은 불확실해졌으며 정체불명의 외세문화가 민족문화를 말살하는 문화의 역사적 모순이 극심했던 것은 더 이상 거론할 필요조차 없는 사실이다. 이 당시의 문화예술은 문화의 반봉건시민민주주의 문화를 지향하는 한편 반제민족자주의 문화를 지향했지만 민족해방투쟁 과정에서의 민족적 역량의 부족은 민족문화와 민족생존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행시키지 않는다. 해방은 그러한 민족문화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청주의 문화예술은 나름대로 독자적인 생명력을 발휘하고자 인정투쟁의 기나긴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함이었던가?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중앙문화의 권력으로부터의 인정 또는 독립이고 나아가 제1세계 미국을 포함한 서양식민문화로부터의 독립과 인정이었으며 청산(淸算)하지 못한 일제 문화의 잔재로부터의 독립이었다. 그리고 정치와 권력, 경제와 행정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전세계 보편문화와의 민주적인 인정투쟁을 통하여 청주문화는 청주문화로 존재하기를 희망했다.
청주 문화예술은 민주적이고 민족적이며 시민적인 완결된 생명체로서의 문화예술을 향하여 지난 시절의 역정(歷程)을 지나왔다. 쉽게 말하면 ‘완결된 생명체 청주의 문화예술’을 위하여 수 없이 많은 다른 문화들과 인정투쟁(認定鬪爭)을 벌여야 했고 높은 수준의 문화예술을 위하여 끊임없는 자기반성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청주문화가 독자적인 문화체계를 가지는 것은 문화적 자기규율을 가지고, 자기재생산을 할 수 있을 때다. 청주문화는 자기정체성을 가지고 자기를 규율하면서 재생산되는 하나의 독자적인 문화이면서 동시에 한국문화의 하위영역이고 동아시아 문화의 한 부분이다.
[청주문화의 정신사적 특질]
청주문화의 정신사적 특질이라고 간주되는 충(忠)과 성(誠)이 있다. 이 봉건적 담론은 오래도록 청주인들의 의식을 규정하면서 생존의 법칙을 강화시켰다. 내면화된 봉건성(feudality)은 행동양식과 언행관습에 짙게 배어 있다. 과거 이데올로기와 생존형식의 연장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기도 하고 또 당연하기도 하다. 하지만 청주는 순응과 순리라는 가치관과 아울러서 저항과 진보의 가치관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봉건의식이 지속적으로 근대와 충돌한다는 점에 있다. 근대는 반봉건을 딛고서 성립한 세계사의 단계이며 합리주의, 이성중심주의, 자본주의, 과학, 기술, 산업, 국민국가(nation state)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봉건 가치들과 상충된다. 따라서 이것은 진위판단이나 가치판단의 문제 즉, ‘좋다’라든가 ‘나쁘다’라는 것이 아니고, 현상의 문제다. 봉건습속의 재생산이라는 점에서 보면, 역사의 시간을 연장하는 것이고 근대법칙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의 시간을 퇴행(退行)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가치지향 의식이다. 주자학적 이데올로기의 생성적 재생산은 오늘날, 청주인들에게 세계관의 불균형을 강화시킨다. 성(誠)의 본심 자체는 훌륭하다. 현대에도 언제나 존중되어야 할 덕목이다. 하지만 충과 성의 대상이 복고적(復古的)이기 때문에 문제가 야기된다. 이 충성담론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정치이념으로 발전한다. 충성담론 속에서 국가와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가족으로 구조화된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유교적 가치나 가족적 원리 자체는 훌륭하지만 근현대에서는 그런 이념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점 때문에 청주인들이 비교적 보수적이며, 중용(中庸)적이고 의리를 소중히 여긴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서 양반의식, 그리고 보수지향의식이 연원한다.
청주인들은 보수적이기는 하지만, 저항적이고 진보적이기도 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나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1861~1922], 신규식(申圭植)[1879~1922] 등은 저항과 혁명의 증인들이다. 역사적으로도 청주는 진보적이면서 저항적인 기질이 적지 않았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청주(淸州)가 땅이 기름지고 사람들은 호걸이 많아 변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장차 그들을 다 죽여 버리려 하고[이경관향청주, 토지옥요, 인다호걸, 공기위변, 장욕섬지(以卿貫鄕淸州, 土地沃饒, 人多豪傑, 恐其爲變, 將欲殲之)]”라고 쓴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언제나 순응적이고 종속적이지만은 않았다. 충성담론과 의리의식을 긍정적으로 계승하는 것은 좋지만, 재생산 재생성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청주인들이 수치스러워하거나 숨기고 싶어하는 역사적 사건 중의 하나가 이인좌(李麟佐)의 난이다. 이인좌의 난이란 조선 후기인 영조 4년(1728) 이인좌 등의 소론이 주도한 란(亂)을 말한다. 일어난 해의 간지를 따서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란(亂)의 경과는 이렇다. 소론은 경종 연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노론과의 대립에서 일단 승리하였으나, 노론이 지지한 영조(英祖)가 즉위하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박필현(朴弼顯) 등 소론의 과격파들은 영조가 숙종(肅宗)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남인들도 일부 가담하였다. 거병에는 유민의 증가, 도적의 치성, 기층 민중의 저항적 분위기가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반군은 지방의 사족과 토호가 지도하고 중간계층이 호응하며, 일반 군사는 점령지의 관군을 동원하거나 임금을 주어 동원하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이인좌는 영조 4년(1728) 3월 15일 청주성을 함락하고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는 점을 널리 선전하면서 서울로 북상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24일에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게 격파되었고, 청주성에 남은 세력도 상당성에서 박민웅(朴敏雄), 김중만 등의 창의군에 의해 무너졌다. 이 사건으로 내면화된 심층구조는 〈역모의 청주〉라는 것이다. 충성담론을 정면으로 부정하게 된 셈이어서 청주인들이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주자학적 이념을 청주인들이 내면화(internalization)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청주는 봉건시대의 중심이 아니었다. 왕권이 강력하게 작동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경기도처럼 직할 영지(領地)도 아니었고 경상도처럼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생존의 구조를 구축한 것도 아니다. 중심도 아니고 변방도 아닌 공간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청주인들은 전통적으로 ‘지배’와 ‘중심’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싶어 한다. 이것은 이념의 지향의식으로서, 사실과는 별개로 자율적으로 작동되는 의식의 체계다.
청주문화는 단기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오랜 장기지속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건이나 국면으로 역사를 이해하지 말고 지리로 시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날 학파는 사건과 같은 국면, 문명과 같은 중기지속,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존재하는 장기지속의 구조로 구분했다. 중기지속이란 수백 년에 걸쳐 있는 지속의 심층구조를 뜻한다. 일상성의 구조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면서 존재의 양식이 상대적으로 오래 지속되는 것이 중기지속이다. 다음과 같은 청주의 역사 개념도가 있다.
청주문화라는 것이 지속적으로 성립하려면 그 하부구조가 지속적이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페르낭 부로델의 개념으로 청주문화를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부로델은 아날학파의 중요한 역사학자로 역사의 시간 단위를 장기, 중기, 단기로 구분했다. 하나의 장르사가 중기지속의 시간구조를 가진다면 지역의 문화예술은 장구한 시간에 걸쳐서 변화하고 진화하는 장기지속의 구조를 가진다. 뗀느의 환경결정론과 유사한 개념이지만 문화가 결정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장구한 세월 속에 존재하는 기본구조가 있다는 것이므로 서로 다르다.
[청주의 교육문화적 특질]
청주 시내 중심부의 철당간은 국보 41호다.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鐵幢竿)이 정식 명칭인데 지금도 고고한 자태를 잃지 않아서 국가의 보물로서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당간을 세운 시기는 절의 창건과 때를 같이하는 고려 광종 13년(962)으로 이 철당간에 “[전병부경경주홍나학원경 한명식나말전사창경 기준대사학원낭중손인겸주대(前兵部卿慶柱洪奈學院卿 韓明寔奈末前司倉慶 奇俊大舍學院郞中孫仁謙鑄大)]”라고 적혀 있다. 학원경과 학원랑중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청주가 교육을 중시했다는 증거가 확연하다. 이것은 교육적 가치를 뜻한다.
1980년대까지 청주는 남한에서 손꼽히는 교육도시였다. 인구 대비 학생수가 많다는 수치계량적인 의미도 있고, 교육환경이나 교육수준이 높다는 뜻도 있다. 청주의 정체성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교육의 도시 청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를 지나면서 남한 전체가 교육적 획일화가 이루어지면서 〈교육의 도시 청주〉는 쇠퇴했다.
이 전통이 최근에 허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한다. 과거의 전통이 그대로 계승된다는 오판은 청주 정체성의 혼란을 가중시킨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청주 = 교육의 도시〉라는 등식이 흔들렸다는 것과 그 전통을 살리기 위해서 냉정한 현실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상상에서 교육문화의 도시 청주라고 하는 것과 현실은 상치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청주가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의 과제로 이행한다. 청주는 교육, 문화, 역사의 도시를 지향할 수밖에 없음은 더 이상 거론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역사문화적 특질]
청주를 주성(舟城)이라고 하는 것은 당간과 관계가 있다. 설화이기는 하지만, 배처럼 생긴 청주의 지형에 돛대격인 당간을 세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형상의 과학화로써 풍수지리적 사상의 현상이다. 여기서 무심천(無心川)의 북행하천의 하천적 의미와 북행의 의미가 동시에 개입한다. 무심천(無心川)은 물(水)에 해당하고 청주는 배에 해당하며 돛대가 당간이라는 이 지리적 형상 배치는, 그 자체로는 상당히 좋은 해석일 수 있지만 풍수지리를 넘어서서 비과학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청주인들은 그러한 사실을 아주 근거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남석교라는 청주 문화의 또 다른 문화유산이 대두된다. 남석교는 석교동이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다리와 성(城)을 표상하는 문화적 자산이다. 신라 박혁거세 시절에 축조되었다고 하는데, 그 진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1923년에 간행된『청주연혁지(淸州沿革誌)』에는 ‘한 선재 오봉원년(漢 宣宰 五鳳元年)(신라 박혁거세 원년, 기원전 57년)’이라 적혀 있고, 『하주당시고(荷珠堂詩稿)』(1894)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1975년의 발굴조사에서 표석은 발견하지 못했다. 다리를 만든 방법과 조사에 의해 나온 깨진 백자 조각으로 볼 때 조선시대 중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다리다.
[비왕조문화적 특성]
서원문화가 성립한다고 했을 때, 그 문화권역의 분류상 어떤 층위에 속하느냐가 중요하다. 백제문화권이나 신라문화권과 달리, 그리고 탐라문화권과 달리 중원문화권 그 중에서도 서원문화권은 왕조문화가 아니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데, 청주인들의 의식과 충돌하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다. 즉, 청주인들은 거의 관계가 없는 고구려 지향의식도 가지고 있으며 백제보다는 신라지향적이다. 그것은 서원경에서 유래한 ‘경(京)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경지향 의식(京志向 意識)’이다. 이것은 중국의 중원 중심의 천하관의 내면화로써, 반복적으로 구조화시킨 결과이다.
청주라는 이름 자체가 중국의 지명이다. 화이관(華夷觀)에서 천하의 한 변방으로 자처했던 고려/조선이 그 소중심의 주변인 청주를 청주로 명명한 것 자체가 이미 천하관이 적용된 결과다. 이(夷)가 화(華) 되려는 노력은 봉건시대의 질서였고 목표였다. 지금은 봉건시대가 아니다. 이(夷)였던 민족과 지역이 근대에 중심으로 재구조화되었기 때문에 과거의 내면화된 화이관은 해체되어야 한다. 아울러 왕권지향적 봉건사상도 해체되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청주의 비왕조문화적 문화권역 설정은 역사의 재구조화(re-historicization)이다.
역원(驛院)과 봉화(烽火)는 주변 공간의 소통전달 형식이다. 중심으로부터 하달되는 형식인 역원과 변방으로부터 상달되는 봉화는 어느 지역에나 존재했던 소통의 형식이다. 동헌(東軒)과 관찰사(觀察使) 역시 군현의 존재형식이다. 향교(鄕校)의 성문(城門) 역시 어느 지방에나 있었다. 공민왕(恭愍王)과 세종(世宗)의 어가(御駕)가 잠시 머물렀던 것을 빼고는 궁성(宮城)이 한 번도 없었던 청주의 서원문화는 비왕조문화적 특성을 보이고 있다. 남한에서 전통 있는 도시치고 한 번도 국가의 중심이 아니었던 곳은 많지 않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서원문화적 동일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원문화의 하위영역으로서의 서원문화]
현재 충북은 중원문화(中原文化)라는 역사문화 단위를 인정하고 있다. 1980년대 남한을 문화권역으로 구분할 때 충주, 제천, 단양, 음성 등지를 중원문화라고 개념화한 것이 이제는 충북 전체가 중원문화권이라고 고쳐 사용하게 되었다. 중원(中原)이라는 용어의 중화주의에 대해서도 논의를 해보아야 하겠거니와 중원문화의 중원이란 원래 757년 통일신라 이후에 국원소경을 중원경으로 개칭하면서 그 어휘가 역사화되었다. 긴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되 청주는 중원문화적 동질성이 많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중원문화가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부정하지도 못했다. 이것은 문화이론에서 새롭게 만들어서 개념화하는 것이 문화라는 원리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청주는 중원문화적 특질을 많이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호서문화와 같은 광의의 개념으로 청주의 문화를 개념화할 수도 없다. 여기서 청주의 문화적 전통과 문화적 특질을 미분하고 적분하여 서원문화라는 개념을 도출할 수 있다. 서원문화는 무심천변 일대의 청주 주변을 가리킨다. 청주는 (대) 중원문화권역의 하위 영역으로 서원문화권이다. 계보학적 관점으로는 상당문화권, 호서문화권, 청주문화권, 서원문화권 등이 가능하지만 ① 상당보다는 서원의 역사성이 깊고, ②호서문화는 청주를 넘어서는 상위의 개념이며, ③ 청주문화는 현재의 정치행정적 용어이기 때문에 문화적 개념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서원문화(西原文化)’라고 그 역사적 의미를 규정할 수 있겠다.
[최근세의 청주문화]
최근세의 청주문화란 구한말 이후, 애국계몽기와 일제식민지에 걸친 19, 20세기의 문화를 말한다.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조선은 자체로 근대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열강과 제국주의의 침탈을 받았다.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합방 이래로 식민지적 근대화의 길을 걸었다. 이 과정에서 외래문화인 일본문화가 내면화되었다. 한편 한국전쟁과 남한 정부 수립 이후에는 미국의 영향을 받아서 서구문화적 양상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2000년대의 청주문화는 다른 지역의 문화와 마찬가지로 획일적인 현상을 보이고 있다.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문화의 표피적 현상이 두드러지게 심하고 또 대중문화의 범람과 천민자본주의 문화적 현상도 심각하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적 현상은 비단 청주만의 특징은 아니기 때문에 청주문화만이 가장 부정적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러한 문화적 주체들이 문화적으로 자각하면서 새로운 지역문화를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
[청주인의 문화적 기질]
청주인들의 일반적 특질은 보수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내륙문화적 특질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한편 청주인들은 대체로 중용(中庸)과 균형을 중시한다. 극단적인 것을 꺼리고 보편적이고 상대적인 것을 좋아한다. 문화에서도 그런 현상이 드러나고 있다. 그것을 이른바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고 한다면 청주인들의 기질지성은 온화하면서 중용을 취하고 순리와 천명에 따르는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좀 더 세부적인 청주인들의 기질로는 엄숙주의와 복고지향성, 양반의식 그리고 내륙적 특질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갑자기 형성되거나 없어지거나 하지 않고 오랜 기간에 걸쳐서 형성되고 또 오랜 기간을 지속하는 문화적 본질이다. 그런 장기지속의 구조 위에 식민지적 근대를 거치고 문화제국주의의 침탈을 받으면서 청주문화의 주변부성이 강화되었다. 즉, 봉건국가적 체제 속에서는 소중심적 특징도 있었지만 세계체제 속에서 청주는 중심성을 박탈당했고 주변성이 강화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글에서는 설명하지 못했지만 선사시대와 고대의 청주, 봉건시대의 청주, 근현대의 청주로 나누어서 그 문화적 특질을 살펴볼 수 있다.
다른 도시도 그렇지만 청주는 문화적 단일성을 지향한다. 간단히 말해서 문화적 다양성(diversity), 이질성(heterogeneity), 혼종성(hybridity) 등을 거부하고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를 배척한다. 물론 상대적인 개념이다. 이것은 남한의 문화담론인 ‘민족문화’와 상동성이 있다. 식민지, 반식민지를 겪은 제3세계 국가들에서 민족문화는 무조건적인 선(善)이고 외래문화는 무조건적인 악(惡)일 수 있다. 그런 민족문화의 담론구조가 지역문화에도 적용된다. 청주의 문화 역시 단일성, 동질성,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그런 단일성과 함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어떤 문화이든지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다. 청주문화 역시 다른 문화와 교섭하고 좋은 점을 수용할 때 더 좋은 청주문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다가오는 세계체제의 시대에 다문화와 문화다양성, 그리고 복합문화는 필연적이다. 따라서 청주문화는 청주문화만의 본연지성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다른 문화를 수용하고 존중하는 새로운 문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