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4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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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石橋 |
영어의미역 | Namseokgyo Bridge, the longest stone bridge in the country |
이칭/별칭 | 대교(大橋),정진교,청남교,석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석교동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박상일 |
[정의]
충북 청주시 상당구 석교동의 육거리시장 내의 도로 지하에 매몰되어 있는 돌다리
[개관]
남석교(南石橋)는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재래시장인 육거리시장 내의 도로 지하에 매몰되어 있는 돌다리로서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조선시대 이전의 다리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석교이다. 옛 청주읍성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성안길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무심천(無心川)을 만나게 되는데 이 다리는 무심천(無心川)에 가설되었다. 가설시기에 대해서는 기원전 57년이라는 설이 있으나 신빙성은 없다. 청주읍성의 축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교량이라고 볼 때 대략 고려시대에 가설되었으며, 교량의 특성상 무심천(無心川)의 범람 때마다 유실되는 등의 피해가 발생함으로써 수차례 수·개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석교동이라는 지명은 이 다리에서 유래되었으며, 1930년대에 무심천(無心川)의 유로가 현재와 같이 변경되면서 교량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주변의 무심천(無心川) 하상지역이 매립되어 시장으로 변모하면서 남석교 역시 조금씩 매몰되어 완전히 모습을 감추게 된 것으로 파악된다. 지금도 80세 이상의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남석교를 직접 본 적이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남석교에 대한 문헌기록]
남석교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에 단편적인 기록이 조금씩 보이고 있을 뿐이다. 남석교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기록들은 대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정도이며, 조선말기로 가면서 개축 사실과 사적비를 세운 기록 등이 추가되고 있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지는 않지만 사적비의 비문에는 이 남석교의 창건연대를 박혁거세 왕이 신라를 건국한 것과 같은 해인 “한선제오봉원년(漢宣帝五鳳元年)”, 즉 B.C 57년으로 기록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며, 이러한 비문의 내용에 따라 이후의 몇몇 문헌에 그대로 인용된 것을 볼 수 있다.
먼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면 대교(大橋)는 곧 정진원 앞의 다리(大橋 卽情盡院前橋)라 하여 ‘대교’라는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정진원 앞에 있는 대교천(무심천(無心川))에 가설된 교량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대교는 일명 ‘남석교’로 곧 옛 정진원 앞의 다리(大橋一名南石橋卽古之情盡院前橋)라고 하여 처음으로 남석교의 명칭이 보인다. 이후『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는 정식 명칭으로 남석교라 쓰고 청주 남쪽 성밖에 있다고 하였으며, 또한 안정탁(安廷鐸) 목사가 을묘년에 남석교를 다시 세웠다는 내용까지 수록하고 있다. 이밖에『낭성지(琅城誌)』에는 대교는 일명 남석교로서 곧 옛 정진원 앞의 다리이며, 계묘년의 큰물로 3간이 떠내려갔으므로 최상정(崔尙鼎) 목사가 옛 모습대로 다시 세웠다는 기록과 함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청주의 읍기는 용두사(龍頭寺)의 터로서 절을 폐하고 읍을 세웠는데 읍의 앞이 개설되지 못하자 용두사의 스님이 이 다리를 창건하였다는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또한 조충현(趙忠顯)의 『하주당시고(荷珠堂詩稿)』에는 남석교비(南石橋碑)에서 이르기를 한선제 오봉원년에 가설되었다고 되어 있다. 현재 남석교비는 확인할 수 없으며, 오봉원년에 가설하였다는 내용 역시 믿을 수 없다. 끝으로 일제강점기에 간행된『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청남교(淸南橋)’라는 명칭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청주군의 남문 밖에 있는데 일명 남석교라 하고, 한 선제 오봉 원년에 가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 일본인 오우꾸마쇼지(大熊春峰)가 쓴『청주연혁지(淸州沿革誌)』 「명승고적편」에는 ‘시의 남단에 연하여 흐르는 무심천(無心川)에 놓였는데 남석교라 부른다. 신라시대 한 선제 오봉원년 즉 지금으로부터 1975년 전에 가설한 것이다. 그 길이는 34~35간이다. 근래까지는 2층의 교각을 나타내고 있었으나 수류의 변천으로 토사에 매몰되어 지금은 겨우 그 일단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다리의 양단에는 높이 약 1간의 고려견(高麗犬) 4개가 세워져 있었지만, 2개는 지사의 관사에, 2개는 동공원으로 옮겼다. 교판과 교각은 얼마나 거대한 석재로 되어 있는지 일견하여 가설 당시의 읍의 영화를 상기하는데 충분하다고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기록들은 축조 당시보다 훨씬 후대의 것들이지만 남석교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 조선시대에 남석교의 공식적인 명칭은 대교(大橋)였음을 알 수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대교라고만 하였고, 『여지도서(輿地圖書)』부터 그 이후의 지리지에서는 정식명칭으로 대교라 쓴 뒤에 일명 남석교라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정식 명칭은 대교이나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남석교라 불려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옛 정진원(情盡院)의 앞에 있는 다리라고 한 것으로 보아 ‘정진원 앞 다리’ 또는 ‘정진원 다리’로 속칭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데 특히 조충현의 『하주당시고(荷珠堂詩稿)』에서는 일명 “정진교”라고 기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일제강점기에는 남석교에 대한 공식명칭으로 ‘청남교’라 부르기도 하였다.『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공식명칭을 ‘청남교’라 쓰고 일명 ‘남석교’라고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 청남교는 지금의 청남교 즉 석교동 육거리에서 대전 방면으로 대략 200m 지점의 무심천(無心川) 상에 놓인 다리(일명 꽃다리)가 아니라 남석교의 명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청주읍성의 남문이 ‘청남문(淸南門)’이었고 이로부터 남쪽으로 쭉 뻗은 길에 연결되는 이 다리를 ‘청남교’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무심천(無心川)의 유로가 변경되면서 쓸모가 없어진 이 다리가 점차 매몰된 후 1932년에 지금의 무심천(無心川)에 다리를 가설하고 청남교라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즉 본래의 청남교(남석교)를 대신하여 그 연장선상에 다리를 신축하고 같은 이름을 붙여 청남교라 한 것이다.
둘째, 남석교의 창건연대는 사적비문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일부의 자료, 즉 『하주당시고(荷珠堂詩稿)』·『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청주연혁지(淸州沿革誌)』 등에 “한 선제 오봉원년”이라 하였으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도저히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다만 이 기록을 통하여 청주지역에서는 예로부터 이 남석교가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오래된 다리라는 구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봉원년” 창건설 이외에 현재로서 남석교의 초창시기를 알려주는 정확한 사료는 없다. 다만 남석교(대교)에 대한 기록이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이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1530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돌다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남석교의 교두에 세워져 있던 법수(法首)가 “고려견”으로 불려지고 있는 점에서 고려시대에 축조되었음을 은연중 나타내주고 있어 주목된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낭성지(琅城誌)』에 용두사 스님이 창건하였다는 기록이다. 이 책에는 계묘년의 대홍수로 다리의 3칸이 잘려나가 최상정 목사가 옛 모습대로 다시 세웠다는 내용과 함께 『청주읍기』는 본래 용두사의 터로 절을 폐하고 읍을 세웠는데 읍의 앞이 개설되지 못하자 용두사의 스님이 이 다리를 창건하였다고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실제 청주읍성의 터에는 본래 용두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현존하는 국보 제41호의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이 이를 잘 입증하고 있다. 철당간의 규모로 보아 용두사의 사역이 꽤 넓었다고 추정한다면 읍성 내에 이와 같은 사찰이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절을 폐하고 읍을 세웠다는『낭성지(琅城誌)』의 기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 읍성을 축조한 시기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없으나 용두사가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추정되고 철당간의 건립연대가 고려 광종 13년(962)임을 감안할 때 고려시대 초에 청주읍성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남석교도 읍성의 축성과 거의 같은 시기에 세워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현존하는 남석교가 청주읍성이 처음 축성된 시기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교량의 특성상 홍수에 의한 유실 또는 노후에 의한 붕괴 등으로 수없이 수·개축이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매우 단편적인 내용이기는 하지만 조선후기에 남석교를 개축하였던 기록이 보여 주목된다. 홍수가 범람하는 하천 위에 놓인 교량의 특성상 자주 유실되거나 일부 파괴되어 그 때마나 다시 축조하거나 보수하였을 것이다. 남석교도 당연히 처음 축조 이후 수없이 개축과 보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앞에 열거한 지리지의 기록에서는 두 차례의 개축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먼저『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주목조(州牧條)에 목사 안정탁이 을묘년에 구휼을 베풀고 남석교를 개건하였다고 되어 있다. 안정탁은 정조 18년(1794)에 청주목사로 재임한 것으로『정조실록(正祖實錄)』에 보이므로 을묘년은 정조 19년(1795)에 해당된다. 여기서 을묘년에 구휼을 한 것과 같은 해에 남석교를 다시 세운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당시의 지방관 재임기간이 매우 짧았던 것을 감안하면 남석교의 개축연대를 정조 19년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다음으로 필사본으로 된『낭성지(琅城誌)』에는 계묘년의 대홍수로 남석교의 3칸이 떠내려가자 최상정 목사가 옛 모습대로 다시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상정은 봉조하 최규서(崔奎瑞)의 아들로 경종 때와 영조 때 벼슬을 하였던 사람이다. 따라서 계묘년은 경종 3년(1723)으로 추정된다.
이상의 두 기록으로 보아 경종 3년(1723)과 정조 19년(1795)에 개축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사이에도 개축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기록만을 통해 본다면 1723년에 교량의 3칸이 유실되어 일부를 개축하였고 그로부터 72년 후인 1795년에 전체적으로 개건한 것이다.
[고지도에 나타난 남석교]
조선시대의 각종 고지도에 남석교가 그려진 것이 있다. 청주지방이나 혹은 청주읍성을 대상으로 그린 고지도는 현재 여러 종류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들 가운데는 간혹 남석교의 위치와 형상이 표현되어 있어 남석교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첫째, 조선 영조 36년(1760)에 편찬된『여지도서(輿地圖書)』의 「청주목조」 첫머리에 수록된「청주목지도」에 읍성의 남쪽으로 “대교천”과 함께 ‘남석교’가 표기되어 있다. 대교천의 물줄기는 그려져 있으나 남석교는 그림으로 표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이 지도는 남석교를 표기한 가장 확실한 것으로서 본문의 교량조에는 “대교”라 소개하고 있으면서 같은 책에 실린 지도에는 남석교라 표기하고 있어 이 다리를 일반적으로 남석교라 부르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리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최상정 목사에 의해 복구된 이후의 기록이므로 지금과 같은 구조였을 것이다.
둘째,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雲鳥樓)[중요민속자료 제8호]에 소장된『여지도(輿地圖)』속의 12번째 쪽에 수록된「청주읍성도」를 살펴보면 청주읍성 내외와 그 주변의 상황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지도는 충청병영 우후를 지낸 유억(柳億)이 제작한 것으로서 그 제작연대는 병영문을 폐문루(閉門樓)라 한 점과 이 지도의 뒷장에 나오는 청주지방의 지도를 「서원지도(西原地圖)」라 한 점으로 보아 대략 청주가 서원현(西原縣)으로 강등되었던 순조 26년(1826) 10월에서 헌종 1년(1835) 1월 사이로 추정된다. 조선후기의 청주지역의 상황을 가장 생생한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 채색지도에는 중앙에 청주읍성과 그 안팎의 각종 시설들이 매우 정확한 위치에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읍성의 남쪽에서 서쪽으로 돌아 북류하는 무심천(無心川)과 그 안쪽 제방에 능수버들이 촘촘하게 그려져 있고 서북쪽 무심천(無心川) 밖에는 인공조림인 봉림수(鳳林藪)가 표현되어 있다. 무심천(無心川)을 푸른색으로 채색하고 능수버들을 푸른 강물 밑으로 드리워진 그림자까지를 회화적인 수법으로 표현하고 있어 수준이 높은 화가에 의해 그려졌음을 보여준다. 읍성의 동쪽은 우암산(牛岩山)[338m] 줄기로 막혀 있는 가운데 향교와 민가들의 모습이 보이며 그 앞으로 읍성과의 사이에는 전답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역시 산수화와 같은 회화적인 필치가 엿보인다.
그런데 이 읍성도에서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읍성의 남문에서 일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상에 무심천(無心川)을 가로질러 남석교가 그려져 있는 점이다. 본래 이 지도에는 무심천(無心川)의 안쪽(북쪽)과 하천 중심부만을 그렸으므로 남쪽 제방에 접한 석교의 남쪽 끝 부분은 나타나 있지 않다. 석교는 사실감을 주기 위해 아래쪽으로 가면서 약간 곡선을 이루며 왼쪽으로 돌려진 모습으로 그렸는데 상판은 우물마루 형태이고 교각은 오른쪽(동쪽) 면의 석주가 나타나 있다. 그리고 북쪽의 교두에는 양옆으로 석주가 세워져 있는데 석주의 정상부에 짐승모양의 법수가 올려져 있어 현존하는 견상(犬像)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남석교의 북쪽 끝에 세로로 남석교라고 표기하여 놓았다. 역시 이 다리가 일반적으로 남석교라 불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 『여지도(輿地圖)』에는 「청주읍성도」에 이어 13번째 쪽에 수록된「서원지도(西原地圖)」가 있는데 역시 담채로 그려져 있다. 이 지도 역시 유억에 의하여「청주읍성도」와 동시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도의 폭이 가로로 넓은 장방형 외곽선 안에 청주목 관할지역 내의 산과 물줄기 그리고 중요 시설과 건물을 상징적으로 그려 넣고 그 옆에 명칭을 써 놓았는데 중앙에 청주읍성이 위치하고 그 남쪽에 남석교가 표기되어 있다. 석교의 형태는 자세하지 않고 무심천(無心川)을 가로지르는 교량 표시만을 하였다.
넷째, 조선 고종 8년(1871)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호서읍지(湖西邑誌)』의 「청주목조」 첫머리에 삽입된 「청주목지도」에 청주읍성이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그 남쪽으로 ‘무성천(茂城川)’이라 표기된 내를 가로질러 판석을 가지런히 놓은 모양의 다리를 그려놓고 ‘석교’라고 표기하였다. 여기서 무성천(茂城川)은 본문에 나오는 대교천이고 석교는 본문에 나오는 대교이다. 본문 「산천조(山川條)」에는 대교천이라 해놓고 지도에는 무성천(茂城川)이라 한 것이 주목되는데 이는 지금의 이름인 무심천(無心川)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문에는 보이지 않는 석교가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4종의 지도에 나타난 남석교를 관찰해 보면 우선 명칭에서 ‘남석교’ 또는 ‘석교’라고 표기하여 일반적으로 남석교라 불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여지도(輿地圖)』의 「청주읍성도」와 『호서읍지(湖西邑誌)』의 「청주목지도」에는 우물마루 형태로 짜여진 상판석이 잘 묘사되어 있고 특히「청주읍성도」에는 교두의 양옆에 세워졌던 법수 견상까지 그려져 있어 남석교의 원래 모습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남석교의 매몰경위]
남석교의 매몰 경위 및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1923년 무심천(無心川) 개수공사 때 매몰되었다고 하는 의견이 있으나, 『조선』잡지에 ‘현재 다리 기초가 노출된 부분은 전 높이의 1/2로서…’라고 서술되어 있는 점과 1928년「청주수도 일반평면도」에 석교가 보이고 있어, 이는 잘못 알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일제강점기 당시 도시계획의 입안에 따라 불필요한 다리라고 시멘트로 묻어버렸다는 의견도 있으나, 이때는 법정 도시계획이 실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22년에 완성된 대청주 계획에서는 남석교를 포함한 무심천(無心川)의 유로 변경계획은 포함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이 당시까지만 해도 남석교는 지상에 존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9년 10월 31일 「청주시가지계획령」이 고시되기 훨씬 이전인 1931년 10월 4일자 『동아일보』 무심천(無心川) 관련 기사에 ‘청주에서 다년간 현안이었던 청주 무심천 개수공사를…’이라는 문구와 『동아일보』 1932년 11월 23일자의「청주읍 석교정 하수공사 입찰」기사로 보아 남석교 일대에 대대적인 개수공사가 착수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건축회의 기관지인『조선과 건축』 1933년 1월호 조선건축계 소식란에 게재된 「충북청주교의 공사준성(工事竣成)」기사에 ‘전부터 시공 중이었던 무심천(無心川) 국부개수공사 및 청주교 청남교 가체공사(架替工事)는 어쨌든 준공한 것이어서 12일 오후 2시부터 현장 석교정에서 읍 주최의 준공축하회를 개최하였다. 공사는 청주교 18,090원, 무심천(無心川) 국부개수 33,250원, 청남교 26,460원을 투자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또한 다음해인 1934년 8월호『조선과 건축』지에 게재된「충북 청주시장 확장성행」이라는 기사를 싣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의 매립공사는 1930년대 초부터 이루어졌던 것이며, 남석교도 이와 때를 같이하여 매몰되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된다.
[남석교의 형식과 구조]
2004년 11월에 청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남석교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남석교의 형식은 가구식 구조인 판교(板橋, 널다리, 보다리)로 제방에 5단 높이(182㎝)로 석축하고 천상(川上)에는 68×52㎝ 크기의 대석(지대석 또는 장대석)을 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석 위에는 3개의 석주(교각)가 세워져 있으며, 그 형태가 양쪽의 석주는 위쪽 폭이 49㎝, 아래쪽 폭이 70㎝, 높이가 102㎝인 사다리꼴 형이고 가운데 석주는 위쪽과 아래쪽 폭이 50㎝, 높이가 115㎝로 일정한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석주의 길이가 짧을 경우 가석과의 틈을 판석으로 끼워 상부에서의 하중을 하부까지 무리 없이 전달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3개의 석주 위에는 가석(멍에, 교대석)이 좌·우로 놓였는데 그 형태는 바깥쪽 높이가 48㎝, 안쪽 높이가 23㎝로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갈수록 점점 단면적이 작아지는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형태로 인해 가운데 석주가 바깥쪽 석주보다 높이가 13㎝ 커져있다. 가석 위에는 양 측면에는 L자형, 가운데는 ㅁ자형 장귀틀이 놓여져 있으며 장귀틀 위에는 폭 45~55㎝, 길이 155㎝ 크기의 청판돌이 1구간에 5~6개, 2열로 깔려 있다. 석축과 석주까지의 거리는 291㎝로 실측 할 수 있었으나 석주의 간격은 시굴부분으로 실측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석축과 석주의 구조형태로써 석주의 간격을 추정하여 보면 석축과 석주간의 청판돌이 정확히 5개로 맞아 떨어지는 것으로 석주와 석주의 간격을 291㎝로 추정하였다.
남석교의 북단부과 남단부 시작부분을 발굴 조사하여 본 결과 남석교는 3행 26열의 석주로 총 길이는 80.85m로 확인되었다. 남석교의 평면은 현 도로선과 거의 일치하고 있으며, 단면은 청판돌의 위치가 북단부 65㎝, 남단부 165㎝로 실측되어 북단부에서 남단부로 갈수록 점점 깊이 매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