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3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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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淸日報- |
영어음역 | Chungcheong Ilbo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문헌/연속 간행물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사창동 304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민경명 |
창간인 | 김원근(金元根)[1886~1965]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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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종 | 타블로이드 배판 |
창건연도/일시 | 1946년 3월 1일 |
종결연도/일시 | 2004년 10월 정간 |
재발행연도/일시 | 2007년 3월 1일 |
[정의]
충청북도 청주지역에서 발행되는 일간 지방신문.
[창간경위]
1946년 3월 1일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대동인쇄소에서 『국민일보』제호로 창간되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김원근(金元根)[1886~1965]을 비롯한 청주지역 경제 인사들이 신문사 설립에 참여했다. 사시는 ‘민족의 발전’, ‘민주언론의 창달’, ‘시시비비’, ‘지방문화의 향상’이었다.
이후 『국민일보』가 『충북신보』로 바뀌었다가 1960년 8월 15일 『충청일보』로 제호가 변경됐다.
[구성과 형태]
대판 일간신문으로 창간 초기 타블로이드판인 때도 있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육, 생활/건강 등 종합지로서 다양한 섹션을 구성하고 있다. 지방면의 경우 2~4개 지역 시·군을 묶어 편집한다.
[변천]
해방 이후 한강이남에서 최초의 지방지로 창간된 『충청일보』는 해방과 근대화, 현대에 이르는 역사와 함께한 ‘지역사회의 증인’이다.
대동인쇄소라는 조그만 인쇄소에서 창간호를 발간한 『국민일보』는 5호를 내고 시설미비로 잠시 휴간했다가 가까스로 속간되는 초기 굴곡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50년 한국동란으로 장기간 휴간되는 사태를 맞았지만 9.28 서울수복을 맞으면서 부산에 피난해 있던 『국민일보』는 부산 국제신문사에서 1만여부를 발행, 배포함으로써 신문발행의 역사적 소명의식을 보여줬다.
『국민일보』는 1952년 ‘김성수부통령 사표 국회제출’이라는 통신을 잘못 받아 ‘李大統領 사표제출’로 크게 오보한데 이어 1953년 7월 23일 大統領을 ‘犬統領’으로 오식하는 파장을 일으켰고 11월 18일에는 韓·日 회담을 日·韓 회담으로 오식하여 폐간되는 사태를 맞는다. 당시 신문제작은 납 활자를 식자하는 방식이었는데 犬統領 사건을 계기로 犬자의 활자를 폐기처분 했다.
『국민일보』는 1954년 3월 『충북신보』의 창간으로 4개월 만에 명맥을 잇게 되지만 사실상 폐간당한 것이다. 이때 제1기 견습기자를 뽑아 해마다 수습기자 모집을 통한 기자 충원의 시대를 이어갔다. 충남북은 물론 부산·마산·여수·원주·춘천 등 30여개의 보급망을 가지고 있던 『충북신보』는 ‘주간지 냄새가 난다’는 지사 지국의 지적에 1960년 8월 15일『충청일보』로 제호를 변경했다.
1964년에 이르러 충청일보는 마리노니식 윤전기 1대와 시간당 1만3천부를 찍을 수 있는 2호기를 각각 구입하여 비로소 시설다운 신문사 시설을 갖추게 된다. 사세 확장에 따라 충청일보는 1977년 7월 17일 청주시 사창동으로 사옥을 신축 이전한다.
1988년 언론민주화 바람을 타고 충청일보노조가 탄생했고, 1989년 전국 최초로 기자의 선출에 의한 편집국장 직선제를 실현한다. 그 후 지속된 경영난을 겪던 충청일보는 2004년 10월 노사분규 소용돌이 속에서 법인 파산으로 정간되었다가 2007년 3월 1일 재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충청일보』는 ‘지역사회의 증인’이란 사시 아래 지역문화 창달에도 힘써 ‘중원문화권’ 정립에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간 주요연간 행사로는 시군대항역전마라톤대회, 충청원호대상, 8·15경축마라톤대회, 미술실기대회, 충청휘호대회, 미스충북선발대회 등 58년 역사에 걸맞은 문화예술체육행사 등이 다양하게 펼쳐왔다. 특히, 『충청일보』 신춘문예는 지역 작가들의 등용문으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1949년 1월 윤하영지사 공금유용 독직사건을 취재 보도하여 윤지사의 구속과 사퇴를 불러왔고 1967년 忠北廢道案을 폐기시키는데 앞장서는 등 시시비비와 도민을 위한 언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