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1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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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工藝 |
영어음역 | gongye |
영어의미역 | craft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집필자 | 유해철 |
[정의]
실용적인 물건에 본래의 기능을 살리면서 조형미를 조화시키는 솜씨, 또는 그 제품.
[개설]
공예는 인간생활 주변에서 쓰여지고 있는 가구, 그릇, 옷, 주택장식 등 생활용품이며, 이는 공예가 인간생활과 매우 밀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공예는 일반 비품으로부터 장식품, 신앙물, 시설물에 이르기까지 아주 광범위하다. 신앙물은 장승, 신주, 불상, 석등, 석탑, 부도 등이 있으며 시설물은 비석, 석수(石獸), 석인, 건축부재(建築部材)에 까지 이른다.
도구는 절구, 방아, 매, 다듬이돌, 숫돌, 저울추, 약연, 석구(石邱), 수조(水漕), 도가니 등을 말한다.
이상은 모두 실용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그 만듦새에 따라 공예적으로 가공된 것도 있고 혹은 단순한 민구에 불과한 것도 있다.
충북지역은 전반적으로 남한강 수계의 북부지역(제천시, 단양군)과 미호천(美湖川) 수계의 중부지역(청주시, 청원군, 진천군, 음성군, 괴산군)과 금강 수계의 남부지역(옥천군, 보은군, 영동군)으로 구분된다. 이 모든 지역은 충북이지만 선사시대부터 각각 분리된 생활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 의하여 전체가 통합되기 전까지 독자적인 문화적 기반을 가리고 있었고, 삼국시대에는 세 지역이 각각 고구려, 백제, 신라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통일신라시대에도 각기 다른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를 조선시대 청주목(淸州牧)의 생활권이었던 중부지역의 역사적 문화적 특성을 중심으로 공예의 변천을 살펴본다.
중부지역은 청주시를 중심으로 청원군, 북쪽에 위치한 진천군, 음성군과 동쪽의 괴산군, 증평군을 포함하는 미호천(美湖川) 수계에 해당된다.
[선사시대]
신석기시대에 속하는 유적이 청주 상당산성 남문밖, 청주시 송절동, 청원군 가외면 쌍천리 등에서 확인 되었다.
청동기 유적으로는 흥덕구 내곡동과 향정동, 청원군 강내면 황탄리, 내수읍 내수리, 화상리 등지에서 민무늬 토기 주거지가 보고 되었다.
특히,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 송절동 일대에서는 대규모 유적지가 발굴 조사되었다. 대체로 청동기 유적지는 하천주변의 구릉지를 중심으로 곳곳에 분포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읍 휴암리,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 등 금강 유역의 청동기 유적과 문화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4세기 이후 백제의 남진으로 미호천(美湖川) 유역은 백제의 영향력에 놓이게 되었다. 청주 동북부인 청안을 중심으로 철산지가 분포 되어 있다. 진천군 덕산면 석장리에서는 백제시대의 제철 유적이 출토되어 철자원의 확보를 위하여 청주 방면으로 진출하였던 사실이 증명되었다.
5세기에는 백제 토기가 진천, 증평, 청주 등지에서 공통적인 양식으로 토기가 출토되었다.
5세기 후반에는 보은지역으로 신라가 진출하였고 음성, 진천, 괴산 등지는 고구려가 진출하였으며 청원군 서쪽은 백제가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치열한 전쟁이 펼쳐지면서 청원군 일대가 고구려군이 석권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서 청주 주변에 수많은 산성의 밀집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의 각축장이었던 청주지역은 6세기 중반 신라가 진출하면서 ‘청원 비중리 일광 삼존불’ 같은 주목되는 작품이 등장한다. 이는 불교문화의 중흥으로 인하여 석조미술품으로서 그 가치가 매우 중요하다.
통일신라시대의 ‘탑동 오층석탑’은 2중 기단을 갖춘 오층석탑이었으나 현재는 상대 갑석 이하의 기단부가 결실되고 탑신부 3층만 남아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개석이 각각 1개의 화강암으로 조성되었는데 1층 옥신 4면에는 양우주가 각출 되었으며 그 중앙에 여래좌상 1구씩을 양각하여 청주에서 유일하게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주목된다.
[고려시대]
고려시대 청주는 새로운 모습의 도시로 변모되었다. 백제 때 상당현을 거쳐 통일신라 때 서원경이었던 이 지역은 서원부(신라말, 고려초)라 불리거나 청주라고도 불렀다.
청주지역은 예로부터 높은 수준의 인쇄출판문화를 자랑해왔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본『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의 인출지가 청주라는 사실만으로도 청주지역의 고 인쇄 출판문화는 입증 되는 것이다.
고려시대 청주 흥덕사에서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과 『자비도량참법집해(慈悲道場懺法集解)』가 금속 활자본으로 인출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업적이 높이 평되고 있다.
상당구 내덕동 용암사에 있는 ‘석조비로사나불좌상’은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의 절터에 있는 삼존불상은 본존불과 협시보살, 단순한 두광, 그리고 화불을 좌우에 배치되어 청주의 대표적인 석불로서 X자 옷주름과 상체의 장식성이 고졸한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비로사나불’은 비로자나불이라고 하는데 불상의 세부모습을 살펴보면 지대석,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이루어졌는데 중대석은 팔각이며 상대석은 원형으로 불상을 바치고 있다. 높이 16㎝ 지름 102㎝로 16잎의 연꽃무늬를 아래로 향하게 조각되었다. 수인은 오른쪽 집게손가락을 세우고 왼손으로 잡은 지권인이고 법의는 좌우 통견으로 처리하여 양 어깨에 걸쳐 내리었으며 사실적으로 표현 하였으며 신라의 조각기법의 특징을 볼 수 있다.
‘흥천사 동종’이 나온 고려시대 절터를 우암사지(牛岩寺址) 또는 은덕사지로 불리었다. 1970년 청자발 1점과 동종 1점, 철탁 등이 출토되었다. 동종은 청주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음통을 감싼 용은 갈기와 비늘이 선명하게 조각 되었으며 들어올린 발에 여의주가 있어서 섬세한 조각으로 생동감을 주었으며 주름장식으로 표현되었다.
‘용두사지(龍頭寺址)철당간’은 당간의 당간기에 준풍3년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고려시대 광종 13년에 해당되어 창건 시기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이 철당간은 30단의 철통으로 60척의 높이로 고려시대 청주지역의 중심사찰로 짐작되며, 당간지주는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전형적인 양식으로 양쪽 밖으로 곡선을 그리고 있는 단순한 기둥의 형태이다.
[조선시대]
조선시대 청원군 문의면 추곡리에서 출토된 중요민속자료 제117호 ‘박(朴)장군묘 출토 유물’은 형태와 질감 무늬로 보아 임진왜란 전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출토 유의는 다양해서 선조대 전후의 복식생활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에서 출토된 ‘청원 구례손씨출토유물’은 17세기 경으로 보이는 중요민속자료 제116호로서 ‘남명주솜저고리’, ‘소색단속곳’, ‘면솜치마’, ‘공단소모자’, ‘겸유직령포’ 등은 임진왜란 전후의 복식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현황]
청주지역의 현대 공예는 1979년 청주대학교에 공예과가 설치되면서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제5회 충청북도 미술대전에서 공예부문의 출품자가 전무한 상태였던 상황에서, 공예과의 신설은 지역의 공예의 명맥을 이어가고 신진 공예작가를 배출시키는 전기가 되었다.
1987년에는 충북공예가회가 창립되어 청주를 중심으로 활발히 작품 전시회가 매년 개최하고 있다. 그밖에 청주대 공예과 졸업생으로 구성된 토화전, 청염전, 충북도예가회 등 그룹 활동을 하는 공예인들이 청주 공예발전에 참여하고 있다.
1999년에는 격년으로 열리는 세계적인 공예인들의 축제,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가 만들어져 청주가 세계속의 공예도시로 발돋움하고 국내외 많은 공예인들에게 창작의 저변을 크게 넓혀주고 있다.
2001년에는 전국 최초로 한국공예관이 설립 개관되어 한국을 대표하는 공예의 장으로서 공예전시, 공예정보, 판매 등을 전문화하는 기관으로서 청주의 명소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현재 청주는 공예의 불모지에서 세계인이 주시하는 공예를 대표하는 국제도시로 발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