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0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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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知敬 |
영어음역 | Yun Jigy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규근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유일(幼一), 호는 창주(滄洲)이다. 좌의정 윤개(尹漑)의 증손이며, 도승지 윤담무(尹覃茂)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1603년(선조 36)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광해군 1년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15년 서원현감이 되었고, 1617년(광해군 9) 병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에는 세자시강원겸필선을 거쳐 홍문관의 수찬·부교리를 역임하였으며, 다시 필선·보덕·수찬에 번갈아 보임되었고, 이어 의정부 검상·사인을 지냈다. 그가 청요직을 지낼 무렵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정형복(鄭亨復)으로 하여금 폐모론에 대한 반대상소를 올리게 하고, 폐모론에 반대한 정홍익(鄭弘翼)이 유배당하자 도성문밖까지 전송하는 등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였다.
1623년 겸보덕으로 궐내에 입직하던 중 인조반정이 일어나 반정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될 뻔하였으나 이귀(李貴)의 만류로 화를 면하고, 반정에 호응하여 전한이 되었다. 이어 부응교·응교·집의·사간·사인을 역임하고 1627년(인조 5) 보덕으로 있을 때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이때 대부분의 조신들이 인조의 피난을 주장하였으나 그는 500명의 군졸만 있으면 임진강을 막을 수 있다는 기개를 보여 검독어사(檢督御史)로 임진강에 파견되어 적을 막으려고 전비를 갖추는 도중 강화가 성립되어 적이 물러갔다.
그 뒤 인조는 교서를 내려 그의 활약을 칭찬하였고 그 공으로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이듬해 우부승지를 거쳐 1630년 예조참의로 전직되어 재이(灾異)에 대하여 구언(求言)할 것을 건의하였다. 1632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첨지중추부사에 보임되었다.
[의의와 평가]
청나라와의 척화를 강력히 주장하여 윤황(尹煌)·윤형지(尹衡志)와 함께 삼윤(三尹)으로 당시 사람들로부터 높이 칭송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