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7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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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小京 |
영어음역 | Sogyeong |
영어의미역 | secondary capital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양기석 |
[정의]
신라시대 중요한 지역에 두었던 지방 특별 행정구역.
[제정경위]
신라의 소경제 채용은 고구려의 3경제(三京制)의 설치와 운용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고, 그 직접적인 설치 계기는 6세기 초에 걸쳐 진행된 일련의 체제정비와 수도의 도시계획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즉 지증왕(智證王, 500~514)대에 지방 행정조직인 주와 군제가 실시되고, 중앙과 변경지역에 이르는 관도와 우역이 정비됨에 따라 수도와 변경지역을 연결하는 중간 거점도시로서 소경제가 채용된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 고구려, 백제, 가야의 복속 지방민에 대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실시되었으며, 또한 수도가 동남쪽으로 편재 된 점을 보완하는 동시에 지방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수도안의 귀족세력을 분산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변천]
신라의 소경제는 설치과정의 변화에 따라 세 시기로 구분된다. 6세기부터 7세기 중엽까지 신라 중·고기에는 최초의 소경인 아시촌소경(阿尸村小京)을 비롯하여 국원소경 및 북소경이 설치되었다.
아시촌소경은 514년(지증왕 15)에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안정동 일대로 잠시 설치되었는데 이곳은 신라가 상주나 영주 방면을 거쳐 소백산맥 이북으로 진출하는데 요충지라 할 수 있다. 이어 557년에는 충주지역에 국원소경이 설치되었는데 충주지역이 갖고 있는 전략적 중요성에 따라 부도(副都)나 다름없는 북방 영토의 전초기지로서 역할이 기대되는 곳이다.
그밖에 강릉에 북소경이 설치되었으나 고구려에 부용된 말갈세력으로부터 침략의 위협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658년에 폐지하였다. 이는 지방제도의 정비에 따라 수도의 기능을 분산하고 중앙정권에 의한 지방 지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5소경이 등장하는 678년(문무왕 18)부터 685년(신문왕 5)에 걸친 시기이다. 원주의 북원소경(678), 김해의 금관소경(680), 청주의 서원소경과 남원의 남원소경(685)이 차례로 설치되어 통일전의 국원소경과 함께 5소경의 완비를 보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국원소경이 중심이 되고 그 사방에 방위명 소경이 설치되었다.
방위명 소경이 고구려와 백제의 옛땅에 설치된 것이라면 금관소경은 가야 옛땅에 설치되어 복속지역에 대한 통치상의 효율성을 고려해서 배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통일 이전과는 달리 통일 전쟁이 끝난 직후 귀족세력의 재배치를 통한 왕권의 전제화를 추진하는 과정과 관련 있어 보인다.
그리고 소경의 기능이 군사적 측면보다 행정적 성격으로 변모하게 되는데 이는 인근 주와 군의 재지세력을 견제 감시하는 역할을 통해 중앙권력의 지방 지배를 적극화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신라 하대에 이르면 한화정책에 따라 소경을 경(京)으로 개칭하고 관원을 당나라식으로 대윤(大尹), 소윤(少尹)으로 불렀으며 그 위상도 군태수로 인식될 정도로 약화되는 현상으로 바뀌었다.
[청주의 소경]
685년(신문왕 5)에 대략 현재의 청주시와 청원군 일부 지역에 걸쳐 서원소경이 설치되었다. 서원소경의 중심지 위치는 청주시 중심부인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 부근일 것으로 짐작되며, 그 뒤 우암산(牛岩山)[338m] 토성 및 청주 상당산성과 연계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소경에는 수도와 같이 6부 조직을 두고 수도의 진골귀족들을 이주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는 지방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중앙의 귀족세력들을 분산 약화시키고자 한 왕권 강화의 측면에서 나온 조치였다. 고려시대에 개경의 행정조직을 축쇄한 서경의 분사제도(分司制度)의 효시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