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6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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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薰 |
영어음역 | Park Hun |
이칭/별칭 | 문도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재학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기묘명현(己卯名賢).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형지(馨之)이며, 호는 강수(江叟)이다. 규정공(糾正公) 박현(朴鉉)의 9세손으로 아버지는 눌재공 박증영(朴增榮)이고, 할아버지는 박미(朴楣), 증조할아버지는 박중손(朴仲孫), 외할아버지는 박영달(朴英達), 처의 아버지는 변기지(卞紀之)이다.
[활동사항]
1504년(연산군 10) 생원시에 급제하여, 천거로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를 거쳐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외지로 나갔으나 임금이 어진 신하를 곁에 두지 않고 외직으로 내보내는 것은 잘못이라는 여론에 따라 사헌부 감찰로 바뀌었다가 곧 공조좌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에 올랐다.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사헌부 장령, 사간원 사간 등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1482~1519] 등과 함께 화를 입어 성주(星州)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의주로 옮겨졌고, 13년 뒤 안악(安岳)으로 옮겨졌다. 3년 뒤인 1533년(중종 28)에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향리인 청주로 돌아와 청원군 강외면 지역에 은거하며 어머니를 모셨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상을 치르다 몸이 상하여 병을 얻어 일생을 마쳤다. 그는 도량이 크고 신중하며 말이 적었으며, 당대의 큰 선비와 두루 사귀었다. 특히 조광조와 가장 친하였는데 조광조가 도목정사(都目政事)를 할 때에는 그와 상의하였고, 그의 의견에 따라 승진시키거나 내쳤다고 한다.
[저술]
『강수유고(江叟遺稿)』 2권 2책이 전한다.
[묘소]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신촌리 산9-8에 있으며, 향토유적 너-4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과 금산의 덕산사(德山祠)에 제향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사림이며, 청주·청원지역에 세거하는 밀양박씨(密陽朴氏) 규정공파 종중의 대표적인 현조(顯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