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273
한자 四-一九革命
영어음역 Sailgu Hyeokmyeong
영어의미역 April Revolu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양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연도/일시 1960년 4월 19일연표보기

[정의]

1960년 4월 19일을 전후하여 일어난 민주주의 혁명.

[개설]

이승만(李承晩) 정권은 반일주의와 반공주의를 내세우면서 독재체제를 수립해갔지만, 이승만 정권의 반일주의는 일본에 대한 하나의 외교상의 정략에 이용되었을 뿐이며, 정계에서는 물론 문화, 교육계에서도 친일세력은 그대로 안존했다. 친일파 숙청의 실패로 이승만 정권 존립의 민족사적 명분은 무너졌고, 다만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립을 표방한 반공주의만이 정권의 명분으로 남게 되었다.

정당성을 잃고 독재체제로 치닫던 이승만 정권에 대항한 민중운동으로서의 4·19혁명은 국민주권회복운동으로 출발했다. 제4대 대통령선거에서 특히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자유당의 선거부정은 절정에 달했다. 선거 당일 경상남도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민중시위가 일어나 시위대가 경찰서를 습격하다 8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시위가 서울, 부산 등지로 퍼져나가는 한편, 마산에서도 피살된 시위학생 김주열의 시체 인양을 계기로 두 번째 민중시위가 일어났다.

[발단]

4·19혁명이 폭발한 직접적 동기는 대통령선거에서 자유당의 파렴치한 선거부정에 있었지만, 그것은 단순한 부정선거 규탄운동이 아니라 국민주권주의를 회복 하려는 민주주의 운동이었다.

미국의 경제원조의 감소로 산업이 침체하고 실업률이 높아져서 한국동란 중 독재체제 및 반공체제 강하에 눌려 있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활성화되고, 이승만 정권에 대한 지지마저 약화되어 4·19 민주화혁명은 독재정권 타도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4·19 민주화혁명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위에 성취된 민주주의는 5·16군사쿠데타로 인해 그 발전의 진로가 또다시 불투명하게 되었다.

[청주지역의 4·19혁명]

청주공업고등학교의 서클인 공석회는 3월 9일의 민주당 강연을 계기로 시위를 벌일 것을 모의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동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되고 시위는 사전에 봉쇄되었다. 경찰에 연행된 학생들은 시내 소명여관에 감금되어 있다가 민주당 강연이 끝난 다음 풀려났는데, 이 학생들의 발의로 각 학교 대표들이 모여 3월 12일 야간에 봉화데모를 하기로 결의하였으나 이것도 사전에 발각되어 좌절되었다.

그런데 3월 13일, 청주에서는 경찰이 학생들을 협박하여 자유당 관제데모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각 학교 학생대표 13명은 연행되어 고문을 받은 뒤 소명여관에 감금되었다. 연행 되었던 학생들은 15일 오후 5시에 석방되었는데, 그 다음날 마산사건이 보도되고 그 후 김주열의 참사사건이 보도되자 학생들은 다시 동요하기 시작했다.

청주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은 4월 16일 청주지방의 장정 징집일을 기하여 청주공업고등학교 교정에서 데모를 일으키려 하다가, 경찰의 방해로 여의치 못하자 장정 환송을 위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던 청주역으로 분산, 이동하였다. 그러나 선언문을 낭독하려 할 때 경찰이 몰려와 데모대는 해산 당했고, 이때 학생 40여 명이 연행되었다.

4월 18일 청주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은 오전 9시 교문 진출을 시도했으나 경찰에 의해 봉쇄되자, 교내는 들떠 있었고 수업시간에는 삐라를 만들기에 바빴다. 그러나 11시경 천여 명의 학생들은 교문 진출에 성공했고, 내덕동 방면으로 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청주상업고등학교 학생 천여 명과 청주고등학교 학생 9백여 명이 합세하여 시위대는 순식간에 불어났다.

시위대는 도청 앞에 이르러 증원된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에 맞서야 했다. 이때 230여 명의 학생이 연행되었는데, 그 중 주모자로 몰린 오성섭, 신광호, 이용희, 이세현, 임병준 등 5명은 구류처분을 받았다. 30여 명의 부상자를 낸 시위대는 경찰의 공포발사로 2시경 일단 해산하였으나, 대다수의 학생들은 우암산(牛岩山)[338m] 계곡으로 피하였다가 다시 청주여자고등학교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시내는 오후 4시경이 되어서야 잠잠해졌으나, 다시 8시경 5백여 명의 학부모들이 자녀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또한 청주대학교, 세광고등학교 학생들이 부정선거 규탄과 구속학생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했는데 경찰은 소방차를 동원하여 제지하였다.

충북대학교 학생들은 20일로 시위를 예정했으나 19일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 그 후 질서회복 을 위하여 충북대학교, 청주대학교 학생이 주동이 되어 시내 각 고등학교 학생대표들이 전력을 다했다.

[의의와 평가]

1960년 당시 한국의 상황은 이승만 정권의 권력구조와 정치의식 계층, 특히 학생들의 가치관 사이에 크고 명백한 균열을 보이고 있었다. 4·19혁명은 이승만과 그의 지지세력에 대항하는 반정부세력에 의한 혁명적 시도였다.

그러나 시위학생들과 시위군중들은 그들 스스로의 조직화된 혁명의 지도력을 가지지 못했다. 조직화된 혁명의 지도력이 없는 상태에서 학생은 학원으로 돌아가고, 혁명의 결과도 당시로서는 별다른 대안 없이 유일한 정치세력인 민주당이 가져갔다. 역설적으로 이와 같은 명백한 지도력의 부재가 이승만의 조속한 사임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나 이는 이승만 정권의 붕괴 후에 '혁명'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