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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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淸州牧掛書事件 |
영어음역 | Cheongjumok Gwaeseo Sageon |
영어의미역 | Cheongju-mok Appeal Cas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1826년(순조 26)에 청주목에서 일어난 괘서사건(掛書事件).
[개설]
1826년 3월 16일 청주성 북문에 두장의 괘서(掛書)가 걸린 사건과 같은해 10월 초 청주목 관아에 괘서가 걸린 사건을 말한다.
[전개]
청주북문 괘서사건은 충청병사 이겸회의 조사로 주모자 김치규(金致奎), 유치중(柳致仲), 이창곤(李昌坤) 등을 체포하고, 안성에 살고 있는 공모자 유성호(柳性浩)를 체포함으로서 일단락되는데, 이들은 괘서를 통하여 왕실을 비판하고 나아가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비기(秘記)를 이용하여 조선왕조의 멸망론을 주장하고, 홍경래(洪景來)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서 제주도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는 등의 말을 유포시켜 정치적·사회적 혼란과 소요를 조성했다.
청주진영 괘서사건은 청주목의 아사에 괘서를 거는 것과 동시에 관아에 투서한 사건이다. 사건의 진상은 청주영장 조우석(趙禹錫)이 영월지방의 정상채(鄭尙采)와 충주의 정길용(鄭吉龍)[본명 劉吉龍]을 체포하였고, 이들을 통하여 주모자 박형서(朴亨瑞)[본명 朴在勝]을 검거하므로써 전모가 밝혀졌는데, 내용은 위와 유사하였다.
[결과]
이 사건으로 청주목은 서원현(西原縣)으로 강등되었고, 충주와 청주를 합하여 충청도(忠淸道)라 하던 것을 공주와 충주를 합하여 공충도(公忠道)로 개명한다. 이 사건은 조선 후기 극심한 사회혼란과 정치적 불안에 편승한 참위설의 만연을 보여주며, 청주가 그 주요대상지였음을 보여준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