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0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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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王可道 |
영어음역 | Wang Gad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이미숙 |
[정의]
고려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초명은 자림(子琳)이다. 현종 때 상주국 개성현 개국백(上柱國 開城縣 開國伯)의 봉작과 수충창궐공신(輸忠創闕功臣) 칭호를 받으면서 왕씨로 성을 하사받았으며, 그의 부인 김씨(金氏)는 개성군부인(開城郡夫人)에 봉해졌다. 왕가도(王可道)의 딸들은 현종 때 원질귀비(元質貴妃)가 되었으며, 덕종 때는 현비(賢妃)로 책봉되어 상회 공주를 낳았다.
[활동사항]
청주사람으로 성종(成宗) 때에 장원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서경에 배치되어 서기(書記)를 맡아보았다가 화주 방어사를 지냈다.
1014년(현종 5)에 재정상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몰수한 데에 불만을 품은 상장군(上將軍) 김훈(金訓)·최질(崔質) 등의 반란으로 무신이 권력을 잡아 기강이 문란해졌다.이에 격분하여 이듬해 1017년 3월에 일직(日直) 김맹(金猛)과 비밀리 협의하여 왕께 아뢰고, 임시로 서경유수관 판관(西京留守官 判官)이 되어 왕이 서경에 행차하여 장락궁(長樂宮)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취한 틈을 타서 군인을 출동시켜 김훈·최질·이협(李協)·최가정(崔可貞)·석방현(石邦賢)·이섬(李暹) 등 19명을 참살하고 무신정권의 폐를 제거하였다. 그 공으로 상서우승·동지중추사를 거쳐 호부상서를 역임하고, 치성공신의 칭호를 받았으며, 1027년에는 참지정사에 임명되었다.
1029년에 좌복야(左僕射) 이응보(李膺甫), 어사대부(御使大夫) 황보유의(皇甫兪義) 등과 개경에 나성을 쌓은 공으로 검교태위 행이부상서로 승진되고 태자소사 참지정사를 겸임하였으며, 상주국 훈위와 개성현 개국백의 봉작과 식읍 700호를 받았으며, 수충창궐공신을 받고 임금의 성인 왕씨를 성으로 하사받았다.
덕종이 즉위한 후 딸이 왕비가 되자 문하시랑 동 내사문하평장사에 올랐다. 그 뒤 신병으로 인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병을 치료하다가 1034년(덕종 3)에 사망하였다. 영숙(英肅)이라는 시호를 주었으며, 그 후에 태사중서령의 벼슬에 추증되었다.
[의의와 평가]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해서를 잘 썼다. 왕가도는 무신들이 기강을 문란케 하자 이에 분개하여 이를 바로 잡았다. 또한 거란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사신을 억류하였으므로 화친을 끊고 자주성을 회복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면을 본다면 왕가도는 문신이지만 무신과 같은 기질을 가졌으며, 자주 의식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 문신인 이제현(李齊賢)은 덕종이 나이 아직 어리므로 전쟁을 조심해야 할 때 왕가도가 거란과의 화친을 끊자고 주장하였으니 이것은 그들과 우호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백성을 보호하려는 황보유의의 의견만 못하였다고 하였다.
[상훈과 추모]
현종 묘정에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