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503 |
---|---|
한자 | 李英耈 |
영어음역 | Yi Yeongg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홍갑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활동사항]
세종 때 생원시에 합격한 후 1432년(세종 14) 식년시(式年試)에 동진사(同進士) 1등으로 급제하였다. 집현전 교리로 재직 하던 1445년에는 세자의 명을 받아 양전(量田)을 시험하는 공을 세웠고, 1450년(문종 1) 경기도 광주판관(判官)으로 있을 때에 국법을 어긴 승려 설정(雪正)과 도명(道明)을 체포하는 일 때문에 군사를 내어 몹시 놀라게 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곧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으로 영전하였으며, 문종 임금의 특명으로 관리 봉급을 보관 관리하는 광흥창에 판견되어 감찰업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대자암(大慈庵)에서 불사를 크게 벌리는 일과 서연(書筵)에서 빈객(賓客)으로 하여금 진강하도록 진언을 올리는 등 간관으로서의 풍모를 잃지 않았다.
1451년 평안도 도사로 파견되어 백성들에 대한 진휼을 극진히 하였으나, 박이창(朴以昌)이 북경(北京)으로 갈 때 양곡(糧穀)을 지나치게 많이 주어 이를 수송하던 군마(軍馬)들이 압록강(鴨綠江)에서 익사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452년(문종 2)에는 남원부사로 파견되었고, 1455년(세조 1) 원종공신에 녹공되었다. 1457년에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목민관으로서의 임무를 다했고, 1462년에는 공주목사로 파견되었다. 그 이후 충청도 진잠(鎭岑)[현 대전시 유성구 원내동]으로 퇴거하여 살고 있던 중 성종(成宗)의 부름을 받아 새로이 관직에 나갔다.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행광주목사(行光州牧使)로 파견되었고, 가는 곳마다 치적이 높았다. 관직에 사퇴한 후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차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