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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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延年 |
영어음역 | Nam Yeonnye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민식 |
[정의]
조선 후기의 무신(武臣)으로 무신란(戊申亂) 때 순절한 충신.
[개설]
1728년 무신란 당시 청주영장(淸州營將)으로 반군(叛軍)의 회유를 물리치고 순절하여 충절로 이름났다.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자는 수백(壽伯)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남홍달(南弘達), 할아버지는 증사복시첨정(贈司僕寺僉正) 남유경(南有慶), 아버지는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된 남두명(南斗明)이다.
[생애]
무술을 좋아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학력]
1676년(숙종 2) 병진(丙辰)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경력]
급제 후 선전관을 거쳐 상원(祥原)·고부(古阜) 군수(郡守),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 황해병마우후(黃海兵馬虞候)를 지냈다. 이 후 이산(理山)·박천(博川) 군수를 지냈는데, 박천군수로 재임할 당시 선비들을 명륜당(明倫堂)에 모아 권학강론하여 향학발전에 공이 크므로 군민들이 흥학불망비(興學不忘碑)를 세워 칭송하였다. 성진첨사(城津僉使)와 안동영장(安東營將)을 거쳐 1727년 청주영장(淸州營將)이 되어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였다.
[활동사항]
1728년 3월 15일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난을 진압하던 중, 청주성이 함락되면서 절도사 이봉상(李鳳祥)[1676~1728]과 함께 붙잡혀 항복을 권유받았으나, “나는 삼조(三朝)를 섬긴 구장(舊將)으로 나이가 76이다. 죽을진대 역적 너희들에게 굴하겠느냐, 나의 머리를 벨지언정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하고 반도들에게 굴하지 않고 꾸짖다가 죽었다.
[저술]
『남충장공시고(南忠壯公詩稿)』(1749)가 있다.
[묘소]
무신란 당시 청주성 북문에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적이 북상한 후 7일 만에 아들 남덕기(南德基) 등이 시신을 음성으로 옮겨 모셨다. 1732년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 산 35-8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조정에서는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아들 남덕하(南德夏)를 등용하였고, 부인이 죽자 장례물품을 지급하여 치상하였다. 1728년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었고, 곧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되고, 이듬해에 숭선군(崇善君)에 추봉되었다.
청주 표충사(表忠祠)에 무신란 때 함께 순절한 이봉상, 홍림과 함께 제향되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청주를 지나며 남연년(南延年)을 추모한 「서원에서 슬픔에 잠겨 (悲西原)」이란 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