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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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大升 |
영어음역 | Gyeong Daeseu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이병희 |
[정의]
고려 전기의 장군.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경진(慶珍)의 아들이다. 경대승(慶大升)의 동생은 이소응의 사위이다.
[활동사항]
힘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일찍부터 큰 뜻을 품고 가사를 돌보지 않았다. 15세에 음보로 교위(校尉)가 되었으며 뒤에 장군에 이르렀다. 아버지 경진은 욕심이 많아 남의 토지를 빼앗아 재산을 많이 모았는데, 그가 죽자 경대승이 토지를 모두 선군(選軍)에 바치니 사람들이 그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1174년(명종 4) 왕이 행수(行首) 경대승, 지유(指諭) 우광윤(于光胤) 등에게 격구를 시키고 그들에게 비단을 차등있게 지급하였다. 1178년 충주인으로 개경에 적을 두고 살다가 청주로 퇴거한 사람과 토착 청주인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토착 청주인들이 퇴거한 이들을 거의 다 죽이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재경 청주인이 결사대원을 모집하여 청주에 보내 치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100여 명이 죽었다. 이때 경대승은 박순필(朴純弼)과 함께 청주의 사심관으로서 그 일을 해결하지 못했다 하여 파면되기도 하였다.
평소 무신란으로 정권을 장악한 정중부의 소행에 분개해 그를 제거하고자 기회를 노렸다. 정중부의 사위 송유인(宋有仁)이 문극겸(文克謙), 한문준(韓文俊) 등 충량한 선비를 내쫓았으며,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공주를 차지할 계책을 하여 명종(明宗)[1170~1197]이 걱정을 하였다.
1179년 장경회(藏經會)에서 허승(許升) 등과 함께 정균을 죽이고, 금군(禁軍)을 발동시켜 정중부, 송유인을 잡아 참하였다. 그 뒤 허승, 김광림 등이 공을 믿고 많은 폐단을 끼치자 이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정권을 잡자 종전의 최고 권력기구 기능을 하던 중방(重房)의 존재를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사병집단인 도방(都房)을 두어 신변보호를 꾀하였다. 관리의 등용에 문·무신을 고루 기용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 여러 무신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1181년 대정을 지낸 한신충(韓信忠), 채인정(蔡仁靖), 박돈순(朴敦純)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섬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는 유언비어라 할지라도 잡아가두고 국문하는 등 형벌이 무자비하였다.
1183년 홀연 꿈에 정중부가 칼을 들고 호통치며 달려드는 것을 본 뒤에 병을 얻어 30세로 병사하였는데, 장례 때에 슬퍼 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경대승의 도방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체포되어 먼 섬으로 귀양을 보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