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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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民族-精氣-獨立記念館-故障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정내수 |
[개설]
우리 민족은 1910년 8월 29일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로 식민 지배를 자행하였다. 이에 거족적인 저항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강점기 천안 지역에서는 다양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1919년 유관순 열사로 상징되는 아우내 장터의 만세 시위는 가장 대표적인 3·1 운동 사례이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끈 이동녕, 군자금 조달의 홍찬섭, 청산리 대첩의 이범석, 독립군 참모장 이장녕, 광복회의 지도자 유창순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지역이다. 그리고 현재 독립 기념관이 위치하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의 본산으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다.
[천안 지역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천안에서는 개항 이후부터 한일 강제 병탄에 이르는 시기에는 국권 회복을 위한 운동으로 의병 전쟁과 계몽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1910년 국권 피탈 이후는 조국 광복을 위한 민족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1919년의 3·1운동과 1920년대 국내외의 무장투쟁과 다양한 민족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 이후는 일본의 침략 전쟁에 반대하고 조국 광복과 자주적 근대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항일 독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 국권 회복 운동과 3·1 운동
국권 회복 운동은 의병 전쟁과 계몽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다른 지역의 경우 의병 전쟁이나 계몽 운동에 지역의 유림들이 적극 참여하였으나, 천안 출신으로 의병 전쟁이나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한 유림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일제의 무단 폭압 정치 하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이 대한 독립 의군부, 조선 국권 회복단, 대한 광복회 등의 비밀 결사에 의해 전개되었다.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로는 대한 광복회의 지도자 유창순 등이 활약하였다.
그리고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국내외 정세 변화를 계기로 민족 독립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3·1 운동으로 나타났다.
천안 지역 3·1 운동은 목천 보통학교 만세 운동[3월 14일], 입장 장터 만세 운동[3월 20일], 입장면 만세 운동[3월 28일],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4월 1일], 천안면 만세 운동[3월 29일], 풍세면 만세 운동[3월 30일], 성환면 만세 운동[3월 31일] 등의 사례가 확인된다. 특히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은 유관순 열사와 그 집안사람들이 참여한 대표적인 만세 운동이다.
3·1 운동의 만세 시위는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3개월간 50명 이상의 만세 시위 집회가 1, 542회, 총 참가 인원이 202만 3098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50명 이하 참가자 집회의 참가자 숫자, 농촌에서의 무수한 소규모 집회까지 포함하면 3·1 운동의 실제 참가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이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전 민족적 대규모 시위운동이었다.
2. 1920년대 이후의 운동
3·1 운동 후 일제는 한국 민족의 전 민족적 저항에 큰 타격을 받고 식민 정책은 변동을 보였다. 우선 ‘문화 정치’로의 전환을 표방하면서 회유와 가장된 유화 정책을 통하여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 전선을 분열시키며, 가혹한 식민지 통치를 은폐하려 하였다. 그리고 경찰관의 수를 대폭 증가시키고 독립 사상에 대한 사찰을 강화하였다. 또한 식량 수탈 등 사회·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다.
1920년대는 3·1 운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과 활동에 의해 국내 독립운동이 지도되었으며, 국내인들도 군자금을 모집하여 전달하였다. 그리고 만주의 독립군에게도 군자금을 지원하였고, 독립 전쟁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만주와 노령에서 한국 민족의 독립 의지와 독립 역량을 독립군의 무장 투쟁으로 한 차원 더 발전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하여, 독립군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대한 독립군, 북로 군정서, 조선 독립군 등 30여 단체에 달하였다.
이 시기에 천안 출신으로 큰 활약을 한 독립운동가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끈 이동녕, 군자금 조달의 명수 홍찬섭, 김좌진 장군을 도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독립군의 별 이범석, 독립군 참모장 이장녕 등이 있었다. 이 외에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이 있었다.
[독립 기념관의 건립]
이렇게 독립운동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천안에 독립 기념관을 건립한 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8·15 해방이 되고 바로 추진해서 독립 기념관을 설립했더라도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의 사적을 모두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 광복 후 40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 독립 기념관을 건립한 것은 때 늦은 아쉬움이 있었다.
1982년경 독립 기념관 건립 의지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국민들이 성금을 모으는 운동이 자연스럽게 전개되었다. 온 국민의 정성어린 성금은 600억 원에 이르는 거금으로 뭉쳐져 독립 기념관 후보지를 물색하게 되었다.
독립 기념관의 적지로 거론된 곳은 전국의 10여 곳이 넘었으며, 그 위치는 서울 근교로부터 대전 근교에 이르는 선에 분포되었다. 천안에서도 시·군민이 모두 애국 충절의 고장인 천안에 독립 기념관을 세워야 한다고 당국에 건의하였고, 독립 기념관 유치 운동이 전개되었다.
천안 인사들은 독립 기념관의 후보지로 첫째, 독립운동의 얼이 깃든 유서 깊은 고장, 둘째, 지리적으로 전국의 중심 위치, 셋째, 경관이 수려하고 자연과 조화가 이루어진 곳, 넷째, 교통 편리, 다섯째, 도시의 소음권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적지로 목천면 남화리를 후보지로 추천하였다.
목천 땅은 애국지사가 많이 배출된 곳이며, 아우내 장터의 3·1 만세 운동 소리가 메아리치고 있는 유서 깊은 지역이다. 그리고 전국의 중심 위치에 있고, 경부 고속 도로와 인접하고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며, 차령산맥의 수려한 경관이 배경인 곳이라서 적격지라고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당국에서는 이 의견을 정밀 조사를 거친 다음 목천면 남화리 396만 6942.15㎡[120만 평]의 대지에 독립 기념관이 자리하게 되었다. 1982년에 건립 운동이 추진되어 5년의 공기를 거쳐 1986년 8월 15일에 개관하였다.
독립 기념관 내에는 겨레의 탑, 겨레의 집, 겨레의 큰 마당, 전시관, 원형 극장, 순국선열의 애국시 및 어록비가 설치되어 있고,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가 설치되어 있다. 7개의 전시관은 겨레의 뿌리, 겨레의 시련, 나라 지키기, 겨레의 함성, 나라 되찾기, 나라 세우기, 함께하는 독립운동관으로 구분되어 관람자들이 흥미롭게 역사적인 내용을 접할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다.
독립 기념관 이외에도 천안 지역에는 독립운동가와 관련하여 유관순 열사 생가, 조병옥 박사 생가, 이동녕 선생 기념관 등이 개관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천안 지역의 독립 운동은 유교적 전통과 기독교에 영향을 받은 신사상이 기반되었다. 개항 이후 외세의 침탈에 대항하여 유교적 가치와 전통을 유지하고자 하는 유림들의 저항 의식이 나타났다. 그리고 일제 식민지 이후에도 유교적 전통과 관련이 있는 비밀 결사 운동이 펼쳐졌고,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독립운동인 3·1 운동에도 유교적 전통과 신사상의 영향을 받은 지역민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1920년대 이후 독립운동이 일반 대중이 중심이 되는 사회 운동으로 확대되는 가운데, 천안 지역의 독립운동은 전국적인 흐름에 동참하면서도 지역의 사회 문제를 민족 문제와 연관시키면서 민족 독립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 또한 수많은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국내외에서 끊임없는 민족 독립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아울러 독립운동의 얼이 살아 숨쉬는 지역에 독립 기념관을 건립하여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기리고 살아있는 역사를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는 천안은 독립운동의 본산으로서의 상징적인 의미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