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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품 한나절, 복숭아 한 아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A030102
지역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심곡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정지

“내가 좀 극성맞어서, 소사 복숭아 물건 떼러 구로동에서 80번 버스타고 다녔어요.”

“내 성격이 좀 극성맞어요. 하하.”

입심이 좋고 몸매가 호리호리한 백옥자 할머니(76세)는 젊었을 때부터 구로동에서 과일장사를 하시다가 부천에 터를 잡은 지 이십여 년이 되었다고 하신다. 비록 부천의 토박이는 아니지만 전국에서도 유명했던 소사 복숭아를 구매하기 위해 직접 발품을 파셨다고 한다.

“여기 깡시장이라구 야채시장이 있었는데 물건을 떼러 여기를 더러 왔거든요. 버스 회사는 기억 안 나는데, 80번 버스를 타고 왔어요. 나 여기 온 게로 신작로 도포 포장을 안했더라구요. 아침에 물건 떼러 구로동에서 여기 오면 그래도 버스는 많이 왔다갔다 했으니까 잘 이용했어요. 근데 버스가 짐 안 실어 줄라고. 그래 내가 기사 양반한테 사정사정 해 가지고. 그렇게 조금씩 실고 가곤 했죠.”(백옥자, 심곡본동 주민, 76세)

지난날 부천의 ‘복숭아’(일명 소사 복숭아)는 전국 각지에서 생산된 복숭아 중에서 으뜸으로 쳤다. 1930년대부터 이미 나주 배, 대구 사과와 함께 전국 3대 과일로 유명했고 그윽한 향과 시원한 맛은 안양의 포도, 수원의 딸기와 더불어 ‘경기 3미(味)’로 꼽히기도 했다. 1920년대 중반에는 부천의 전체 복숭아밭이 40만평을 웃돌 정도였다. 소사명산(素砂名産)이란 이름으로 해마다 1000톤 이상이 생산되어 서울 남대문과 동대문시장을 비롯해 인천, 평양, 신의주까지 팔려 나가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물건을 운송해 주는 화물차도 없던 시절에 여자 혼자서 과일 박스를 들고 다니는 일이 보통일은 아니었을 텐데 굳이 고생을 자처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백옥자 할머니는 당시는 많은 사람들이 서울과 김포를 오가면서 장사를 했었다고 덧붙이면서도 특히 소사 복숭아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 든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회상하였다.

“아침에 복숭아를 따서 여자들이 머리에 이고 가서 바로바로 팔고 하니 누가 안 좋아하겠어요. 야채시장업자들이 짚으로 짠 멍석에다가 복숭아를 놓고 기다리면 상인들이 와가지구 거래를 했어요. 그 당시 사람들은 복숭아는 백도라고 소사 복숭아를 제일로 쳤어요.”(백옥자 씨, 심곡본동 주민, 76세)

백옥자 할머니는 밤낮으로 부지런하게 장사를 하여 자녀들을 무사히 공부시키고 이십여 년 전 부천에 집을 얻어 정착하였다. 비록 반평생 구로동에서 장사를 하였지만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서울에 있는 집 한 칸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부천에서는 이 동네가 제일 쌌거든요. 옛날보다는 많이 발전이 됐지만서도. 부모들 모시려고 하는 자식들은 여기에서 많이 방을 얻어요. 원체 값이 싸니까. 약장수들이 그래, 전국에서 약을 못 팔아도 여기 와서 판답니다. 노인들이 하도 많아서 하하.”(백옥자 씨, 심곡본동 주민, 76세)

농담처럼 깊은구지 복숭아밭이 개간되면서 부자동네가 되었다고 소문이 났는데 집값이 싼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더니 할머니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때 복숭아밭 주인들은 다방에 앉아 가지고 거시기만 하구 일은 인부들 시켰대요. 그래서 일하는 인부들이 한 잎 벌면 땅 사고 복숭아 사고, 사고 그랬대요. 그래 나중에 땅 값이 오르니까는 팔고 나가고 팔고 나가고 그래가지고 되려 그 사람들이 돈을 벌고 나갔지. 여기 할머니들 중에 돈 많은 양반들은 그 때 돈 번 사람들이야.”

백옥자 할머니는 복숭아꽃이 만발한 깊은구지의 봄을 기억해냈다. 복숭아 과수를 애써 심었던 농부들과 복숭아를 하나 둘 모아 사두면서 잘 사는 꿈에 부풀었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대로 변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면 그저 바라만 봐도 평화롭고 배불러질 것 같은 풍경이다. 이제 몇 남지 않은 과수원만이 옛 정취를 흐드러지게 피우고 있다.

[정보제공]

  • •  백옥자(심곡본동 주민, 7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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