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7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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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彛天 |
영어음역 | Gang Icheon |
이칭/별칭 | 성륜(聖倫),중암(重菴) |
분야 | 종교/기독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근호 |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출신의 천주교인.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성륜(聖倫), 호는 중암(重庵). 할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회화로 유명한 강세황(姜世晃), 아버지는 우승지를 역임한 강흔(姜俒),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진사 정광서(鄭光瑞)의 딸, 처는 여산송씨(礪山宋氏)로 진사 송책(宋策)의 딸이다.
[활동사항]
강이천은 현재의 경기도 안산시에서 태어났다. 10세의 어린 나이로 남대문 밖에서 놀이를 보고 「남성관희자(南城觀戱子)」라는 시를 쓰기도 하였다. 1780년(정조 4)부터 국왕의 총애를 받아 궁궐을 드나들며 응제시(應製詩)[국왕의 명령에 응하여 지은 시]를 지어 올렸고, 정조로부터 참다운 학사가 될 것이라는 칭송의 말과 함께 문구류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1786년 진사가 되었고 1787년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간 시묘하였다.
1797년 돈녕부도정 김정국(金鼎國)이 천주교 신부 주문모(周文謨)와 접촉하며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요사스러운 말로 민심을 혼란시킨다고 보고한 것을 계기로 발생한 이른바 비어(飛語) 사건 관련자로 지목되어 제주로 유배되었다. 1801년(순조 1) 조정에서 천주교의 엄금을 지시하고 교도 색출을 시작하자 국내에 들어와 있던 주문모가 자수하고 이어 관련된 사람들을 실토하던 중 강이천도 연루되어 제주에서 한양으로 소환당하여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학문과 사상]
강이천은 당시 보편적인 학문 경향을 탈피하여 고증학적인 연구를 통하여 새로운 사실들을 규명하려 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이른바 ‘소품체(小品體)[비정치적이며 일상적이고 사적인 소재를 자유롭고 실험적으로 쓴 글]’를 바로 잡는다는 명분하에 이루어진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저술 및 작품]
시문집 『중암고(重庵稿)』4책이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3백여 편에 이르는 시와 「이화관총화(梨花館叢話)」와 같은 소품체 형식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시문집 이외에도 18세기 후반 서울의 상업 발전상과 이에 따른 한양의 소비나 유흥의 양상 등을 묘사한 시 「한경사(漢京詞)」가 전한다.
[상훈과 추모]
철종조에 와서 신원되었고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