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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토리의 소노마을은 동래정씨가, 율리마을은 광주안씨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다. 소노마을 지명은 작을 소(小)와 나라 노(魯), 즉 작은 노나라라는 지명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작은 나라라는 뜻에 맞게 동리를 중심으로 밖의 마을을 외리, 안 골짜기에 있는 내리, 마을 뒷산 이름을 ‘하늘 만딩’이라고 불러왔다. 소노마을은 동래정씨 문중을 중심으로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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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은 지역적으로 회야강 상류 유역의 풍부한 수원과 비옥한 땅이 넓게 형성되어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농경사회의 발달이 이루어지고 경작지의 확대로 가족단위 노동에서 마을단위 협업 노동력의 필요성에 의해 후대에 와서 ‘농청’이라고 하는 조직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장원놀이는 조선 후기 소농경영(小農經營)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마을단위로 두레형식으로 조직된 농민단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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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마을에서는 이 지역이 공장용지, 택지용지 조성으로 급속히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농경지가 사라지고, 공장들과 집들이 하나 둘씩 생겨났다. 농경지가 사라져 농사를 짓고 살아오던 어르신들이 일손을 놓게 되었다. 생활의 터전이 없어진 어르신들은 마을 경로당에 모여 농요도 부르고 옛 일을 회상하는 과정에서 우리도 한번 즐기며 후대에 남기고자 하는 뜻이 모아져 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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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마을 사람들은 다른 마을 사람들보다도 유독 친목이 뛰어나다. 또한 마을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다. 그들이 이렇게 될 수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들을 한 데 묶어주고 그들에게 자부심을 부여해 주는 것은 바로, 그들이 모두 주체가 되어 이끌어가는 ‘웅상농청장원놀이’가 있기 때문이다. 망시논매기라는 웅상의 전통 놀이를 명동마을에서 맡아하게 되면서 마을 사람들은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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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청장원놀이는 명동마을의 자랑이며, 자존심이다. 이러한 농청장원놀이가 유지되고 전수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부분이 많다. 그것은 바로 농청장원놀이만을 위한 일정한 공간이다. 놀이를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야 하며, 여러 소품들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농청장원놀이에 사용되는 소품으로는 입장식 소품, 보리타작과 관련된 소품, 모내기 소품, 농신제 소품,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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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제30회 경남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웅상농청장원놀이는 2002년 4월 4일 경상남도 문화재(무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언론과 대중매체는 많은 관심으로 이 놀이문화를 취재했다. 먼저 KBS의 현지(논) 녹화는 장원놀이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양산의 문화를 이해하는데도 힘이 되었다. 또한 SBS에서도 농경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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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대표적 독립운동가 윤현진(尹顯振)[1892~1921]은 부산을 빛낸 인물로 선정되어, 부산광역시에서 출판되는 각종 책에 소개되어 부산 출신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윤현진은 부산 출생이 아니라 1892년 양산군 상북면 소토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할아버지 윤홍석[1843~1902] 동래부사와 사천군수를 지냈고, 아버지 윤필은은 동래부사, 경상우도 관찰사, 동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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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을 하고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을 한다.’는 속담이 있다. 부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와 비례하여 걱정거리도 많아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돈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버렸다. 물질만능주의가 되어버렸다는 비판도 적지 않지만 돈이라는 것이 꼭 나쁘게 이용되는 것만은 아니다. 돈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돈, 그 이하의 가치도 혹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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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마을에는 마을이 이어온 역사만큼이나 그 지명에 관한 이야기도 많다. 그 중 소노마을과 소토리 지명에 대해서는 향토 사학자들마다 의견이 매우 다양하다. 마을 주민들 중에 지명에 대해 알고 계신 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우리가 볼 때에는 소노가 된 결정적인 원인을 소노서원에서 찾는다. 우리는 ‘공자님을 모시고 있는 작은 노나라’라고 해서 ‘적을 소’에 ‘노나라 노’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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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화창한 봄날 따스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7번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도로 저편 건너에서 풍악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풍악소리뿐만 아니라, 풍악이 끝나면 타령 소리도 간간히 들려 왔다. 정확히 무슨 소리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소리를 따라 조금씩 조금씩 따라가 보았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보이는 것은 넓은 들판과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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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당들은 이곳 마을 사람들의 삶의 기반이다. 1,322,320㎡에 달하는 넓은 용당들에는 여러 가지 농산물이 자라나고 있다. 보통 농산물이라고 하면 벼나 보리를 연상하지만 용당들에서는 그러한 것을 거의 볼 수 없다. 이곳이 여름이면 홍수로 많은 피해를 입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마을의 속담 가운데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시집가기 전까지 쌀 서 말을 먹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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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마을을 따라 신령스런 독수리의 산이라고 하는 영축산을 오르는 길에는, 지금은 애잔한 흔적만 남아 있는 단조성이 있다. 그 흔적을 찾아 단조성으로 가는 길은 먼저 통도사 입구에서 지산리(서리·평산·지산)의 지산마을회관 앞 운동장 쪽으로 등산로를 따라 가야 한다. 그 길을 따라 마을을 지나 300여m 정도 가면 조선 숙종 37년에 동우대사가 건립한 축서암이 나온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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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앞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이곳은 물길의 흐름에 따라 쌓인 흙이 들을 만들어 마을 주민들의 삶과 함께 숨 쉬고 있다. 용당들 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김해와 마주하고 있으며, 낙동강 강가로 가면 두 곳을 잇는 나루터가 보이는데, 이를 가야진이라 한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나루터에는 여러 가지 물자와 사람들로 넘쳤던 옛 활기는 찾아 볼 수 없지만,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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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할머니와 대화를 하다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신다. 이름처럼 백수까지는 끄떡없으실 것 같은 너무나 정정하신 80대의 김백수 할머니는 마을에 대해 공부하러 왔다는 말에 할머니가 알고 계신 마을에 대한 비밀이야기를 해주시려는 듯 소곤소곤 마을에 대한 말씀을 꺼내신다. “여기 마을사람들은 살다가 부자가 되믄 마을 밖으로 나가야 된다고 칸다.” 할머니께서 던지신 말씀에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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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리는 통도사와 함께 영축산 산자락을 끼고 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의 공출(똑같이 나누어서 내는 것)을 위한 송진 채취와 6·25 전쟁의 기억들이 주민들에게 저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영축산 가는 길에는 백년은 훨씬 넘었음직한 오래된 소나무들이 껍질이 까진 채 속살이 칼 같은 날카로운 것으로 무수히 긁혀있는 자국이 눈에 띈다. 우리의 뼈아픈 역사를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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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주민들이 용신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데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1년 동안 가야진 용신제전수관에 고이 보관되어 있던 것들을 펼쳐 놓는데, 바로 제기와 깃대, 주민들의 흥을 돋우기 위한 사물, 그리고 역할극을 위한 소품들이다. 본래 가야진 용신제에 쓰인 제기는 신라시대 유물로 그 모양이 배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 이곳이 나루터이고 용신을 모시는 곳이므로 제기도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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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청장원놀이는 처음부터 명동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농경사회이므로 어느 마을에도 이와 비슷한 놀이는 있게 마련이다. 다만 그 놀이문화의 계승의식 여부에 따라 현재의 농청장원놀이가 재현되는 것이다. 양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양산의 여러 마을에서 농청장원놀이의 재현을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현실적으로 사람동원이나 재정 등의 이유로 계승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동안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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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당리 마을사람들은 마을의 전통으로 용신제를 지켜왔다. 용신제는 비를 부를 뿐만 아니라 마을사람들의 마음도 한데 모은다. 예전에는 당곡마을 주민을 중심으로 사당을 관리하다가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용신제보존회에서 주관하여 양산의 전통문화로서의 위상을 이루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용신 앞에서 1,500여 년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모두가 주인공이 된다. 매년 2월 그믐날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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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지산리 평산마을은 과거에는 부디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 평산마을이라는 이름은 행정구역을 다시 편성하면서 바뀌었다. 평산마을 근처의 땅은 대부분 통도사 소유의 땅이었다고 한다. 부디골이라는 이름은 평산마을 가까이에 있는 통도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과거 이 마을은 옛날 스님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고, 부디(부도)가 많다고 해서 마을을 부디골이라고 했다고 한다.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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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리는 영축산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 작은 개울물들만이 마을 가운데를 지나고 있 때문에 홍수 때 물에 잠기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2002년 강력한 태풍 루사가 왔을 때에 물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다음은 당시 홍수 루사에 대한 주민의 기억이다. “여는 냇가가 없기 때문에 비가 올 때 물에 잠기는 일은 거의 없다. 여기가 산 바로 뒤라서 홍수가 든 적은 거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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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향교는 1396년(태조 6)에는 양산초등학교 주위에 있었으며 『조선환여승람』 원사편에 보면 성안의 현 양산문화원 뒤편 느티나무 동쪽에 충렬사가 있었다고 되어있다. 이곳에 충신, 공신의 신주를 이만도 군수가 모셔왔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충렬사 주위에 60여개의 비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19년에 발생한 양산 독립만세운동 때문에 일본 헌병이 충렬사를 파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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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경부고속도로 부산~언양간 노선이 확장되면서 양산 IC 설치 지역인 소토리 부근에서 선사시대 유적지가 발견됐다. 이렇게 발견된 소노지석묘는 탁자 모양의 북방식 지석묘로서 돌칼, 돌화살촉 등의 선사시대 생활도구들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 지역에 북방식 지석묘가 발견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지석묘의 크기가 매우 크고 유물이 많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고대사회에 이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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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마을 사람들은 마을에 대한 애착이 굉장히 강한 것 같다. 단조성에 대한 전설만 해도 옛날이야기 책 한 권은 읽은 것만 같은데 마을에는 그 외에도 마을에 대한 전설이 더 많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 마을을 신성한 마음으로 보존하고 이어가려는 사랑의 표현이 아닌가 한다. 많고 많은 전설 중 하나가 바위들에 얽힌 전설이다. 지산마을 양장웅 이장은 어린 시절부터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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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부터 불어나기 시작한 낙동강이 합천 황강 쪽에서 흘러오는 또 다른 줄기와 어우러진 삼량진부터 그 위용을 갖추니 여기서부터 물금까지 도도히 흘러내리는 모습은 차라리 장중한 교향악 같다고나 할까. 특히 낙동강 하구는 폭이 좁게 마감되어 그 흐름이 더욱 유장해 보이는데 어떤 풍수가는 그로 인해 영남에 인물이 많고 부자가 많이 난다고 한다. 강이 좁기 때문에 넘쳐흐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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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깊은 전통제례의식으로 조선시대 사독 중에 국내에서 유일하게 현재까지 맥을 잇고 있는 가야진 용신제를 보존하기 위하여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지역주민들은 그동안 각별한 애착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구한말까지 면면히 이어오던 가야진 용신제가 일제의 억압으로 가야진사가 헐리고 용신제가 금지되었을 때 고 이장백(1914~1998)옹과 용당리 당곡마을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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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청장원놀이는 1999년 남해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제30회 경남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81명이 출연하여 양산 망시논매기 장원놀이라는 이름으로 최우수상을 차지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것은 양산 웅상읍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대동놀이로 농청이란 농사 두레를 통해 보리타작과 논매기를 끝낸 후 농사를 잘 지은 집을 장원으로 선정하면 장원으로 선정된 집에서 낸 술과 음식인 ‘장원 턱’을 나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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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제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어 위령제 또는 기우제 형식으로 이어져왔다. 지금 현재 용당에서 이루어지는 용신제는 마을사람들의 단결을 도모하는 놀이문화로 승화·발전되었다. 즉 지금의 용신제는 제의의 형식을 극복하면서 민속놀이로 전환된 형태로서 더 큰 의미가 있다. 용당리 마을에서 만난 용신제 상쇠를 맡고 있는 박홍기(44세)의 설명에 놀이로서의 용신제가 잘 담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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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제는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용신제를 보기 위해 삼삼오오 손을 잡고 용당들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은 들에 펼쳐진 광경에 넋을 잃는다. 용신을 보기 위하여 들어가는 입구에는 수많은 등불의 향연이 펼쳐지고, 그 안으로 사람들은 용신의 부름을 받은 듯이 또 멀리서 들려오는 농악소리에 맞추어 춤을 덩실덩실 추는 양으로 신명나게 들어간다. 가야진사가 가까워질수록 용신의 기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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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마을의 광장 입구에 취서사(鷲棲祠)가 있다. 가락국의 왕자 신라 각간 김무력(金武力)과 신라 삽량주 도독 김서현(金舒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사당이다. 이 두 분은 그 유명한 김유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이다. 취서사는 김해김씨 종친회에서 재실건립을 결의한 후에 1986년 10월 12일 착공하여 그해 12월 20일에 재실(취산재)만 완공하여 준공하였다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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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마을 뒷산 정상에 국사당(局司堂)이 있다. 주소는 지산리 134-1이다. 본래 국사당의 자리는 통도사 사문암 쪽에 평평한 절터가 남아 있는 곳에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현재의 위치는 마을의 뒷산 정상에 있다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으며 불교와는 관련이 없는 토속 신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향토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사당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콘크리트와 목조가 결합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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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제에 대해서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면 이야기가 막힘없이 흘러나온다. 그것은 용신제를 아끼는 마을사람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용신제는 조선시대 사독의 하나로 지금까지 계승되는 것은 가야진 용신제뿐이다. 이 때문에 1997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으며 제사의 형태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용신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마을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