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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충비(忠婢). 개덕은 문백면 파재에 살던 유의직 집안의 종이었다. 유의직이 태어나기 5개월 전에 유의직의 아버지가 죽고, 또한 유의직이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어머니 최씨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개덕은 젖먹이 자식에게는 미음을 먹이고 유의직에게는 자신의 젖을 먹여 키웠다. 그 후 개덕은 유의직이 성장하자 채지홍(蔡之洪)에게 학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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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열녀. 본관은 순흥(順興). 남편은 김녕김씨(金寧金氏) 김경세(金景世)[?~1636]로 인조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주박(主薄)의 무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남한산성 방어군에 참여하였다가 전사하였다. 김경세 처 순흥안씨는 병자호란으로 남편이 전장에 나가게 되자 당나라에서 나는 삼중으로 된 붉은 실로 남편의 옷섶을 꿰매어 표시를 하였다. 남편이 전쟁에서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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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만노군(萬弩郡) 태수를 역임한 신라의 귀족. 본관은 김해(金海). 일명 김소연(金消衍).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12세손이다. 아버지는 신주군주(新州軍主)를 역임했던 김무력(金武力)이며, 아내는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아들은 삼국 통일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 김유신(金庾信)이고, 딸 문희(文姬)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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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출신의 국가유공자. 본관은 안동(安東),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에서 김규원(金圭源)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1951년에 사망하였다. 김영국은 어릴 때부터 문리에 통하였고 특히 전쟁놀이를 좋아했다. 지금의 삼수초등학교 전신인 신명학원에 다녔다. 가정이 극히 빈곤하여 짚신이 아까워 맨발로 뛰어서 학교를 다니는 근면하고 착실한 학생이었다.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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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열녀. 본관은 알 수 없으며, 남편은 김태원(金泰元)이다. 김태원 처 이씨는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에 피를 내어 약에 타서 먹이었고, 북두칠성에 지성을 다하여 기도를 올렸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자신의 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에 군(郡)에서 포상하고, 군의 유림들이 감사에게 진정서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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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부. 본관은 전의(全義). 남편은 경주김씨(慶州金氏) 김태정(金台鼎)이다. 시아버지가 선천적으로 병이 있었는데 매우 심하여 백약이 무효하자, 허벅지 살을 도려내어 달여 먹여 소생케 하였다. 여러 차례 지방 장관에게 추천되었으며, 암행어사로부터 상(賞)으로 비단옷을 받았다. 유림들이 글을 내어 감사(監司)의 포제(襃題)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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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열녀. 본관은 달성(達成). 남편은 의령남씨(宜寧南氏) 남병덕(南秉德)이다. 남병덕 처 달성서씨는 남편이 직업 때문에 수백 리 밖에 나가 있음에도 시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하루는 서씨가 일찍 일어나서 시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어젯밤 꿈에 군자(君子)가 새 옷을 입고 문을 나서면서 나를 보고 말하기를 ‘내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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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파정(息波亭)은 1616년(광해군 8) 이득곤(李得坤)이 두건리 앞 냇가에 세운 정자로 앞면 2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 기와집이다. 1983년 백곡저수지를 확장하면서 두건리가 수몰되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처음 정자를 세울 당시의 두건동은 시인 묵객들에게 무릉도원의 절경을 연상하게 하는 독서지소(讀書之所)로 이름이 높았다. 빼어났던 경치는 식파정 팔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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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열녀이자 효부. 본관은 알 수 없으며, 남편은 정효창(鄭孝昌)이다. 말즐비(末즐非)[끝비]는 남편 정효창이 수군으로 있다가 사망하자 6년 동안 한결같이 상복을 입고 슬퍼하면서, 음식을 갖추어 시어머니에게 올린 뒤 남편 제사를 지냈다. 1527년(중종 22)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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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부. 본관은 알 수 없으며, 남편은 평양조씨(平壤趙氏)로 충청병사(忠淸兵使)를 지낸 조맹손(趙孟孫)의 후손 조한승(趙漢昇)이다. 박금년(朴今年)은 시어머니의 병이 위중하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였고,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홀로 남은 시아버지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시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극진하게 3년 상을 치렀다. 박금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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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열녀. 본관은 알 수 없으며, 남편은 손세업(孫世業)이다. 이씨는 남편 손세업이 죽자 슬프게 곡을 하다가 상여를 보낸 지 3일째 되는 날 밤에 자결하였다.충청도와 진천군에서 포상을 하고, 왕에게 추천을 하여 1883년(고종 20) 정려가 내려져 정문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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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열녀. 본관은 청주(淸州). 아버지는 몽계(夢溪) 한희적(韓希迪)의 후손인 한정준(韓廷儁)이다. 남편은 신의양(申義養)으로 1795년(정조 19)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선전관에 올랐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독송재(獨松齋) 신잡(申磼)의 9세손이다. 신의양 처 청주한씨[1778~1804]는 남편이 죽자 장례를 마친 뒤 남편의 허리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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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부이자 현모. 민씨의 본관은 여흥(驪興)으로, 아버지는 진사를 지낸 민경상(閔景祥)이다. 남편은 본관이 순흥(順興)인 안기중(安驥中)[1865~1892]으로, 안형(安逈)의 8세손이다. 아들은 안상욱(安商郁)으로 도회의원과 소수서원장·운곡서원장·묵정서원장·백진서원장과 군유도회장을 역임하였다. 민씨는 남편 안기중이 27세에 별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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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부. 유계열(柳癸烈)은 남편 이규창(李奎昌)이 전사하자 시부모를 위안하고 효성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시어머니가 괴질에 걸리자 매일 정화수를 떠 놓고 하늘에 기도하여 3개월이 지나자 차도를 보았다고 『진천군지』와 『진천향토지』 등에 기록이 전하고 있다. 1902년 군수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1903년 2월 전국선행자표창위원회의 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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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열녀. 이씨의 남편은 본관이 문화(文化)이며, 이름은 유만엽(柳萬葉)이다. 문화유씨의 시조인 유경(柳璥)은 고려 고종 때 최의(崔誼)의 무신 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왕정을 회복하게 한 공으로 위사일등공신(衛社一等功臣)에 봉해졌다. 이 공로로 고향인 유주(儒州)를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으면서 유주, 즉 지금의 황해도 신천군 지역인 문화를 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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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에서 활동한 열녀. 본관은 해주(海州). 아버지는 최준(崔濬)이고, 오빠는 최유연(崔有淵)이며, 남편은 유형국(柳亨國)이다. 유형국 처 해주최씨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 살면서 1636년(인조 14) 한양에 있는 친정으로 근친을 갔다가 병자호란을 만나자, 승지를 지내던 오빠 최유연이 왕자와 비빈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 갈 때 함께 행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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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열녀이자 효부. 이씨의 나이 20세 때 남편 이근석(李根錫)이 죽었다. 그 후 이씨는 머리도 덥수룩하게 하고 옷도 좋은 옷은 입지 않는 등 몸단장에 신경 쓰지 않고 시부모만을 기쁘게 해드리며 극진히 효도하였다. 5~6년이 지나서 시아버지가 병으로 죽고, 불과 3개월 만에 시어머니마저 죽었다. 이에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나서 시동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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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열녀. 이민회(李敏會) 처 최씨(崔氏)는 23세에 남편을 잃었는데, 바로 남편을 따라가려 하였으나 늙은 시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있어서 목숨을 버리지 못하였다. 시아버지가 병으로 누워 있는 4년동안 지성을 다하여 약을 달여 드렸으며 산나물을 먹고 싶다 하자 눈 쌓인 산에 들어가 나무의 눈을 얻어 국을 끓여드리고, 또 물고기가 생각난다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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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열녀. 본관은 경주(慶州). 남편은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킨 이성문(李成文)이다. 이성문의 처 경주정씨[1707~1731]는 어릴 때부터 천자(天姿)가 정숙하였고 혼인해서는 시어머니께 효를 다하여 봉양하고 남편을 예로서 섬기었다. 남편이 난을 막으러 나갈 때는 힘을 다하여 충성하라고 하였다. 남편이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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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이자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뇌연(雷淵), 자는 문계(文階)·태초(太初), 호는 연재(衍齋). 세종의 별자(別子)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군위현감 이의화(李義和)이며, 어머니는 통덕랑 유언(兪彦)의 손녀이다. 이승연(李升淵)[1767~1829]은 유서 깊은 가정에서 시(詩)와 예(禮)의 교육을 받아 선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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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군 출신의 학자이자 효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효백(孝伯), 호는 서암처사(西巖處士). 청허당(淸虛當) 이거이(李居易)의 8세손이다. 『청주이씨족보(淸州李氏族譜)』에 따르면 태사공 이능희(李能希) 이후에 본관을 청주로 정하였다고 한다. 이승종(李承宗)[1574~?]은 지금의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행과 문장이 탁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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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자장(子張). 행원(杏園) 이부(李阜)의 고손이다. 이인(李仁)은 지금의 진천군 이월면 송두리에서 태어났다. 『진천향토지』, 『진천군지』 등에 학문이 높고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향천(鄕薦)을 받아 참봉(參奉)과 주부(主溥)의 벼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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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광주(光州). 대사성 이중호(李仲虎)의 7세손이자, 이조참판 이발(李潑)의 6세손이다. 이정휘(李廷徽)는 어머니가 종기가 심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5~6개월 동안 종기를 입으로 빨아서 고름을 뽑았으나 병세에 차도가 없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서 낸 피를 먹여 완쾌하게 하였다. 그 후 모친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지극정성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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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부이자 열녀. 이종연(李鍾淵)의 처 박씨는 시아버지가 종기로 자리에 눕자 입으로 종기를 빨아서 낫게 하였으며, 담종이 생겨서 3개월 동안 거동을 못하자 곁을 떠나지 않고 간병을 하였다. 이후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상장제용(喪葬祭用)을 마련하여 무사히 장례를 치렀다. 얼마 후 남편이 죽자 따라 죽으려고 물 한 모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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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치영(稚英). 진사(進士) 이몽길(李夢吉)의 후손이다. 양성이씨(陽城李氏)의 시조 이수광(李秀匡)은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와서 문종 대에 벼슬길에 올라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에 이르렀고, 양성군(陽城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갑자보(甲子譜)』 세록(世錄) 편에 의하면 능란한 외교술로 거란[契丹]과 외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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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고성(固城). 증조할아버지는 행원(杏園) 이부(李阜)이다. 이집(李楫)은 어려서부터 부모가 병으로 누워 있으면 옷을 벗지 않고 근심스러운 얼굴로 나날을 보내어 효자로 소문이 났다. 커서는 부모의 대변 맛을 보아 병을 짐작하고, 밤에는 밖에 나가 하늘에 기도하였다.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죽만 먹고 날마다 묘소에서 슬프게 곡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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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다. 이필용(李必容)이 어렸을 때 할아버지의 상을 당했는데, 갑자기 집 안에서 불이 나서 사당(祠堂)까지 불이 번지고 말았다. 이에 이필용이 큰소리로 천신(天神)을 부르자, 세찬 바람이 그치고 불꽃이 잦아들어 비록 사당은 불탔으나 신주(神主)는 온전하였다. 어느 날, 이필용이 볼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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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육영독지가.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찬서(纘書). 『청주이씨족보(淸州李氏族譜)』에 청주이씨는 태사공 이능희(李能希) 이후 본관을 청주로 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호신(李鎬臣)[1868~1943]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서 자수성가하였으며, 많은 사회사업을 하였다. 특히 교육 부문에 힘썼는데, 처음 상산초등학교가 지금의 삼수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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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열녀이자 효부. 양씨는 16세에 이호주(李鎬周)에게 시집을 갔다. 가난한 집안이었으나 양씨는 지극정성으로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에게 순종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시부모와 남편이 연이어 세상을 뜨면서 20세 때 청상과부가 되었다. 양씨가 절개를 지키며 아들 하나를 데리고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데, 이웃 마을의 장씨(張氏)가 양씨가 과부로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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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졸재(拙齋).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13세손이다. 만오(晩悟) 이후연(李厚淵)이 중손(中孫)이다. 이호중(李昊中)이 공주 외가에 있을 때 어머니가 중병에 걸렸는데, 그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너의 모친 병이 위독하니 빨리 집으로 가서 잉어를 구해 드려라”고 말하였다. 그 길로 집으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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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학자이자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만오(晩悟).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후손으로, 졸옹(拙翁) 이호중(李昊中)의 중손(中孫)이다. 이후연(李厚淵)은 신와 정재경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학문의 중심점을 캐어서 연구하였고 지식과 견문이 넓었다. 보고 들은 것이 많고 깨달은 바도 투철하여 정재경이 큰일을 맡을 만한 인물[大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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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고성(固城). 행원(杏園) 이부(李阜)의 6세손이다.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던 이희(李熺)는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근동에서 효자라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가난한 생활을 하였어도 부모가 좋아하는 음식을 떨어지지 않게 하였으며, 항상 부모의 모든 것을 친히 보살폈다. 부모의 상을 당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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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천(鎭川)[또는 상산(常山)]이다. 임경석(林慶錫)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빠뜨린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죽만 먹으면서 3년 상을 치렀으나, 슬픔이 지나쳐 몸을 상하게 되어 마침내 세상을 떠나니 군(郡)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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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천(鎭川)[또는 상산(常山)]. 상산백 임희(林曦)의 후손이다. 임희는 상산임씨(常山林氏)[진천임씨(鎭川林氏)]의 시조로 지금도 후손들이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를 중심으로 많이 살고 있다. 임경언(林慶彦)[1761~?]은 아버지가 종기를 앓고 있을 때 침과 뜸이 효험이 없자 독혈을 빨아내고 밤에는 소금물로 씻기를 한 달여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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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열녀. 남편은 평택(平澤)이 본관인 임경운(林景雲)이다.임경운(林景雲) 처 이씨(李氏)는 20세에 남편이 사망하자 여러 날 음식을 먹지 않아서 사경을 헤매다가 시부모를 생각하여 눈물을 거두고 시부모를 위로하며 정성을 다하였다. 시부모께 음식을 드리고 조금도 슬픈 얼굴을 하지 않고 남편 장일에는 제사에 쓸 물건과 모든 예절을 스스로 돌보고 정성을 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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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천(鎭川)[또는 상산(常山)]. 슬하에 가문의 쌍효(雙孝)라 불리는 임호철(林昊喆)과 임우철(林禹喆) 형제를 두었다. 임광언(林光彦)[1794~?]은 어렸을 때부터 단정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침착하고 무게가 있었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등 남다른 점이 있었다. 9세 때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자 발을 구르며 통곡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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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천(鎭川)[또는 상산(常山)]. 상산임씨(常山林氏)의 시조인 임희(林曦)의 후손이다. 임광윤(林光潤)[1734~?]은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이 같은 효행이 알려져 고을에서 천거를 받았지만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 군(郡)의 유림들이 모두 안타까워하였다. 족보에 임광윤의 효행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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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열녀. 본관은 은진(恩津). 조선 후기 호조참판을 지낸 남편 임대철은 본관이 상산(常山)이며, 1845년(헌종 11)에 별세하였다. 임대철(林大喆) 처 은진송씨(恩津宋氏)[?~1845]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치르기 전날 밤에 베 끈으로 목을 매어 향년 30세의 나이로 남편을 따라갔다. 감사 이승수가 은진송씨의 절개에 대한 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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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이자 학자. 본관은 진천(鎭川)[또는 상산(常山)]. 증조할아버지는 충신 임현(林賢)이다. 임봉거(林鳳擧)는 평사(平沙) 민태중(閔泰重)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박학하고 학문을 즐기었으며 효행이 지극하였다. 나라에서 벼슬을 주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도덕을 실천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모든 행동이 민첩하고 독실하였으며, 듣고 보는 것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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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천(鎭川)[또는 상산(常山)]. 할아버지는 임유원(林有元)이고, 아버지는 임재(林榟)이다. 임봉래(林鳳來)는 어머니가 병이 들자 변을 맛보아 병세를 짐작하였고, 상을 당하여서는 극진한 예를 다하였다. 할아버지, 아버지와 더불어 삼세효자(三世孝子)로 불렸다. 고을 사람들이 여러 번 관에 천거하였으나 정려는 내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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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천(鎭川)[또는 상산(常山)]. 아들은 임재(林榟)이고, 손자는 임봉래(林鳳來)이다. 임유원(林有元)은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병이 나자 변을 맛보며 간병하였고, 상을 당해서는 예를 다하였다. 아들 임재와 손자 임봉래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삼대(三代)가 모두 효성스럽다고 불렸다. 고을 사람들이 효성에 감복하여 여러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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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천(鎭川)[또는 상산(常山)]. 진천임씨(鎭川林氏)[상산임씨(常山林氏)]의 시조인 임희(林曦)의 후손이다. 임을엽(林乙葉)은 아버지가 병이 들었을 때 꿈속에서 천신(天神)이 얼음에 채운 물고기를 알려 주어 아버지를 봉양하였고, 어머니가 병이 났을 때도 숲 속에서 산신령을 만나 산돼지를 얻어 끓여 드렸다. 사람들은 지극한 효성이 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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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상산(常山). 중시조 임연(林衍)의 16세손으로 아버지는 임유원(林有元)이고, 아들은 임봉래(任鳳來)이다. 임제(林梯)는 지금의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에서 태어났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하늘이 낸 효자라고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어머니가 병이 나자 변을 맛보며 간병했고, 상을 당해서는 예를 다했다. 아버지 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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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상산(常山). 상산백(常山伯) 임희(林曦)의 후손이다. 임희는 상산임씨의 시조로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구산동]를 중심으로 많이 살고 있다. 임정석(林鼎錫)[1798~?]은 지금의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병환이 갑자기 위독해져서 약을 쓸 수 없게 되어 목숨이 위태로웠다. 이에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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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천(鎭川)[또는 상산(常山)]. 증조할아버지는 임광언(林光彦)이고, 할아버지는 효자로 이름 난 임우철(林禹喆)이다. 임정수(林正洙)는 일찍이 어버이를 섬기는 법도를 알아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법도에 맞게 행동했다. 어릴 때 도적이 집에 들어와 어버이를 위협하니 내실에서 그 소식을 듣고 나와, 칼날을 무릅쓰면서 어버이를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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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천(鎭川)[또는 상산(常山)]. 상산백(常山伯) 임희(林曦)의 후손이다. 임채근(林彩根)은 아버지가 중병이 들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내어 마시게 하였고,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는 변을 맛보아 병세를 짐작하고 손가락의 피를 내어 마시게 하였다. 결국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시묘를 하면서 상례에 어긋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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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천(鎭川)[또는 상산(常山)]. 상산백(常山伯) 임희(林曦)의 후손이다. 임호근(林浩根)은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병이 들자 손가락의 피를 내어 마시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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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연일(延日). 호는 시습재(時習齋).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6세손으로, 아들 정창환(鄭昌煥) 역시 효자이다. 정도(鄭棹)는 화재가 나서 불이 사당에까지 번지자 천신에게 기도를 올려 불이 꺼지게 하였고, 선대를 모시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부모가 병이 나서 꿩고기가 생각난다고 하여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홀연히 꿩이 떨어지는 등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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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이자 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고산(孤山). 조선의 개국공신 양경공(良景公) 정희계(鄭熙啓)의 7세손이며, 남대(南臺) 집의(執義) 정흠(鄭欽)의 현손이다. 정방광(鄭邦絖)[1471~1513]은 경기도 안성에서 진천군 덕산면 산수리 방동으로 이전한 입향조(入鄕祖)인데, 정봉남과 정황남이 그의 증손이다. 정봉남(鄭鳳男)[1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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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와 현대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부. 안동김씨는 17세에 문성공(文成公) 정인지(鄭麟趾)의 16세손인 정순형(鄭淳亨)과 결혼하였다. 그 후 안동김씨는 효성으로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순종으로 받들었는데, 1년도 못 되어 시아버지가 죽고, 다시 2년 뒤에는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안동김씨는 즉시 남편을 따르려 했으나 시조부모와 시어머니가 손을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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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학자. 본관은 연일(延日).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효자이자 유학자인 신와(愼窩) 정재경(鄭在褧)이다. 정우섭(鄭友燮)은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풍부한 학자로서 1932년 『상산지(常山誌)』를 저술하였다. 상산(常山)은 진천의 다른 이름이니, 『상산지』는 곧 진천의 읍지(邑誌)이다. 현재 『상산지』는 1825년(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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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이자 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할아버지는 찰방을 지낸 효자 정봉남(鄭鳳男)이고, 아버지는 정훈이다. 동생은 정익경(鄭益慶)이다. 정이경(鄭履慶)은 학문이 높고 문장이 뛰어나 세상에 알려졌고, 효행 또한 지극하였다. 부모가 병이 나자 밤에 천신(天神)에게 정성껏 기도를 올린 뒤 손가락의 피를 내어 병을 낫게 하였다. 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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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이자 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지촌(芝村) 정흠(鄭欽)의 후손이다. 정익성(鄭益誠)은 경학을 깊이 연구하고,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워 여러 번 고을에서 천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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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이자 학자.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공실(公實), 호는 신와(愼窩).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8세손으로 아버지는 누항(陋巷) 정용환(鄭龍煥)이며, 조암(照庵) 정해필(鄭海弼)과 『상산지(常山誌)』를 쓴 정우섭(鄭友燮)이 그의 손자이다. 정재경(鄭在褧)[1780~?]의 아버지가 그림 속 용이 꿈틀거리며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꾸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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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이자 학자. 본관은 연일(延日). 호는 소은(素隱).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8세손이다. 정재형(鄭在衡)은 오로지 경학(經學)을 숭상하였으며, 천성적으로 타고난 성품이 침착하고 효행이 지극하였다는 기록이 『진천향토지』, 『진천군지』 등에 전해지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학문에 더욱 힘써 여러 번 향공(鄕貢)에 천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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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경주정씨(慶州鄭氏)의 시조인 지백호(智伯虎)의 후손으로, 고조할아버지는 정봉남(鄭鳳男)이고, 할아버지는 정이경(鄭履慶)이다. 시조 지백호는 삼한시대 진한(辰韓) 사로(斯盧) 6촌장의 하나인 진지부(珍支部) 촌장으로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개국좌명공신이 되었고, 32년(유리왕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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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연일(延日).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7세손으로 아버지는 효자 정도(鄭棹)이다. 정창환(鄭昌煥)이 소년 시절 어느 날 마루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데 호랑이가 마당으로 들어오자 이불로 어머니를 가리면서, “우리 어머니를 해치면 안 된다.”고 큰소리로 꾸짖으니 호랑이도 머리를 끄덕이고 물러갔다고 한다. 어머니가 병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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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이자 학자. 본관은 연일(延日). 호는 조암(照庵). 할아버지는 효자이자 유학자인 신와(愼窩) 정재경(鄭在褧)이고, 아버지는 정선(鄭鍌)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 홍대욱(洪大勖)의 딸이다. 정해필(鄭海弼)[1831~1887]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에서 양육되었다. 효행이 지극하여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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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할아버지는 찰방을 지낸 효자 정봉남(鄭鳳男)이다. 정혁경(鄭爀慶)은 10세 때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을 만나자 급히 어머니를 업어 보호하고 대신 자신이 죽기를 청하며 다투니, 왜군이 경외하여 차마 해치지 못하였다. 모친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시묘를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정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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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회촌(晦村). 조선의 개국공신 양경공(良景公) 정희계(鄭熙啓)의 7세손이며, 남대(南臺) 집의(執義) 정흠(鄭欽)의 현손이며, 입향조인 정방광(鄭邦絖)의 증손이다. 형은 정봉남(鄭鳳男)이다. 정황남(鄭凰男)은 백원서원(百源書院)에서 수학하였으며, 학문이 뛰어났다. 임진왜란 때 형 정봉남과 함께 어머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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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이자 학자. 본관은 연일(延日). 호는 산행와(山行窩).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후손이다. 정회(鄭淮)[1805~?]는 일찍이 부친상을 당하고 어머니를 섬기기에 효성을 다하였다.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고 방안을 따뜻하게 하거나 서늘하게 하는 일까지 친히 보살폈다. 어머니의 비위에 맞는 음식을 장만하려고 애를 썼고, 아침저녁으로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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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평양(平壤). 평양조씨 시조 조춘(趙椿)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에 의하면 고려 때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남송(南宋)에 가서 금(金)나라를 정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송나라 상장군(上將軍)이 된 인물이다. 조춘은 상원(祥原)에 정착하여 4세손까지 내려오다가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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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평강(平康). 순당(蓴塘) 채진형(蔡震亨)[1579~1659]의 후손이다. 채진형은 본래 서울에 살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꿈속에서 피난가라는 계시를 받고 피신하여 진천 땅 어느 곳에 정착하고, 꿈속에서 계시를 받아 찾은 마을이므로 마을 이름을 몽촌(夢村)이라 했다고 한다. 현재 마을을 이룰 당시 심었던 은행나무는 수령 3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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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학자.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군범(君範), 호는 봉암(鳳巖). 할아버지는 삼환재(三患齋) 채지홍(蔡之洪)[1683~1741]으로,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봉암마을에서 태어났다. 인천채씨(仁川蔡氏) 시조 채선무(蔡先茂)는 고려 중엽 벼슬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에 이르렀는데 인천에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인천을 관향으로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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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화순(和順). 충절공(忠節公) 최영유(崔永濡)의 8세손이다. 화순최씨(和順崔氏)의 시조는 최세기(崔世基)이다. 고려시대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그가 화순의 옛 이름인 오산(烏山)에 봉해짐으로써 화순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최세기와 같이 몽골군의 침입 때 공을 세우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최부(崔傅)를 함께 시조로 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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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 평도공(平度公) 최유경(崔有慶)의 6세손이다. 아들은 최덕순(崔德恂)이고, 손자는 최기(崔基)이다.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은 전주최씨의 주요 세거지이다. 최사립(崔斯立)은 군수를 지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중종 때에 정문이 세워졌으며, 아들인 최덕순도 군수를 지냈고 효성이 지극하여 선조 때에 정문이 섰다. 손자 최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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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평도공(平度公) 최유경(崔有慶)[1343~1413]의 여섯째 아들이다. 최유경은 1406년(태종 6) 참찬의정부사가 된 뒤 사임하고 진천군 초평면 죽정마을로 내려와 스스로 죽정(竹亭)이라 부르며 한가로이 여생을 보냈다. 최사흥(崔士興)은 효성이 지극하여, 충청도 대흥현감무로 있을 때 부친상을 당하자 벼슬을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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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증조할아버지는 지군사(知郡事) 최극함(崔克咸)이다. 최제두(崔濟斗)가 태어난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은 전주최씨의 주요 세거지이다. 최제두는 10세에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할머니가 마마를 앓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약과 함께 마시게 하였는데, 손가락을 끊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하였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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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증조할아버지는 효자 최주민(崔柱旻)이다. 최종운(崔宗運)이 태어난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은 전주최씨의 주요 세거지이다. 최종운은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너무 어려서 상을 치르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기다가 어머니의 사갑(死甲)을 맞던 해에 3년 복을 추복(追服)하였다. 또한 아버지의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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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할아버지는 최기(崔基)이다. 최주민(崔柱旻)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작은아버지를 친아버지처럼 모셨다. 어머니가 병이 나자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어 완쾌하게 하였고, 손수 약맛을 보아 봉양하였다. 숙종(肅宗) 때 정려가 내려졌다. 최주민의 할아버지 최기, 고조할아버지 최덕순, 증조할아버지 최사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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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열녀. 본관은 평산(平山). 남편 최혼(崔焜)은 지사(知事) 최극성(崔克誠)의 손자로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신씨는 남편 최혼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는 등 병간호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결국 남편이 죽자 만 1년 뒤 기제사를 마친 후 곡기를 끊고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1699년(숙종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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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이자 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행(景行), 호는 동우(東愚). 양절공(襄節公) 한확(韓確)의 15세손이다.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출생한 한경석(韓景錫)[1878~1945]은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 묘소 아래에 여막을 짓고 지냈다. 농사를 짓고 산에서 나무를 하면서 모친 봉양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언제나 유순한 마음으로 모친의...